묻고 답하다
동물권

[동물권] 동물에 대한 공전을 포기할수 없는 우리의 모습

조성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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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계 미국 작가인 카렌 테이 야마시타Karen Tei Yamashita의 소설,Through the Arc of the Rain Forest열대우림의 호를 통해서(1990)에는 기묘한 공존 관계가 나온다. 이시마루 가즈마사는 어릴 적 운석에 맞은 후 눈앞에 작은 공이 떠다니는 걸 발견한다. 항상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마치 공전하듯 머리 주위를 벗어나지 않는 공 때문에 그가 놀림감이 되고 그의 앞길이 막힐지 모른다는 부모의 걱정과 달리, 이시마루는 말도 통하지 않고 그저 제자리를 지키고 있는 공을 이내 그의 '반려동물이자 친구'로 받아들인다. 이시마루와 공의 기묘한 공존 관계가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점차 부모와 주변 사람들도 공의 존재를 받아들이면서 이시마루와 공과 사람들의 공전/공존 관계는 더 늘어나고, 이시마루가 브라질로 건너가며 대륙을 넘어서도 계속된다. 하지만 미국에서 온 사업가가 공의 특별한 능력을 이용해서 돈을 벌기 위해 둘을다른 사람들로부터 떼어 놓는다. 그 탓인지는 모르지만 결국 공은 속이텅 빈 채 사그라져 가고, 어느 날 아침 이시마루는 "일어나 자기 앞에 아무런 막힘없이 방이 보이는 걸 보고 주체할 수 없이 울었다".

 

공전과 공존, 우리말로만 가능한 말장난 같은 연상이지만 머릿속을 맴돈다. 기후변화로 인한 생태계 파괴가 동물의 멸종을 가속화시키고 있고, 인류세와 여섯 번째 대멸종이 더 이상 황당한 얘기가 아닌 지금 이 순간, 인류는 뒤늦게 공존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 이용할 줄만 알았던, 그래서 사라지고 파괴돼도 쓸모 있었기에 괜찮다고 여겼던 비인간 존재들과 함께 사는 법을 찾으려고 애쓴다. 하지만 너무도 오랫동안 이용하며 살아왔기에 다른 방식으로 공존하는 일은 상상조차 힘들다. 캐리 울프Cary Wolfe처럼 동물 논의를 통해 공존을 고민하는 이들은 인간이라는 개념을 만드는 첫 순간부터 동물이 이용됐다고 말한다. '동물이 아닌' 존재로 인간을 규정하고, 저속한 동물성'과 비교해 '인간성'은 우월하다는 인간중심주의적 개념을 만들어낸 것이다. 따라서 인간이 하는 모든 일과 생각에 깊이 박힌 인간중심주의를 해체하지 않고는 진정한 공존이란 불가능하다. 반면 디페시 차크라바르티Dipesh Chakrabarty처럼 기후변화와 인류세에 주목하는 이들은 자본주의 방식으로 이용하는 게 문제라고 지적한다. 비인간 존재의 보존이나 재생은 안중에도 없고, 오직 인간의 소비 욕구만을 채우는 기계로 작동했던 자본주의가 이젠 인간마저도 소비시키는 역설적 시간이 다가오는 것이다. 이 시간을 늦추고 공존의 시간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는 자본주의 체제를 대체할 혁명적인 정치·경제적 변화가 필요하다.

 

'인식'을 넘어 '지식의 차원에서 생각해야

 

혁명을 뜻하는 영단어인 'revolution'은 원래 공전을 뜻하는 말이다. 옥스퍼드 영어사전만 봐도 혁명이라는 정치적 혹은 역사적 정의보다천체의 일부로 궤도나 원형을 따라 회귀적으로 도는 행위나 사실; 지구 주위에서 태양, 별 등이 보이는 움직임"이라는 정의가 먼저 나온다. 코페르니쿠스의 '혁명'이라고 말을 하지만, 사실 그 내용은 지구가 아니라 태양을 중심으로 천체가 움직인다는 '공전'에 대한 것이 아니었던가? 놀랍게도 이처럼 행성으로서 지구를 생각하자는 500년도 넘은 요청이, 바로 21세기에 차크라바르티가 혁명적인 정치·경제적 변화를 촉구하며 하는 요청이기도 하다. 지구the globe와 행성the planet을 구분하면서 차크라바르티는 기후변화와 인류세의 문제가 UN과 같은 국가중심의, 그렇기에 어쩔 수 없이 인간 중심적일 수밖에 없는 '지구적 통치 기구global governance apparatus'로는 해결될 수 없다고 말한다. '정치체제와 정의를 비인간 존재까지 확장시키기 위해 우선 필요한 일은 현재의 문제를 '행성의 환경 위기'로 삼는 사고의 전환이다. 터무니없을 정도로 너무도 당연한 사실, 우리가 사는 이 지구가 행성으로서 공전하고 있다는 그 사실을 받아들여야만 혁명적인 방식으로 공존할 가능성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지구가 공전하는 행성이란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거다. 차크라바르티도 굳이 그 사실을 재확인하자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푸코의 용어를 잠시 빌리자면, 그 사실을 '인식connaissance'이 아니라 '지식savoir'의 차원에서 생각해 보자는 뜻일 거다. 지구가 행성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기 위해서 우리의 지식 체계는 얼마나 또 어떻게 변했을까?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렇게 변화된 지식 체계에서 우리는 얼마나 변해야 했을까? 공전하는 천체의 일부로서 산다는 건 어떤 것일까? 이렇게 묻다 보면 뜬금없이 별점이나 점성학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하늘과 인간이 하나의 운명 공동체라는 '지식'을 바탕으로 고대의 사람들은 별의 움직임에서, 더 나아가서는 자연의 변화에서 무언가를 찾아 자신의 삶과 국가의 앞날을 점쳤다고 한다. 그래서 게오르크 루카치Georg Lukacs"별이 반짝이는 하늘이 가능한 모든 경로의 지도가 되던 시절, 별빛으로 모든 경로가 빛나던 그 시절은 얼마나 행복한가"라는 한탄으로소설의 이론을 시작한다. 루카치에게 근대는 그러한 행복이 더 이상 불가능한 시대며, 아직도 그런 행복이 가능하다고 믿는 데서 오는 아이러니를 담아내는 장르가 바로 소설이다. 하늘의 별과 땅의 인간이 만드는 하나의 운명 공동체, 그런 고향과 같은 곳이 이 세상에 가능할거라는 '지식'을 버리지 못하는 사람들, 그렇게 치유될 수 없는 향수병에 걸려 세상을 떠도는 이들이 바로 소설의 주인공인 것이다.

 

하지만 소설은 현실의 재현이다. 소설의 주인공처럼, 사람들은 현실에서 세상을 그렇게 떠돌아다녔다. 그렇지만 이들은 향수병에 걸려 시름시름 앓기보다는 불가능한 행복을 가능하게 만들고자 했고, 고향을 찾아 세상을 떠돌아다니기보다는 세상을 고향으로 바꾸고자 했다. 그리고 과학기술과 자본주의라는 물결을 타고 그렇게 돌아다니며 성공을 이뤄 왔다. 소설의 주인공들이 꿈만 꾸던 것을 현실로 만든 것이다. 21세기 들어 소설이 죽었다(이번엔 정말이다)"라고 윌 셀프Will Self가 부고를 올린 것도 무리가 아니다. 그러나 21세기는 기후변화와 인류세를 보여 주며, 과학기술과 자본주의가 소설만 죽인 게 아님을 알린다. 현실의 행복은 누군가의/무언가의 불행이었고, 고향은 누군가에게서/무언가에서 빼앗은 곳이었던 것이다. 여기에 아마도 루카치는 생각도 못했을 아이러니가 겹쳐진다. 그렇게 행복과 고향 만들기에 성공한 결과 우리의 불행과 실향을 자초했다는 역설적 사실이다. 솔직히 서양 문명의 황금기인 고대 그리스를 행복한 시대라고 했던 루카치가 그 시기에 과연 누가 그렇게 행복했는지, 누군가 행복했다면 누구/무엇의 희생을 통해 그랬는지 생각해 봤을까 하는 의문도 든다. 그들의 행복은 자본주의 시대의 행복만큼이나 행성적이지 못했던 거다. 지구가 태양을 공전하는 행성이란 사실이 2천 년 후에나 밝혀질 것이었으니 당연히 그럴 법하다. 하지만 그 사실을 너무도 잘 '인식' 하는 우리는 왜 행성적이지 못한 걸까?

 

늦지 않았다고 간절히 믿고 이제라도 바꿔 보자, 그렇게 말하며 인간과 비인간 존재의 공존을 바라는 수많은 이들이 자본주의의 근원지에서 등장해 각기 다른 방식으로 변화를 시도해 왔다. 데이비드 애튼버러, 제인 구달, 레이첼 카슨, 톰 리건, 도나 해러웨이, 앨 고어, 피터 싱어, 아르네 네스, 그레타 툰베리, 그린피스, PETA………… 명단은 점점 늘어 간다. 이렇게 나열해 보면 왜 아직도 행성적이지 못한지, 왜 행성을 바꾸지 못하는지 의문이 들 정도다. 정말 왜일까? 이쯤에서 행성적인 것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생각해 봐야 할 듯싶다. 기후변화와 인류세라는 지구 전체가 직면한 문제는 인간뿐만 아니라 비인간 존재까지 함께 고려해야 하고, 또한 인간의 역사가 아닌 지구의 시간에서 그 문제를 고민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차크라바르티는 '행성적'이란 말을 제안한다. 물론 인간이라는 틀이 얼마나 협소한지를 깨닫게 해주는 거시적인 시각이 필요하다는 것은 자명하다. 지금 당면한 문제가 그 틀로 담아내기엔 너무도 크고 복잡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거시적으로 흩어지고 나눠져 있던 존재들을 한데 모을 수 있다고 해서, 그들이 다 같은 생각과 행동을 하게 만들 수는 없다. 세계평화라는 목표를 위해 UN으로 모인 국가들이 비인간은커녕 인간의 평화도 제대로 실현하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과연 더 넓은 시각에서 더 큰 행성적 통치 기구'를 만든다고 얼마나 달라질 수 있을까?

 

미시적 관점의 중요성

 

어쩌면 거시적인 시각만큼이나 미시적인 시각 역시 필요한지도 모른다. 기후변화와 인류세가 너무도 큰 문제라는 이유로 해결책마저 무조건, 전부 다 커야만 하는 걸까? 이런 논리라면 결국 하나의 해결책만 찾아다니기 쉽다. 하지만 겉으로 보이는 크기는 수많은 문제들이 복잡하게 얽혀서 생긴 결과다. 따지고 보면 앞서 언급한 긴 명단은 문제가 수없이 많다는 의미지, 문제가 크다는 의미는 아니지 않은가? 공존이란 말로 하나의 명단에 모아 놓으니 큰 문제를 다루는 듯 보이지만, 그들이 모두 같은 방식으로 공존을 생각하고 추구하는 것도 아니다. 서로 비슷한 생각을 하고 비슷한 방법을 취하는 이들도 있겠지만, 비슷한 생각에 다른 방법 혹은 반대로 다른 생각에 비슷한 방법을 따르는 이들도 분명히 있을 거다. 이렇게 미세한(행성적인 시각에서 본다면 차이와 유사함이 만들어 낸 복잡함으로 가능한 것은 하나의 커다란 관계망이 아니라 수많은 때로는 분절되고 때로는 일시적인, 하지만 혼자보다는 언제나 더 크고 더 힘 있는관계들일 것이다. 송이버섯을 채집하고 유통하고 판매하는 과정을 조사하다 '예상치 않은 구석'에서 인간과 자연이 공존하는 모습을 보고 '자본주의의 폐허 속 삶의 가능성'을 찾았던 애나 칭Anna Lowenhaupt Tsing'행성의 개별자The Particular in the Planetary'라는 강연에서 행성의 작은 비인간 존재들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어찌 보면 행성에 가려진 존재들이라고도 할수 있다. 인류세가 지향하는 획일적인 논리를 비판하며 '쑬루세Chthulucene, 지하세'란 말로 복잡한 현재를 담으려 했던 해러웨이도'기묘한 친족들oddkins'을 만들어야 한다고 말한다. 아마도 이제는 칭과 해러웨이의 말처럼 미시적인 공존 관계를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

 

공존, 그 과감하고 필요불가결한 시도

 

이 고민을 갖고 다시 공전과 공존의 연상으로 되돌아온다. 사실 공전은 행성에서만 일어나는 일은 아니다. 그처럼 거대한 차원과 정반대로 아주 미세한 원자단위에서도 공전은 사물이 존재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그리고 20세기 들어 우리가 '인식' 하게 된 사실은 원자단위의 움직임이 단선적 인과론을 따르지 않는 불확정성의 세계를 만든다는 점이다. 공전은 더 이상 정확히 예측할 수 있는 움직임이 아니고, 원자의세계도 마찬가지다. 시간마저도 뒤틀린 이 세계는 '예상치 않은 구석'에서 '기묘한 친족들을 만들어 내며 사물들이 공존하는 곳이다. 양자역학으로부터 사물의 윤리를 이끌어 낸 카렌 바라드Karen Barad'얽힘entanglement'이라는 말로 이 세계의 관계를 지칭한다. 그리고 '얽힘'의 관계에서는 만남으로써 서로가 서로를 규정하는 이른바 '내적 작용intra-actions'이 일어난다고 설명한다. 어떤 정체성이 있기에 따라서 어떤 목적을 갖고 서로 만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만나기에 그 순간 어떤 정체성이 만들어진다는 뜻이다. 따라서 공존은 세계의 안정된 상태를 의미하지 않는다. 공존은 그 세계 내에서 개별자들이 만나 서로를 알아 가는 행위이자 결과가 불확실한 움직임이다. 공전의 상대를 찾아 서로의 무언가가 되려는 과감한 시도다. 원자단위의 개별자들이 시도하는 공존 관계가 모여 행성적인 변화가 일어날까? 사실 모르겠다. 물리학자들도 여전히 거시적인 상대성이론과 미시적인 양자론을 하나로 연결시킬 이른바 '만물이론Theory of Everything'을 찾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공존하는 방법을 찾지 못하면, 그리 멀지 않은 어느 날 아무런 막힘없이 세상이 보이는 걸 보고 주체할 수 없이 울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우는 이는 아마도 인간이 아닐 것이다.

 

이동신

 

1971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한국외국어대학교 영어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 대학원에서 영어학 석사학위를, 미국 텍사스 A&M대학교에서 영문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저서 A Genealogy of Cyborgothic: Aesthetics and Ethics in the Age of Posthumanism, 공저서 <21세기 사상의 최전선 전 지구적 공존을 위한 사유의 대전환> <관계와 경계: 코로나 시대의 인간과 동물> 등을 펴냈고, <갈라테아 2,2>를 번역했다. 현재 서울대학교 영어영문학과 교수로 재직하며 연구재단 지원사업 '위계에서 얽힘으로 포스트휴먼 시대의 인간동물 관계'의 연구책임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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