묻고 답하다
기후위기

기후위기의 삶과 작품

김선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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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에 의해 지구 환경이 극적으로 변화되고 있다는 사실은 지금껏 지속되어온 그리고 앞으로 계속되는 문제적 전망일지언정 아주 최근의 이슈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지질학계와 층서학계1)에서는 인간이 지구의 환경에 극적으로 영향을 미치기 시작한 시점을 1950년 무렵으로 보고 인간이 지구의 환경 변화를 주도한 원인이라는 여러 가지 자료를 발표해왔다. 1970년대부터 2021년 현재 시점에 이르기까지 이산화탄소 배출에 따른 지구 온난화에 대한 우려 또한 언론을 통해 계속 제출되었다. 플라스틱 등 각종 썩지 않는 쓰레기 등으로 인해 수질, 토양, 대기 오염이 가속화되어 왔으며 지금부터라도 이 모든 '인간 행위'에 경각심을 가지고 국제적으로 행동 양식을 변화시키지 않으면 예측할 수도 대비할 수도 없는 급격한 기후 변화에 따른 인류적 재앙은 막을 수 없다는 사실은 몇십 년간 꾸준히 경고되어 온 셈이다. '변화시키지 않으면 정말로 큰 위기가 찾아올 것이라는 경고는 '이제는 기후 위기 자체에 대비하기는 늦었고 이 상황을 어떻게 조금이라도 수습하기 위해 노력할 것인가'를 논하는 시점에 접어들었다.

 

이러한 전지구적 변화에 대해 지질학계와 층서학계는 '인류세라는 개념을 검토한 바 있다. 노벨상 수상자인 대기화학자 파울 크뤼천과, 생태학자 유진 스토머이 발표한 2000년의 한 논문에 의해 '인류세' 개념이 본격적으로 도입되었으며 이는 사회과학계열의 학문 영역에까지 큰 파장을 미쳤다. 지질학계는 지구의 역사를 누대eon-era-period-epoch로 구분하는데 이 기준법에 따르면 현재 우리가 사는 지질시대는 신생대 제4기 홀로세다. 이러한 구분법에서 새로운 지질학적 시대 구분은 복합적 지구 환경의 변화를 기준으로 하여 결정된다. 어떠한 생물의 등장 이후 생물권, 수권, 토양, 암석, 대기 등의 변화를 총체적으로 과학적으로 증명해낼 수 있을 때, 어떤 생물의 출현에 의해 지구에 대대적 변화가 초래되었다고 보고 그것을 이전과는 구분되는 새로운 시기로 구분한다. 그렇다면 홀로세 다음으로(혹은 갈음하는 것으로서) '인류세'를 설정해야 한다는 주장은 인간적 생활 양식이 지구를 인위적으로 변화시켰음을 증명하는 일이다. 인류세 설정과 관련하여 정착민 문화의 시작, 농경 재배, 가축 사육을 지질학적 변화의 구체적 계기로 보는 관점이 제출됨에 따라 인류세의 시작점은 지구의 환경의 급격한 변화의 굴곡을 보여주는 산업화 이후의 근현대가 아니라 인류 탄생의 시점이 된다.

 

인류세 설정의 문제와 기후 위기 시대의 문학을 논하는 일의 근접성

 

그런데 인류세를 설정하는 일은 과학계에 어떤 변화를 일으키는가? 인류 발생 이래로 지구 생태계의 변화가 총체적으로 인류 문명의 흐름에 따라 좌우되었다는 근거는 이미 많이 밝혀진 상태다. 그런데도 인류세라는 새 시대의 전환을 손쉽게 선언하지 못하는 이유는 다른 지질학적 근거가미비한 점이 있기도 하겠지만, 그러한 명명이 궁극적으로 얼마나 효과적인 학계의 변화를 초래할 것인가에 대한 회의적인 관점이 공존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과학계의 관점에서 볼 때 인류에 의한 기후 위기는 지구 생태계의 교란 및 환경 변화의 일부 사례다. 지금까지의 시간을 거듭해오며 생물이 발생하고 진화했다가 멸종하는 일은 수없이 반복된 일이므로 이번 사례만이 특수하다고 볼 수 없다. 그럼에도 인류세를 설정하는 것 즉 인류에 의해 지구가 변화했다는 사실이 지질시대 구분의 기준점을 변화시킬 정도로 중요한 일로 평가될 수 있다면 그것은 이것을 설정하는 이가바로인류이기 때문일 것이다. 조금 더 나아가사유하건대 이는 단순히 자연과학적 분류가아니라 인류가 지구 생태계와의 관계 속에서 자신을 전능한 존재로 선언하는 일이 되지는 않을지 염려하면서도 인류세를 선언함으로써 전지구적 위기에 대해 좀더 적극적으로 책임져야 하며 지구에서 일어나는 환경문제와 기후 위기 및 지구사회의 각종 불평등의 심화 등에 대해 조금 더 경각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는 정치적 행위로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인류세를 설정하는 문제는 이제 인문학적 가치 판단과 무관한 과학 영역의 것으로 남지 않는다. 어떻게 과학적 관점이 인문학적 문제로 연결될 수 있는가와 관련해 인류세와 관련한 지구 시스템 과학의 관점 이야기를 조금 언급해본다. 지구 시스템 과학에 따르면 생물은 일방적으로 지구 환경에 적응하거나 도태되는 방식으로만 지구에서 생존하지 않는다. 생물은 신체 기능을 조절함으로써 대기질이나 수질에 영향을 미쳐 생태계를 유지하는 데 영향을 미친다. 이와 마찬가지로 과학으로 관찰되는 지구 환경의 문제에서 인류세라는 시대 구분은 단지 과학적 관찰 결과로서 수용되는 것이 아닌, 인문학, 사회과학 등과 연결됨으로써 '지구와 인류의 관계'를 어떤 식으로 정립할 것인가에 대한 정치적 의제로 전환된다. 요컨대 인류세의 도입과 관련한 학계의 논쟁에서 지질학계와 층서학계 밖에서 현안으로 떠오른 것은 자연 안에서 인간의 위치가 무엇이며, 인간을 제외한 지구의 나머지 부분과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 새롭게 설명하는 일”2)이다.

 

기후위기 시대의 문학의 역할

 

'인류세'의 등장과 더불어 지질학계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을 제공하는 개론서 인류세에서는 위의 내용과 더불어 인류세에 반대하는 몇 가지 대안에 대해 언급한다. 이는 곧 인류세적인 패러다임의 전환 속에서'문학'의 역할이 무엇일 수 있는가를 묻는 데 참고가 된다. 인류세 설정에 반대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인데 그중 하나는 인류세라는 정의가 인간의 전지구적 주도권을 확인시키는 방향으로 작동함으로써 기술만능주의, 인간중심주의를 강화할 우려에서 비롯된다. 이로부터 더 나아가 '인류세' 정의에서 중요한 것은 어떤 이름을 붙이는 것이 인류세를 정의하는 것의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될 것인가와도 관련된다. 인류 발생 이래로 지구 생태계가 각각의 생물권을 위협하는 수준으로 변화해왔음은 사실이지만 과연 인류라는 단일한 정체성으로 묶이는 개개인이 동일한 수준으로 이러한 변화에 기여했느냐고 묻는다면 그렇다고 답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부유한 국가, 부유한 사람들은 가난한 사람들보다 에너지를 훨씬 더 많이 소비하고 이산화탄소를 훨씬 더 많이 배출”3)하는 동시에 대다수의 사람들은 편의를 위해 대중화된 화석 에너지 소비한다. 따라서 모두에게 동일한 무게의 책임을 물을 수는 없다. 이런 관점에서 인류세는 사회 내 불평등을 그대로 파악하고 그것을 지적할 수 있는 개념이 아니므로 '자본세'라는 대안을 제시하기도 한다. 또 다른 대안적 개념으로는 도나 해러웨이의 '툴루세'가 있다. 부분적으로 인류세의 대안으로서 자본세도 받아들인 해러웨이는 인간 종 중심의 사고를 탈피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인류라는 종의 동일성 자체도 비판적으로 바라보았다. 이는 포스트 휴머니즘으로 전개되는데 “‘종 사이의 위계를 거부하고 동물 해방이라는 의제를 설정하며, 인간의 가치체계를 넘어서 '자연의 고유한 가치'를 인정하자는 새로운 형태의 생물 윤리를 지향“4)한다.

 

요컨대 인류세의 개념과 연관하여 기후 위기 및 지구 생태계 파괴의 문제를 다루고자 할 때 중요한 것은 환경문제 그 자체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에 앞서 '위기'를 의식하거나 이러한 객관적 현실 변화를 토대로 인식적 개념의 틀을 새로이 제공하는 일(인류세 도입과 같은)이 오히려 인간 중심주의적 사고를 강화하는 것이 아닌가하는 점이다. 지질학과 층서학이 과학적 측면에서 인간에 따른 지구 환경의 변화를 객관 수치화했다면, 사회과학은 이러한 토대로부터 '단일한 인류에 대한 환상성을 지적하고 인간이 초래한 이러한 문화적 자본 안에서의 불평등한 위계에 대해 지적했다.

 

그렇다면 이 시점에 문학은 과연 무엇에 대해 말해야하는가? 문학에서 구현되는 디스토피아적 세계는 단순히 오염된 세계와 현실적 대응을 드러내는 것만을 목적하지 않는다. 물리적으로 망가진 세계 속에서 인간 종이 어떻게 불평등을 심화하는지, 그에 따라 사랑하는 이와 함께 사는 삶이 어떤 식으로 불가능해지는지를 상상하는 일은 지극히 인간적인 사고 작용 안에서 인간의 생존과 삶의 가치를 구현하는 데 기여한다. 그러나 그러한 상실감을 상상하는 일보다는 당장 내일부터 식량난에 시달리고 더워 죽거나 얼어 죽을 수도 있다는 생존의 위협에 대한 사실의 전달이 더 '위급한 현실 인식을 고취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기후 위기에 대한 경각심을 주는 것이 목표라면 문학보다는 과학적 사실에 근거한 보도자료가 훨씬 효과적일지도 모른다. 또한 기후 위기는 미래의 한 지점으로 예측되는 시점이 아니라 이미 손쓰기 어려운 현재로 접어든 이 시점에서 지금의 현실이란 보다 직접적으로 현실 운용의 방식을 변화시켜야 하는 시급한 문제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즉각적 생존과 결부되는 문제와 관련하여 문학이 하고자 하는 일은 무엇인가? 기후 위기를 문학서사화한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이며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는가? 기후 위기 시대의 문학을 묻는 일이란 위기의 현실 앞에서 문학은 무엇을 할 수 있고, 그것이 어떤 의미가 있으며, 왜 그러한가를 성찰하는 일과 멀지 않다.

 

본고는 궁극적으로 문학이 기후 위기 시대를 얼마나 잘 보여주고 있는가를 살피는 것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 대신 문학적 사고로서 서사 또는 시나리오의 개념이 기후 위기를 통해 인간 존재를 성찰하는 하나의 관념적 틀을 제공하는 것이라고 가정할 때, 바로 이 서사화의 기능 자체가 문학이 오늘날 지구적 위기를 파악하는 데 '문학적'으로 기여할 수 있는 주요한 지점이 아닌지 검토하려 한다. 글의 전반부에서 인류세에 지면을 크게 할애한 것 역시 이러한 이유에서다. 인류세가 단순히 지질학적 연대 구분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인간 종을 어떤 식으로 정의할 것인가 (그 정의에 따라 환경과 관계 맺는 인류를 다시금 위치지울 수 있다는 것까지 포함하여)’라는 문제에 가까운 것이라 이해할 때 이러한 인류세의 도입 혹은 이와는 다른 대안을 검토하는 이 흐름에서 흥미롭게도 '서사' 또는 '시나리오'의 개념을 사용하고 있음에 주목해본다. 과학적 검증을 통해 근미래를 예측하고 또 과거의 영향력들을 해석하는 과정에서도 일종의 인류 중심의 '서사'가 그 기틀에 자리하고 있음은 매우 흥미롭다. 이는 객관적 관찰의 결과와 그에 따른 논증의 결과가 그 자체만으로 남지 않고 어떤 이데올로기를 생산하는 '서사'에 기대어 담론으로 구성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다. 문학이 인류세 논쟁으로 대변되는 기후 위기에 가장 문학다운 방식으로 끼어들 여지가 있다면 바로 이 '서사화'의 측면은 아닐까? 무엇을 서사화하고 있느냐 만큼이나 무엇을 '서사화할 수 있는가'와 관련한 기능의 측면에서 문학적 기능을 다시금 성찰할 필요도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의식에 따라 이 글에서는 기후 위기를 배경으로 하는 작품 자체에 대한 분석보다도 기후 위기를 반영하는 작품의 경향을 돌아보고 이로써 기후 위기에 대한 문학적 서사란 과연 무엇일 수 있는지를 논해보고자 한다.

 

기후위기를 다루는 문학 서사를 검토할 때의 주의점

 

기후 위기 시대의 문학의 주요한 행위로서 서사화의 기능을 꼽을 수 있다고 할 때, 소설은 과연 무엇을 서사화하고 있으며 그것이 기후 위기에 대해 어떠한 변화의 가능성을 타진하고 있는가? 지금부터 이야기해보고자 하는 주제는 이것인데 그 전에 먼저 짚고 가야 할 것이 있다. 이 글에서는 기후 위기 자체보다도 그와 관련하여 인류의 출현과 수용 여부에 관한 인류 중심 이데올로기적 맥락을 보려 한다. 이런 관점에서 기후 위기란 행성의 인위적 변화와 그로 인한 여러 지구 시스템의 고장/위험을 초래한다는 사실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는 전지구적 (이상) 변화를 수행한 인류를 학문적으로 연명하는 것이 인간중심주의로의 회귀를 의미할 가능성이 농후할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기후 위기 자체를 곧 '인류의 위기'와 등치시키는 것을 넘어서지 못한다는 점에서 비판적으로 검토될 여지가 있다. 그렇다고 인간의 힘을 공언함으로써 사회적/정치적 불평등으로 인해 초래된 환경 파괴의 여러 곁들을 삭제하고 그저 인류가 초래한 멸망의 시나리오를 따라야 한다고 주장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러한 주장의 경우라도 과연 인류의 위기로서 기후 위기가 공언되지 않았다면 이만큼의 종적 책임에의 경각심을 일으킬 수 있었겠는가를 물을 필요는 있다.

 

이러한 의구심은 문학의 영역에서도 마찬가지로 제기된다. 문학의 관점에서 기후 위기가 어떤 인간성의 지점을 망가뜨리는가를 살피고자 할 때 문학만이 형상화할 수 있는 캐릭터 간 관계 양상, 내면, 감정이 있을지언정 그것은 인간적인 것과 얼마나 거리를 확보할 수 있는가? 물론 이런 식으로 접근하면 일종의 서사화 작업 자체가 인간적 사고방식에 기초하고 이러한 언어적 표현과 예술 분야 자체가 인간문화의 소산인 한 근본적인 측면에서 인간중심주의를 벗어날 길은 없을 것이다. 다만 앞서 인류세 논의에서 살펴보았던 것처럼 순전히 생물학적으로 인류에 속한다는 점에서 모든 인간이 환경과 관계 맺는 방식이 동질적인 것은 아니라는 점, 그리고 다른 종과의 관계 속에서 인류를 성찰하려는 시도는 어쩌면 가장 인간적인 방식으로 인간을 대타화하는 최선의 노력일 수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고자 한다.

 

이러한 노력의 예시로 가부장제를 근간으로 삼는 자본주의, 기술만능주의, 인간중심주의가 특정 젠더와 종을 자연화함으로써 그들을 착취하고 억압하는가를 통해 탈인간적 가능성을 타진하려는 에코 페미니즘이나, 인간의 능력치를 넘어서는 것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인간이라고 하는 종적 사고로부터의 해방을 추구하고자 하는 포스트 휴머니즘 담론을 들 수 있다. 이와 같은 사고 확장의 시도를 고려하면 기후 위기 서사란 좁은 의미에서 환경 오염, 기후 변화만을 소재나 주제로 삼는 것에 더해 이러한 관점을 공유하며 만들어지는 포스트 디스토피아/아포칼립스서사, 사이보그나 상상된 외계종을 등장시키는 SF 서사까지도 포함한다. 궁극적으로는 인간에게 최적화되게끔 움직였던 행성이 파괴되어 인간종이 더 이상 행성에 대한 통제권을 행사하지 못하거나 행성으로부터 스스로 추방되는 위기에 놓인 상황을 가정하는 것, 또는 그러한 상상된 미래에 타자화된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 자체가 기후 위기를 사유하는 궁극적인 문학 서사화의 지점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근미래) 포스트 아포칼립스를 배경으로 하는 서사의 경우

 

인간에게 최적화된 행성이 파괴되어 더는 인간에게 이로운 환경이 아닌 상태에서의 생존을 그리는 서사<말과 소리>, 인류가 다른 종과의 우열 관계에서 열등한 종족으로 타자화된 상황<블러드 차일드>, <특사> 등은 옥타비아버틀러의 단편소설집 <블러드 차일드>(이수현 역, 비채, 2016)에서 다채롭게 다뤄진 바 있다. 그중 표제작 <블러드 차일드>에서 인간은 '틀릭'이라고 하는 종족의 보호와 지배 체제 하에 놓여 있다. 인간 남성은 틀릭의 숙주가 되어 알을 품도록 계약되어 있으며, 그러한 틀리의 숙주로서 남성을 낳기 위해 인간 여성의 임신과 출산이 장려된다. 그런데 이러한 설정을 통해 전달하려는 것이 젠더 억압에 대한 미러링만은 아니다. 인간과 틀릭은 종족의 우연에 근거해 관계 맺고 있지만 인간 소년 ''과 틀릭 '트가토이'의 관계는 그러한 단선적 종적 위계로만 환원되지 않는다. 이들은 서로의 종적 위계를 인지하면서도 서로에 대한 소속감과 책임감, 호감을 복합적으로 느낀다. 트가토이는 간에게 강제력을 행사하지 않고 간은 종적 우열 및 계약 관계 속에서 그저 착취당하는 관계로서 트가토이와의 관계를 설정할 수 없음을 확인한다. 이는 인간이 상대화된 세계에서 동질화된 집단으로서의 인류가 착취당하는 것이 아니라, 종적 구분 안에서도 개별성이 존재하며 이들이 다른 종과 관계맺는 과정에서 어떤 수치심을 느끼고 주체성을 가지고자 하는지를 복합적으로 보여준다. 직접적 기후의 위기를 드러내는 소설은 아니지만 이렇듯 종적 다름의 경계 속에서 단일화된 정체성과 거리 두는 서사화를 시도했다는 점은 '인류'라는 종과 인류로서의 개인을 분리해서 사유하게 하는 참조점이 된다.

 

이러한 방식으로 기후 위기 소설을 폭넓게 설정할 때 최근 한국 소설에서 이러한 주제를 다루는 경향이 짙어졌다는 진단을 내리는 것은 무리가 아니다. 한 예로 변이 바이러스 발생 이후 가상의 시점을 배경으로 삼아 가금류 살처분을 하는 노동자의 모습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서이제의 <두개골의 안과 밖>(<자음과모음>. 2021년 여름호)을보자. 이 소설은 조류 바이러스가 인간을 감염시키지 않지만 그것의 '변이'에까지 그러한 기대를 할 수는 없으리라는 미지의 상황에 대한 공포를 다룬다. 게다가 변이 바이러스에 감염되면 인류가 살처분하고 있는 대상인 가금류가 되어버린다는 설정을 통해 급격한 위계의 전도를 보여준다. 또한 ”170라는 글자의 반복적 나열, “아무런 예고도 없이, 그들이 우리를 급습했을 때. 살려줘. 살려주세요. 우리는 목청이 터져라 외쳤지만, 그 소리는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았다"171 와 같이 닭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취소선이 그어진 문장, “인간이 나와 인간을 만나 인간에 대해 사유하는" "오직 인간만을 위한 문학과 같은 구절은 문학적 표현이 현실의 위기를 타진하기에는 지나치게 인간중심적 관점의 발화 양식이지는 않느냐는 질문을 던지게 만든다.

 

생태계가 완전히 망가져버린 시공간을 배경으로 한 포스트 아포칼립스적 서사의 사례로는 강영숙의 <부림지구 벙커 X>(<창비>, 2020)가 있다. 소설은 큰 지진으로 인해 완전히 망가져버린 '부림지구'를 배경으로 설정하여 망가진 세계 안에서 인간 사회가 혐오와 배제의 원칙을 어떤 방식으로 적용하는지 보여준다. 부림지구에서 살아남은 이들은 이미 황폐해진 땅에서 목숨을 겨우 부지하고 있다. 그런데 부림지구를 오염지역으로 격리하는 정부의 지침에 따라 부림지구 거주민은 관리 감독의 대상으로 전락해 사라지거나 생체칩을 이식받을 것을 요구받는다. 우선 더는 인간에게 우호적이지 않은 세계의 파괴가 다름 아닌 자연재해로서의 지진으로 드러난다는 점에 착안할 때 이 소설은 기후 위기에 기초한 이상 징후의 문제 의식을 내재하고 있다고 판단된다. 인류를 압도하는 자연재해는 그 자체로도 경각심을 들게 만드는 사건인데, 지진 이후 사회 구조를 재편하는 인간이 상생이 아니라 다수의 완전한 안전을 위해 소수에 대한 차별적 분리 정책을 취하는 계기로 재해를 의식화하고 있다는 점이 특히 중요해 보인다. 모두의 공평한 파괴처럼 보이는 상황에서마저도 불행은 모두에게 평등하지 않으며 인류가 구축해놓은 사회 시스템 안에서 가장 차별받는 쪽에서부터 망가져간다는 사실은 비단 전쟁이나 전지구적 전염병 사태뿐만 아니라 행성 파괴의 범주에서도 마찬가지다.

 

이처럼 기후 위기 서사 중에서는 포스트 아포칼립스를 배경으로 삼아 SF장르를 표방하는 사례가 비교적 많다. 그런 중에도 각각의 서사는 기후 위기에 더해 애도, 사랑, 퀴어 등과 같은 키워드를 얹음으로써 변별된다. 한 예로 조시현의 <어스>(<AnA> 20211)를 보자. 이 소설은 환경 오염에 대한 안일한 인간적 대응이 종래에는 기존의 인간적 방식의 애도나 사랑조차 허용하지 않는 상황에 이르게 할 수 있음에 대한 경고처럼 읽힌다. 각종 유해물질 및 쓰레기에 의해 생물종 사이의 균형이 무너지면서 인간을 지구에 매장하는 것을 금지하는 2047, 인류는 개선이 아니라 존속을 위해 사람을 묻어 애도하는 일을 금지한다. 인간의 몸은 존엄한 신체로 취급되지 않으며 더욱이 죽은 몸은 일정 시간이 지난 후 유해물질을 내뿜는다는 것이 밝혀지면서 공해의 주원인으로 지목된다. 이런 상황에서 ''는 사랑하는 '안나'를 잃고 자신을 묻어달라던 그녀의 조언을 이뤄주기 위해 불법적인 일인 인체의 매장을 감행하고자 위험 지역으로 분류된 매립장에 드나드는 공장 동료의 도움을 구한다. 당장의 생존이 인류의 가장 긴급한 현안이 될 때 인류 또는 인간적 가치의 동질성은 유지되지 않는다. 소설 속 인물의 계급으로 따져보건대 소설 속 세계에서 그나마도 가치 있는 인간은 아직 죽지 않아 오염물질로 분류되지 않는 노동할 수 있는 육체를 지닌 이뿐이다. 또한 기존의 인간이 문명화해온 인간을 기리는 방식인 매장이 환경과 인간에게 위협으로 간주되는 총체적 위기 상황에서 인류의 문화유산이란 지극히 '인류'만을 위한 것인 제도였음을 역으로 드러내는 장치로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다른 예론 퀴어 앤솔로지 <언니밖에 없네>에 수록된 작품 중 조해진의 <가장 큰 깃발>은 반복되는 폭염, 화재, 홍수에 의해 생태계의 균형이 무너지면서 식량난이 발생하고 이로써 강대국이 자신의 이익을 선취하고자 약소국을 약탈하는 크고 작은 전쟁을 벌이면서 세계를 망가뜨리고 마침내 원인을 알 수 없는 바이러스의 창궐로 하릴없이 망해버린 세계를 배경으로 삼는다(작가노트'에서 "전염병의 시대'를 언급하고 있는 것처럼 특히 코로나 이후에 발표되는 소설 중에서는 전염병 이전의 세계로 영영 돌아가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과 무력감이 기후 위기 등을 종합한 전망 없는 미래로 그려진 바가 직지 않다는 것도 참고해볼 만하다). 소설은 지구가 완전히 망해버리기 전부터 연인 관계였던 ''가 몰락의 시기를 살아가다 이별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본래 결혼해 가정을 꾸렸던 ''''와 같은 공항의 직원이었다. 그들은 함께 시위를 하면서 연인으로 발전한다. 대재앙 선포에 따른 실내 타운이 조성되면서 가정을 정리하고 ''와 함께 지금껏 살아왔던 그는 말이 혈액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고 그 곁을 지키러 가야겠다고 말한다. 이 서사에서 볼 수 있듯 위기 상황에서도 인간은 관계에 대한 지향을 포기하지 않는다. 이로써 기후 위기를 배경으로 관계를 성찰하는 서사가 '공존'에 대한 감각을 상기한다고 본다면 인간의 관계 지향성을 행성 단위의 위기를 타진하는 하나의 가능성으로서 검토할 여지가 있다.

 

지금까지 언급한 서사들은 지구적 위기 상황이 오직 인간에게 위험이 되는 방향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이로써 지구적 위기 상황 속에서 또 다른 인간의 안위를 위해 위험을 감행하거나 그러한 최소한의 인간적 가치를 잃어버리지 않으려는 서사를 통해 위기 상황일수록 공존과 공동체의 삶에 대한 수평적 패러다임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지평을 확보할 수 있다. 하나 이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될 수 있다. 기후 변화 및 생태계의 교란에 따른 지구 시스템의 고장이 비단 인간종만을 위기의 상태로 몰아넣은 것은 아니나, 이를 위기로 의식하고 그에 따른 혐오니 훼손에 노출되는 등의 추가적인 상실을 겪는 주제로 언급되는 것은 다름 아닌 인간이다. 그렇기에 기후 위기 서사라는 발화 방식 자체가 실제로 눈앞에 다가온 지구적 위험 상황에 대한 인간의 의식 수준을 넘어선 경각심을 얼마나 효과적으로 고취시킬 수 있느냐는 물음 앞에서 쉽게 답을 내리기는 어려워 보인다. 다만 이는 각 작품별 성취 차원에서 비롯되는 문제만은 아니며 애당초 현실의 삶과 직결되는 생태 위기 상황과 궁극적 상황 전환의 계기로서 문학적 형식 자체가 얼마나 탁월하게 연결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염려에 가깝다.

 

종적 패러다임을 활용하는 서사의 경우

 

그렇다면 어떻게 인간중심주의를 어떻게 서사적으로 대타화할 수 있는가? 문학적 서사가 언어적 사고에 기반하고 있다는 점에서 인간적 사고를 벗어나기 어렵다는 근본적인 문제를 감안하고 종적 개념으로 세계를 설계하는 소설을 살펴본다. 지금껏 살핀 바와 같이 포스트 아포칼립스를 살아가는 인간을 다루는 것 자체가 인간 중심적일 수밖에 없다면 최소한 인간이 아닌 다른 존재가 서사를 이끌어가는 경우는 어떨까? <두 번째 달>(에디토리얼, 2021)은 여덟 손가락 종족, 열 손가락 종족, 열두 손가락 종족으로 인간 종이 세분화되는 방식으로 유전적 형질을 구성하게 되는 먼 미래에, 마침내 인류에 의해 지구가 인간 맞춤형 행성으로서의 기능을 모두 마치고 휴식기에 접어든 시점에서 서사를 시작한다. 인류가 오랫동안 심혈을 기울여 만든 AI는 우주정거장에 생존했던 최후의 2인이 사망한 이후 지구 복원 및 인류 재생 프로젝트를 실행한다. 소설은 많은 지면을 할애하여 인류가 발생할 수 있는 조건이 갖춰지기 위해 때맞춰 복합적으로 일어나야 하는 사건이 적지 않음을 보여준다. 이를테면 일정 시간 이상 초식 동물이 지구에 남아있게 되면 탄소 배출 증가로 지구의 온도가 높아져 인류의 기원이 되는 생물종의 탄생이 불가능하기에 육식 동물이 등장해 통해 초식동물의 개체수가 적시에 조절되어야 하는 식이다. 이러한 주요 서사 사이에 전개되는 인류 문명발달사, 여덟 손가락/열 손가락/열두 손가락의 분화된 인간의 영역 구축의 역사, 인간이 지구를 완전히 망가뜨린 이후 계속해서 이러한 위기를 경고해왔던 이들이 영영 인류를 복원시키지 않는 방식으로의 반인류적 입장을 표방한다는 이야기, 인간이 인간다운 능력을 갖추기 위해서는 다만 생존과 관련한 유전학적 형질뿐만 아니라 감정에 대한 습득이 필요하다는 내용도 주목해 볼 만하다.

 

AI 의 인류복원 프로젝트를 읽어나가다 보면 한번 조절 능력을 잃어버린 지구라는 행성이 다시 복원되기까지 많은 지구 시스템이 때맞춰 지구 온도를 높이거나 낮추고 생물권의 변화를 도모해야 하며, 무엇보다도 약 96,000년 가량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과학적 사실에 근거한 전개인 만큼 이러한 방식으로 인류라는 ''에 이르는 환경의 변화를 서사화한 것은 충분히 흥미롭다. 그러나 지구가 다시 생명체가 존재할 수 있는 행성으로서 변모하는 것이 오직 인간만을 위한 작업으로 그려지고 있지 않은지, AI가 하필이면 지구 복원이 아닌 '인류 복원을 최우선으로 목표하여 프로그래밍되어 있다는 사실이 인간의 전능감의 회복으로 환원될 여지는 없지 않은지 되짚어 보아야 한다. 결국 지구 행성의 복원이란 오직 인간만을 위한 것일 수밖에 없는가? 혹은 이러한 인간적 사고로 돌아올 수밖에 없는가?

 

아포칼립스적 상황에서 인간적 가치를 추구하는 것이 기후 위기를 다루는 서사에서 여전히 '인간성의 유능감을 기준 삼을 수 있음을 고려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인류를 철저히 하나의 생물권으로서 복원시켜야 하는 특수한 ''으로 고려하는 서사 역시 인간적인 것에서 좀체 멀어지기 어려운 작업은 아닐까? 이와 관련하여 김초엽의 <므레모사>(<현대문학>20213)를 이어 읽어본다. <므레모사>는 다리를 다친 후 의족을 달고 다시 무대에 선 댄서 '유안이 위험한 물질로 오염된 다크 투어리즘을 갔다가 어떤 진실을 마주하는 이야기다. 다크 투어가 향하는 곳은 전쟁의 폭격으로 인해 대량의 전구체 물질로 오염된 오블라 협곡이다. 이곳에 머무는 '므레모사의 생존자'는 그 오염된 곳에서 살아남은 이들을 일컫는다. 유안은 투어의 일원 중 한 명인 '레오'가 사실은 이곳에서 알 수 없는 목소리에 홀린 자신의 동료를 찾으러 재차 방문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므레모사 주민과 이 투어가 방문객에게 무언가를 숨기고 있음을 알게 된다. 이후 유안은 모종의 모험을 겪으며 다음의 진실을 확인한다. 오염물질에 노출된 인간은 흉측한 외모를 갖게 되었고, 느리게 움직였고, 발성기관을 잃고 흡사 나무 같은 모습이 된다. 더는 인간이라고도 인간이 아니라고도 부를 수 없게 된 새로운 형태의 존재인 귀환자들은 그들을 다시 인간적 모습으로 정상화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암시를 걸어 브레모사에 정착하고 자신들에게 복종하도록 만든다. 레오는 이러한 정황을 동료가 이상한 암시에 걸려 이곳에서 착취당하고 있다고 해석한다. 이들의 삶은 암시에 걸린 이들이 결코 자발적으로 선택할 수 없다는 믿음 하에 레오는 그들을 본래의 인간적 규범에 맞는 존재로 되돌리기 위해 마을을 파괴하는 것도 망설이지 않는다. 레오와 같이 어떤 이들의 삶을 '정상화'하고자 하는 방향으로 흘러가던 서사는 므레모사에서의 탈출이 가능할 것인가에 대한 긴박함 속에서 유안이 레오를 해치고 기꺼이 '그들'의 무리가 될 수 있도록 간청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이 서사를 기후 위기 소설로 보는 것에 다소무리가 있을 수 있다. 이 글에서 정의하는 폭넓은 의미의 기후 위기에 부합할 만한 소설적 설정은 전쟁으로 인한 오염물질의 폭발과 그로 인해 보편의 규범으로부터 일정한 경계 밖에서 관리되고 있는 환경이 전부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 소설에서 주요하게 반복되는 유안의 신체에 대한 성찰도 일차적으로는 기후위기와 직접적 연관성을 지닌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녀가 두 다리로 걷는 인간의 모습으로 '회귀'하기 위해 의족을 착용하는 일에 거부감을 가지고 의문을 던진다는 점에 기초할 때, 보편 규범화되어 있는 신체성에대한 질문이 서사의 주된 주제처럼 보이기도 한다. 다만 이것을 단순히 신체 변형에 대한 이해에 국한하지 않고 인간적 규범을 상대화하는 서사로 해석할 수 있지는 않을까. 유안이 자신의 변형된 신체를 보편 인간의 모습으로 회귀시켜야 할 결여로 보는 것을 거부하는 장면과, 인간이었던 이들이 더 이상 인간이 아닌 그러나 인간으로 돌아오기를 거부하고 오히려 인간 종족 자체를 상대화하는 이 새로운 권력 관계의 전환을 포개어보자. 인간이 초래한 오염으로 인해 변형된 인간 관점에서는 '탈인간화된 존재가 더 이상 인간이 표준되지 않는 새로운 생태계의 질서를 구축한다는 상상으로 이 서사는 다시금 정리된다. 인간적 인지를 넘어서는 서사가 가능하다면 그것은 가장 반인간적 측면에서가 아니라, 가장 인간적인 사고를 겨냥하여 그것을 뒤집는 것에서 가능할 것이다.

 

소략하건대 이 글이 궁극적으로 기후 위기를 다루는 문학과 그 서사화의 양식이 실제 기후 위기를 개선하는 데 얼마만큼의 실질적인 효과를 주느냐는 물음 앞에서는 여전히 그 답이 모호하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또한 이 문제에 대해 문학의 무용성이나 미학성에 관해 논하는 것은 어쩌면 당장의 위기를 낭만화하는 일이 될지도 모른다는 우려도 여전히 떨치기 어렵다. 그러나 '인류세와 관련해 서사화/시나리오화하는 작업의 정치적 수행성을 고려하면 문학이 추구하는 이러한 종적 타자화의 상상력은 적어도 인간이 끊임없이 자신을 권력화하는 방식으로 써왔던 서사와 시나리오를 무너뜨린다. 애초에 문학이 지닌 수행성이 실질적 행동에 이르게 하는 의식적 변화를 추구하는 작업이라면 문학은 가장 문학다운 방법으로 이 위기를 심각하게 진단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인류는 앞으로 어떤 서사를, 어떤 시나리오를 써낼 것이며 그것은 우리에게 어떤 현재와 어떤 미래를 가져다줄 것인가? 그런데(혹은 그리고)......이 위기의 시대 속에서 이러한 질문이 과연 누구에게 왜 중요한가? 아직 해결하지 못한 질문을 붙여둔다.

 

선우은실. 최근 발표작으로 <약자-되기로서의 개인적 정치성과 에세이라는 언어 형식>(<>2021년 하반기),

 

 

1) 증서 또는 서학과 관련하여 인류의 3'지질시대'를 참고 내용에 따르면 지질시대는 "충 혹은 '총서'로부터 추론되는데, 오랜 시간에 걸쳐 쌓아진 층은 "총서학적 기록을 만든다. 지질학자 중에서 증서 기록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사람들을 충서학자라고 부르며 지질시대 구분이 바로 증서학자의 담당업무다. 지질시대의 재구성" 문제를 다룰 때 충서학이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다. C. 엘리스, 김용진 박범순 역, 인류세, 교유서가 2021.

 

2) 위의 책, 239. 각주위의 인류세와 관련된 내용은 모두 같은 책의 내용을 참고했음.

 

3) 위의 책, 222.

 

4) 위의 책 233-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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