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요약
저자가 2001년 미국 유학 시절 한국 모더니즘 시를 영어로 번역하게 된 우연한 계기를 담은 회고담이다. 도서관의 빈 서가에서 본 한국문학의 미약한 위상에서 출발하여, 번역을 통해 세계문학 무대에 한국문학을 알리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1. 우연한 일

어제 같은데 벌써 20여 년 전이다. 2001년 겨울, 내가 공부하던 미국 동부의 어느 주립대학 도서관 서가에서 나는 영어로 번역된 한국문학 작품을 열심히 찾고 있었다. 수업 따라가기도 벅찬 박사과정 학생이 갑자기 먼 땅에서 애국심이 발로했다거나 세계문학 지형도 안에서 우리 문학의 위상을 찾는 자발적인 탐구심으로 그리 한 것은 아니었다. 영미 시사에서 모더니즘을 다루는 수업 중이던 어느 날, 은사님 찰스 번스틴Charles Bermstein이 한국의 모더니즘 시에 대해 소개해 달라고 주문하셨다. 머리가 하얘졌다. 한국의 모더니즘이라니. 부끄럽게도 시인 이상 외에는 떠오르는 이름이 없었다. 그래서 달려간 도서관이었다.

우리는 그때, 지금 생각하면 좀 선진적인 방식으로 온라인/오프라인이 절묘하게 결합된 수업을 했다. 읽을거리를 미리 당겨 읽고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메일을 주고받으며 열띤 토론을 한 후 수업에서 쟁점들을 심화 토론해 마무리 짓는 식. 목요일 오후 3시에 시작되는 수업은 교수님의 너른 연구실에서 진행되었다. 큰 책상을 가운데 두고 뒷자리 소파까지 앉은 학생들은 졸아들어 쓴 약이 된 커피를 각자 따라 마시며 늦저녁까지 수업을 했다. 나는 늘 시인 로버트 크릴리(Robert Creeley, 1926~2005)와 함께 나란히 앉아, 넓은 창 너머 호수를 바라보며 성긴 눈발이 오늘처럼 땅으로 내리지 못하고 하늘로 폴폴 올라가는 걸 보면서 '지금쯤 한국은 새벽 다섯 시겠군!' 하며 두 겹의 시간을 가늠하곤 했다. 시 창작과 비평을함께 다루는 '버펄로 시 프로그램Buffalo Poetics Program'에서 시의 꿈을 좇는친구들은 그 자유롭고도 묵직한 수업에서 상상력과 지력을 최대한 끌어당겨 시를 둘러싼 모든 가능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한국의 모더니즘 시를 소개하는 중차대한 임무에 달려간 락우드 도서관은 내게 꿈의 공간이었다. 한국의 빈약한 도서관 시스템에서 논문 하나 쓰려면 이 학교 저 학교 자료를 찾아 헤매던 경험을 싹 잊게 하는 곳, 당연히 많을 줄 알았던 영역 한국문학서들, 서가는 놀랍게도 거의 비어있었다. 소설책 몇 권, 누렇게 바랜 시집 몇 권이 긴 서가 한 구석에 비스듬히 서 있었다. 오후 햇살이 도서관 실내에 점점이 떠돌다 빈 서가에 내려앉는 먼지를 비추고 있었는데, 나는 그때 한국문학의 영토가 이 먼지 한 점의 질량으로 세계를 부유하고 있다고 느꼈다. 지금 같으면 사진을 찍었겠지만 손전화기가 없던 시절, 그 쓸쓸한 서가의 풍경, 햇살 속을 떠돌던 먼지들이 기억 속에 꿈처럼 남아있다. 여기서 내가 하려는 이야기는 먼지처럼 부유하던 한국문학이 커져서 세계문학의 현장을 누비는 풍경에 관한 것이다. 친구들에게 미리 읽을거리를 주지 못한 나는 기존에 출판된 모더니즘번역시를 찾는 작업은 포기하고 부랴부랴 시 몇 편을 번역하기 시작했다. 한국어에서 영어로 시를 번역하는 일은 그렇게 우연히 시작되었다.그때 미국 친구들에게 소개한 한국의 모더니즘 시는 이상과 김수영, 신경림의 작품이었다. 김지하의 시도 소개했는데, 김수영과 4·19를 이야기하다가 내친 김에 시 「회귀」에 곡을 붙인 김광석의 노래를 들려준 것이다. “목련은 피어 / 흰빛만 하늘로 외롭게 오르고 / 바람에 찢겨 / 한잎씩 꽃은 흙으로 가네”로 시작하여 “검은 등걸 속 / 애틋한 그리움 움트던 겨울날 / 그리움만 남기고 / 저 꽃들은 가네”로 이어지는 노래. 번역을 통해 의미를 어느 정도 짐작한 시인 친구들은, 가수의 비음 섞인 목소리가 독특하다며 노래가 슬프다 했다. “~고”, “~네” 음의 반복이 영시의 행 말미에 오는 운과 유사하냐고 묻던 기억이 난다.

시인 이상은 제롬 로덴버그Jerome Rothenberg가 편찬한 노튼 선집에 소개되어 있어서 알고 있는 친구들이 많았는데, 시집 『황토』의 시인이 노년에 한국의 정치적 지형도에서 어떻게 변절하게 되었는지는 말도 못 꺼냈다. 실험성과 정치성, 민주주의의 과제를 둘러싸고 한국 모더니즘 시사가 나름의 활달한 리듬과 형식을 다채롭게 선보였다는 정도로, 또 우리에게도 이상처럼 놀라운 시인이 있고, 김수영처럼 열렬하고 단단하게시학과 시의 운동성을 결합한 시인이 있다고 말하는 정도에 그쳤다. “시인들 이야기 더 듣고 싶어. 앞으로 네가 번역해 주면 좋겠다. 중국문학이나 일본문학에 비해 한국문학은 덜 알려졌잖아. 더 읽고 싶고 더 알고 싶어.” 친구들의 덕담은 시 프로그램의 유일한 한국인에 대한 친절한 배려였지 싶다. 나중에 보니 그 해 2001년은 한국문학번역원이 출범한 해. 번역원의 지원으로 출간된 시집이 두 권 있었는데, 첫 번째가 김수영, 신경림, 이시영 시인의 시들을 묶은 Variations : Three Korean Poet 였다. 한국시영역에 힘쓴 안선재 수사님Brother Anthony of Taizé과 영문학자 김영무 선생님의 공동 작업이었다.

가끔 시를 소개하는 자리에서 시 번역을 하게 된 계기를 묻는 분들이 있다. 그럴 때마다 “좋은 시를 알리고 싶어서요. 시는 눈을 뜨게 하는 가장 빠른 길이니까요"라고 답하는데 지금 돌이켜보니 더 읽고 더 알고 싶다는 친구들의 말이 번역이라는 '업'을 은연중에 추동한 힘이었지 싶다. 시인이자 비평가로서 번역의 중요성을 강조한 번스틴은 영역 출판된 한국시를 읽게 되면 빠짐없이 그 소감을 전해주셨다. 미국 시인의 눈에 비친 한국시는 리듬감 있는 호흡이 가능한 영역이라고 했던가. 그렇게 나는 고단한 박사논문 집필 단계에서 시 번역을 드문드문 이어갔는데 그 힘은 순전히 시 이야기를 끝없이 되풀이한 친구들의 호기심 덕분이다.

2005년 논문을 마치고 졸업하던 해 이성복의 시집 『아, 입이 없는 것들』의 영역으로 대산문화재단의 번역지원을 받게 되었다. 논문 마무리로 미국에 있던 나를 대신해 남편이 양복을 입고 광화문에 가 축하 꽃다발을 받고 사진을 찍었다. 그때의 느낌은 영어를 모국어로 배우지 않은 내가 한영 번역을 할 수 있을까, 그 의구심에 대해 명분을 얻었다는 기쁨이었다. 그 기쁨은 그러나 너무 짧았다. 이후 오래도록 출판 현실과 마주하며 씨름해야 했기 때문이다. 한국계 미국 시인 명미 김Myung MiKim, 1957~이 함께 토론하며 읽어준 이성복 시의 번역은 빨리 마무리했지만 출판사를 만나는 데 아주 긴 시간이 걸렸던 것이다. 번역을 하고 출판사를 만나지 못하는 당혹감이란! 묵히고 있던 원고는 안선재 선생님께시서 다시 보시고 다리를 놓아 2017년에 미국의 Green Integer 출판사에서 Ah, Mouthless Thing로 나왔다. 번역 2년, 출판 10년이 걸린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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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를 주목해야하는 이유
1
숫자 너머의 흐름 파악

'번역문학의 영토와 번역가의 꿈' 이슈를 중심으로 이 이슈가 보여주는 변화의 방향을 읽으면 단발성 뉴스가 아닌 구조적 흐름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2
산업과 시장에 연결

기사의 주제는 관련 기업과 소비, 투자 심리에 영향을 줄 수 있어 파급 범위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3
앞으로의 변수 점검

지금 나타난 신호가 향후 정책과 실적, 시장 반응으로 이어질 가능성을 점검하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