묻고 답하다
환빠논쟁

한국의 국뽕에 대하여

조성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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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에서야 '국뽕'은 저열한 명칭이지만 1980~90년대 초·중·고등학교에서 민족주의, 애국주의 교과서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40대인 내게, 국뽕은 피부처럼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선생님들은 뚜렷한 4계절을 우리나라의 자랑거리로 소개하고 있었고, 학생들은 지금은 언론보도조차 잘 눈에 띄지 않는 세계 기능올림픽 성과를 외워야 했었다. 세계 최초의 금속 활자,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대 따위의, 강박과 콤플렉스를 내포한 레토릭이 쓸개처럼 들러붙은 역사유물들을 소개한 교과서에도 밑줄 그어야 했던 때였다. “민족 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난 우리들은 그걸 당연하게 생각했다.

1990년대 이후 포스트모더니즘 담론이 한국 사회에 가랑비에 옷 젖듯 스며들기 시작하면서 어느 순간 민족이 사라지고 국가가 괄호 안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사실 국가에 대한 자부심을 마약에 취한 것에 비유하는 국뽕이라는 말도 세계화, 국제화, 글로벌과 같은 구호들이 힘을 얻게 되면서, 별달리 내세울 것이 없음에도 과하게 프라이드를 내세우는 민족주의를 조롱하는 데서 비롯되었다.

흔히 국뽕은 열등감의 발로로 여겨진다. 국뽕에 취하면 취할수록, 주모를 부르면 부를수록 그것은 제 열등감을 어설프게 덮으려는 시도일 뿐이라는 것이다. 국뽕은 열등감을 자부심으로 바꾸어 주는 이상한 가역 반응으로, 반만년 역사의 찬란한 민족문화를 꽃피운… 운운하여 우리의 감정적 고양을 이끌냄과 동시에 우리가 처한 진짜 현실에 눈감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러나 국뽕은 반드시 열등감에서 비롯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만약 그러하다면 소위 선진국이라 부르는 국가들에는 국뽕이 없어야 할 듯하지만, 미국도 영국도 프랑스도 모두 국뽕이라 부를만한 역사적 사례나 콘텐츠는 넘쳐난다.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지키고 자기 존재를 과시하기 위해 가진 것보다 더 크게 부풀려 과장하는 사례는 이 세상에 너무나 많다. 그것이 국가 단위로까지 확장된다고 해서 하등 이상할 것은 없다. 자기 것을 자랑하는 마음은 열등감 때문만이 아니라 나르시시즘의 보편적 발로가 아닐까. 나르시시즘을 통한 자아의 고양은 타자의 영향력을 일정하게 제한하고 자아의 주체성을 지키게 한다. 자기애는 스스로를 객관화하는 한편, 그렇게 객관화된 자기가 충분히 매력적이라고 여기게끔 하는 심리적 메커니즘이 깔려 있다. 객관적으로 매력적일만한 '꺼리'들이 넘쳐날수록 나는 더욱 나에게 빠져드는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국뽕 현상이 만연해질 수 있을만한 '꺼리'들이 상당히 많이 존재한다는 점이다. 유튜브 알고리즘에 걸린 몇몇 콘텐츠들만 살펴보아도 이 사실을 명확히 알 수 있다. 거기에는 그럴 듯한 근거들도 탄탄하게, 꽤나 많이 존재한다. 김연아, 박지성, 손흥민 같은 근래 활약한 스포츠 선수들부터 싸이같은 가수나 BTS · 블랙핑크 등의 한국 그룹, 〈기생충〉, 〈미나리〉로 대표되는 영화콘텐츠, 한국산 무기, 자동차, 가전 및 IT제품 등이 그 예가 된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전세계에 불어닥치고 있다는 〈오징어 게임〉도 빼놓을 수 없겠다. 중국의 동북공정에 맞서 강조되고 있는 한복이나 한글, 김치 등의 전통문화나 음식 또한 거론되지 않으면 섭섭할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우리가 일정한 국뽕주의자가 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실상 외국에 나가보니 우리보다 별달리 좋은 것이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1989년 해외여행 자유화 조치 이후, 한국인들은 최상위의 강력한 여권 파워를 손에 쥐고 수많은 나라들을 방문했다. 소위 선진국인 여러 나라들뿐 아니라 아프리카 오지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수많은 세계의 문화와 생활 양식들을 직간접적으로 체험했다. 한 세대 남짓 해외를 다닌 결과, 한국민들은 한국만큼 편안한 곳이 없음을 알게 되었다. 편리한 대중교통, 어디서나 접속 가능한 인터넷 환경, 빠르고 간편한 택배 및 배달시스템, 언제 어디서나 먹고 마실 수 있는 식당, 찻집, 술집 등. 외국에 나가 그 나라의 에티켓에 어긋나지는 않을까 눈치 볼 필요 없이 한국에서는 마음껏 활보하며 거리낌 없이 행동할 수 있다. 국뽕이라는 감정적 고양 상태를 증명하고 채우기 위해서는 해외에 내놓을 만한 다양한 콘텐츠도 필요하지만 먼저 우리의 생활감정에서 이것이 증명되어야 하는데, 국내와 해외를 직접 체험하여 비교해보니 한국이 더 낫다는 것이다. 국뽕은 열등감의 발로라기보다 현실의 생활감정에서 배태된 것이다.

70~80년대에 젊은 시절을 보낸 많은 이들이 왜 박정희와 전두환 시대를 그리워하는 것일까? 태극기를 들고 삼삼오오 모여 입에 담지 못할 욕설을 섞어가며 '빨갱이' 문재인 정부를 저주하는 사람들이 지닌 심리적 근거는 무엇일까?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그중 하나로 생활의 실감 차원에서 생각해볼 필요가 있겠다. 없던 고속도로가 생겨나고, 없던 건물이 뚝딱 서며, 뚜벅이가 어느날 자동차를 몰고 교외에 나가게 된 시기가 이때였다. 뭔가 좋은 쪽으로 계속 발전해가고 있고 내 살림도 점점 나아지고 있으며 자식들 입에 닭다리 하나라도 물려줄 수 있게 된 시대가 된 것이다. 머리가희끗희끗한 택시 운전사분들이 이 도로는 박정희 때 만들어진 거고, 저기다리는 전두환이가 놓은 거라고, 뒷좌석에 앉아 휴대전화나 매만지는 젊은청년들에게 흘낏거리며 말할 때, 그것은 자신이 직접 경험한 발전과 변화의 상승곡선이 현재의 하강 곡선과 대비되고 있음을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그런 분들에게 한일협정 과정의 굴욕이나 광주항쟁을 비롯한 민주화투쟁, 당시 세계 경제 상황에 따른 한국 경제 성장의 배경 등을 읊어봐야당장 차에서 내리라는 소리밖에 듣지 못한다. 체험의 직접성에 따른 확신이 객관적 근거나 상황에 대한 장광조의 논설보다 훨씬 더 설득력을 지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해외를 직접 경험한 이들이 다시 한국에 돌아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짐을 풀 때, 그들은 한국만큼 살기 좋은 곳이 없음을다시 한번 확인하게 된다. 이러니 생활이 국뽕을 만든다고 할 수밖에.

국가에 관해 우리는 이중적이고 모순적인 의식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같다. 우리는 우리나라가 꽤 좋은 곳이라고 생각하지만 한편 우리의 문제점 또한 누구보다 잘 안다. 이를 쉽게 해결하기 어렵다는 사실도 잘 안다.인터넷 해시태그로 자주 등장하는 ‘사이다'는 역설적으로 우리 사회에서 발생하는 갈등과 그 문제해결 과정이 얼마나 지난한지를 증명해준다. 사이다.가 만연했다면 '고구마' 같은 사례들은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았을 것이기때문이다. 과도한 입시경쟁, 막막한 취직, 천정부지로 오르는 집값과 허울뿐인 육아복지제도, 노인문제, 남녀 · 지역·노소차별 등 발본적 개혁 없이는 도무지 해결되지 않을 것 같은 문제들도 산적하지만 당장 내 집 앞의 주차문제나 층간소음, 선후배 간의 과도한 위계 등과 같은 일상생활에서 개인이 겪는 불편부당한 문제들도 우리에게 고구마를 먹인다. 공교롭게도 근래 인기를 끈 〈기생충〉, 〈D.P.〉, 〈오징어 게임〉 등이 모두 한국사회의 문제를 담지하고 있다는 점은 그런 의미에서 주목을 요한다. 도무지 국뽕스럽지 않은 문제들을 까발린 콘텐츠가 국뽕의 근거가 되고 있으니.

국뽕 얘기를 하면, 국뽕이 문제다, 아니다 애국관이 부족한 것이 문제다라는 설왕설래가 반드시 따라오게 된다. 그러나 국뽕이냐 아니냐는 별달리 중요한 문제는 아닌 듯하다. 국뽕이 군부시대의 애국주의의 변형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 하더라도 우리가 진정으로 논쟁해야 할 사항은 따로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한반도가 얼마나 국가주의가 강한 곳인지 잘 모르고 있다. 한반도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1,000년이나 지속된 국가도 있었고 근 500년을 하나의 체제로 유지한 나라도 두 개나 있었다. 국권이 피탈되어 나라 자체가 사라져버린 일도 있었고, 현재도 나라가 둘로 쪼개져 있는 상황이기는 하지만, 하나의 국가 체제 속에서 오래도록 존속하는 것이 이 땅에 살던 사람들에게는 당연한 것이었다. 국가의 행정 서비스가 고도로 발달하고 우리의 생활 깊숙이 개입 가능하게 되면서, 국가와 신민(身民)의 관계는 더욱 밀착되어 버렸다. 국가에 의해, 국가를 통해, 국가를 매개로 개인 생활의 여러 국면들을 제어하는 일이 당연하게 되었다. 코로나19는 이러한 국가의 신민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하는 과정의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국뽕은 본래 국가주의와 애국주의에 대한 비아냥이지만 이조차 국가를 떼놓고는 사유할 수 없는 인식의 한 국면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양상이기도 하다. 우리가 이렇게 국가와 한몸일 수밖에 없다면 우리가 국가를 위해서가 아니라 국가가 우리를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요구하는 계기가 국뽕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이미 60년 4월 혁명에서, 80년 광주에서, 2017년 박근혜 탄핵에서 이를 경험한 바 있다. 한국의 코로나 방역 성공만 하더라도 그러하다. 외신들은 한국민들의 뿌리 깊은 유교주의와 국가순응주의에서 이유를 찾는 모양이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국민 각자의 안위가 궁극적으로 국가의 보존이라는 생각, 국민 개개인의 자발적 협력이 국가 체제를 유지하도록 돕는다는 능동적인 민주의식이 코로나 방역 성공의 원인이었다. 신민 개개인이 기꺼이 국민으로 국가에 참여하여 돕고 협력한다는 아이디어가 성공을 이끌었다. 왕조 시대에도 성공하지 못했던 아래로부터의 혁명을 이끈 지금 대한국민들의 경험이 코로나 사태의 극복을 위한 희미한 빛을 찾아낼 수 있게 했던 것이다. 어떤 국뽕은 안주하게 하지만, 또 다른 국뽕은 분발하게 한다. 안주하게 하는 국뽕은 우리를 취하게 하지만, 분발하게 하는 국뽕은 우리를 변화시킨다. 분발의 국뽕이 국가의 당위이자 목표상을 그리는 데 일조한다면, 그 담론의 제시 과정은 물론 민주적 절차와 방식이 되어야 한다. 국뽕과 민주주의는 그렇게 서로를 지시할 수 있어야 한다. 

손남훈

부산대학교 조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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