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 드라마 <스위트 투스: 사슴뿔을 가진 소년>에서는 팬데믹 이후의 세계가 그려진다. 세계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바이러스가 창궐해 사람들은 죽어 가고, 더 이상 인간의 아이가 태어나지 않는다. 대신 사슴과 사람, 돼지와 사람식의 다양한 종류의 하이브리드가 태어난다. 하이브리드가 바이러스의 원인인지 결과인지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사람들은 이 하이브리드가 바이러스를 가져왔다 생각한다. 그래서 이들을 분노의 대상으로 삼거나 신약 개발에 이용하기도 한다. 그 과정에서 말을 하는 하이브리드들이 발견되며 이들을 죽이지 않고 보호하는 사람도 생겨난다. 이 드라마 시작에, 사슴뿔을 가진 아이의 아버지로 추정되는 인물이 아이에게 세계에 대해 설명하면서 “인간은 자신의 욕심으로 인해 많은 것을 가졌고, 그래서 자연이 화가 나서 인간 세계를 부수기 시작했다. 그래서 사람들이 죽어 갔다"라고 말했다.

코로나 팬데믹 이후 촬영된 이 드라마는 인간이 자연을 망쳤고, 그래서 팬데믹이 발생했다는 서사로 이루어져 있다. 드라마에서처럼 근대사회의 진보와 발전이라는 주술, 그리고 무지와 무책임에서 깨어나는 징후가 지구 여기저기에 보이고 있다. 그것은 코로나19, 기후변화, 산불 등 지구 곳곳에 위험 신호가 켜지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올해 그리스에서는 산불이 지속됐고, 호주에서는 여름 산불로 많은 수의 야생동물이 희생됐다. 이제 인류 사회는 더 이상 인간이 자연을 극복하고 정복해 온 자랑스러운 문명과 진보의 역사에 대해 순진하게 혹은 당당하게 말할 수 없다. 드라마에서처럼 우리가 자연을 망쳤고, 자연이 인류에게 화가 났다는 일종의 죄의식과 책임 의식이 작게나마 곳곳에서 싹트고 있다.

IPCC기후변화에 관한 정부 간 협의체는 현재의 기후변화 속도가 가속돼 20년 안에 지구 평균기온이 산업화 이전(1850~1900년) 대비 1.5도 오를 것으로 예상했다. 이것은 21세기의 환경문제가 이전과는 전혀 다른 차원으로 불확실성이 증가할 것을 의미한다. 근대사회 이후 지구의 야생동물 서식지가 줄어들면서 야생동물의 수 자체가 급격히 감소하고 있고, 지구는 6차 대멸종을 앞두고 있다는 암울한 전망도 제기된다. 척추동물 등을 중심으로 봤을 때, 생물다양성은 위협적인 상태에 놓여 있다. 그리고 생물다양성을 연구하는 생태학자들은 생태적 우울에 빠져있다. 과학자들이 어떤 종에 대해 연구하는 것은 자신이 그 종을 사랑하기 때문인데, 연구를 하면 할수록 그것이 사라져 간다는 사실을 알게 되기에 우울을 느낀다. 이는 단지 아프리카 등지에서 연구하는 이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한반도에서도 다양한 동물이 이미 멸종됐다. 호랑이, 늑대, 여우 등은 동물원이 아니고선 남한에서 볼 수 없다. 환경과 생태 영역에 진지한 관심을 기울이다 보면, 우울이란 정서는 필연적이다.

20세기에 근대화와 더불어 울려 퍼졌던 진보의 서사와 명랑한 감정은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 계몽은 그 빛을 통해 많은 것을 어둠에서 해방시켰다고 주장하지만, 드넓은 자연과 많은 생물체들은 계몽의 빛 속에서 비가시화됐고 때로는 멸종됐다. 하늘을 뒤덮은 광공해로 은하수도 사라져 별빛을 따라 여행하던 이들은 갈 길을 잃었다. 근대화의 역사는 사실 인간이 자연에 도전하고 자연을 극복하면서 문명을 건설해 가는 과정이었고, 광활한 자연을 도시로 바꿔 가는 과정이었다. 그런 과정에서 환경으로서의 자연만이 아니라 근대 이전 사회에서는 자연적이라 여겼던 신분제적 질서나 성역할 등은 의심됐고, 결국 붕괴됐다. 인류는 근대 산업문명으로 인해 가능해진 엄청난 생산력과 힘으로 새로운 질서와 규범들을 창출했다. 인간은 기아에서 탈출했고, 전염병과 여러 위험을 정복하기도 했다. 사회는 다양한 위험과 불확실성을 통제하며 안전을 확장했고, 이는 사회보장 social security 으로 제도화되어갔다. 사회는 새로운 질서와 규범을 창출했고, 여전히 불안정하지만 복지국가와 인권이라는 제도 및 규범을 통해 위험의 통제와 안전의 확보는 어느 정도 성공한 듯도 했다.

하지만 그런 인류의 진보와 발전의 역사는 한편으론 인종, 성별, 장애 등을 매개로 한 타자에 대한 배제의 역사이자 인간과 자연의 분리의 역사기도 했다. 역사학자 차크라바르티는 행성사(planetary history)에 대한 연구를 통해, 인류의 진보 시기가 화석연료 사용이 확장했을 때였으며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진보와 인권의 서사를 더 이상 순진하게 찬양할 수 없다고 말한다. 인류 사회의 경제성장, 인권 진보 등의 정치적 발전은 화석연료 사용으로 인한 생산력 증대로 인해 가능했기에, 더이상 이에 대해 무지하거나 무책임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인간의 진보와 발전은, 기후변화를 비롯한 무수히 많은 종의 멸종과 동시에 이루어졌다. 그리고 우리는 사회의 영역을 확장해 온 것처럼 공동체의 범위를 넓혀야 한다. 지역, 국가, 지구를 넘어 행성 자체가 우리의 운명 공동체란 점을 새로이 인식해야 한다. 그래야 새로운 위험과 공동체의 안전범위를 조망할 수 있다.

전환의 서사와 지식, 실천

인간이 자연에 이 지구란 행성에 무슨 짓을 했는지 이제야 깨닫기 시작하고 있다. 기후 위기와 6차 대멸종에 대한 경고는, 그런 무지와 무책임에서 깨어나기 위한 출발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선진국들은 탄소중립, 멸종되는 동물들에 대한 시급한 보전 등을 강력히 주장하고 있다. 특히 코로나 팬데믹 이후 그린뉴딜, 바이든 정부의 인프라 법안(Infrastructure Bill) 등에는 자연보전을 위한 혁신적인 제안들이 포함돼 있고 새로운 시도들이 진행 중이다. 하지만 지금 전환의 길, 전환의 논리를 마련하기에 적적할까. 사람들에게 환경문제는 여전히 사회 안, 우리 삶의 문제로 인식되기보다는 저 밖의 무언가, 외부의 문제로 인식되고 있는 듯하다.

환경문제에 대해 사람들이 멀게 느끼는 이유 중 하나는 자신의 삶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 구체적으로 생각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기후변화 문제는 저 머나먼 남태평양 섬 주민들이나 호주의 코알라에게 닥친 일로 미디어를 통해서만 경험될 뿐이다. 그런데 이것은 근대사회의 출발 시점에도 마찬가지였다. 빈곤과 불평등의 문제가 가시화되기 어려워 사회문제로 인식되지 않았기에 빅토르 위고나 찰스 디킨스와 같은 위대한 소설가들은 서사를 통해 이를 가시화했다. 그리고 근대 사회과학은 이런 문제들이 단순히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문제라는 인식의 지평을 확장하기 위한 논리와 지식, 통계를 구축했다. 근대국가와 사회는 기존엔 자신의 영역에 머물러 있던 빈곤/불평등의 문제를 국가의 책무로 전환하고 사회권의 초석을 만들어 가며 공동체의 범위를 확장, 서로에 대한 책임을 강화했다. 사회가 스스로의 내부 위험과 불확실성을 관리하는 방식을 창출하면서 복지국가가 가능해졌다.

20세기 초두와 마찬가지로 21세기 현재 환경과 생태에 관한 문제들은 아직 충분히 사회문제로 잘 구성되지 않고, 이에 대한 서사나 지식, 제도의 창출 역시 요원하다. 더욱이 노동문제나 위계 문제 등 사회에 존재하는 다양한 문제들이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에 자연과의 관계를 새로이 구성하는 것에 대한 반감도 있다. 성장을 통한 재분배를 강조할 경우, 자연과 환경은 그저 자원이고 인간의 복지를 위해 이용돼야 하는 존재일 뿐이다. 인간의 문제가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상황에서 사람들은 자연, 기후변화, 생태 파괴의 문제에 대한 논의를 주저하기도 한다. 자연의 위험을 더 강하게 통제해서 식량 위기나 분배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더 높은 수준으로 기술력을 발전시켜 자연을 더 잘 이용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코로나 팬데믹이 보여 주듯, 과학기술만으로는 어떤 위험도 모두 통제될 수 없다.

그렇다면 인간 사회는 자연과의 관계를 어떻게 재구성해야 할까? 사회가 자연과 환경을 보다 사회의 문제로 인식하고 적극적으로 고민하기 위해서는 자연환경 ·동물·식물이 사회 속에서 어떤 존재인지, 인간과 자연, 동물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해야 할 것인지 질문할 필요가 있다. 자연의 문제가 단순히 외부의 환경문제가 아니라 사회의 문제로 인식되고 서사화되며, 이에 대한 새로운 지식을 만들어 대응하는 실천을 제도화하기 위해서는 어떤 노력이 필요할까? 사회문제로서의 환경문제 인식은 생물학자 레이첼 카슨의 <침묵의 봄>을 위시한 환경파괴 문제  고발에서 출발했다. 인간의 편리를 위한 화학약품 사용이 자연을 파괴하고 있다는 문제의식이 등장했고, 이는 환경정의와 환경운동 그리고 환경정책으로 이어졌다. 그래서 점차 환경이라는 영역이 사회의 제도 속에서 관리가 필요한 영역으로 확립됐다.

이 과정에서 환경을 주요한 고려 요인으로 인식하는 사회적 제도들이 창출됐다. 환경영향평가 및 환경과 관련된 조세들이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떤 지역을 개발할 경우, 개발이 그 지역 환경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에 대한 평가가 필수적이 되고 있다. 그리고 생태 보전을 위한 여러 장치들이 만들어지고 있다. 최근 한국의 갯벌이 유네스코에 자연유산으로 등재된 것은 자연이 갖고 있는 내재적 가치를 유산이란 측면으로 인정하고, 이를 통해 보전을 촉구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환경에 대한 영향, 생태 보전의 노력, 환경을 지키기 위한 세금 등 다양한 방식으로 자연과의 관계를 고려하고, 이에 대한 제도가 마련되고 있다. 하지만 이런 시도는 기존에 파괴됐던 자연과 환경에 대한 피해와 그 회복에 초점을 두고 있을 뿐이다. 자연과 환경의 피해를 최소화하는 것을 넘어, 자연과 환경이 고유한 생명체로서의 가치를 실현할 수 있는, 인간과 자연이 공존하는 더 좋은 삶에 대한 고민은 부족하다. 환경과 자연, 동물에 대해서 파괴로 인한 문제를 회복하는 것을 넘어 인간과 자연이 함께 공존할 수 있는 새로운 틀에 대한 상상이 필요하다. 환경의 문제를 정치의 영역이자 공동체의 책무로 확장해야 한다.

한편 기존에 억압됐던 자연의 목소리, 동물의 목소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동물과 관련해서는 동물권에 대한 관심과 사회운동도 증가하고 있다. 한국에서도 민법 개정안을 통해 동물이 단순히 물건이 아니라, 인간과는 다르지만 하나의 고유한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려는 흐름이 있다. 또한 전 세계적으로는 동물을, 지각을 갖춘 존재로서 인정하고 동물의 권리를 헌법에 기입하려는 노력들이 증가하고 있다. 남미의 여러 나라들은 자연의 권리를 헌법에 넣고 있기도 하다. 공동체 성원의 범위를, 인간을 넘어 다양한 생명체로 확장하고자 하는 것이다.

또한 이렇게 자연의 권리를 인정하는 것은, 어떤 측면에서는 원주민 그리고 다양한 지구상의 공동체가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구성해 왔던 오랜 지혜, 삶의 방식을 인정하고 이에 대해 근대의 지식을 넘어 탐색해 보기 위함이다. 원주민들이 자연과 공존하며 맺어 왔던 삶의 방식은 식민주의자들에 의해 부정됐지만, 이것을 통해 새로운 관계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중이다. 최근에는 과학 연구에서도 원주민들이 숲을 관리하던 방식이 소위 '자연적인' 숲 관리 방식보다 생물다양성을 훨씬 더 보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또한 인간이 자연을 적극적으로 관리해 온 방식을 통해 근대사회 이전에 인간과 자연이 공존하는 모델이 존재했음을 밝혀내고 있다. 근대 이전 사회에 존재했던 자연과의 관계는 여태껏 미신이나 야만 그리고 사라져야 할 것으로 인식돼 왔다. 하지만 이제 산업화 이전 인류가 자연과 공존했던 방식을 통해 '오래된 미래'를 찾고, 그것을 규범 및 새로운 질서의 근간으로 만들어 가는 과정이 이루어지고 있다.

생태적 정의에 대한 상상

인간과 자연이 맺은 근대적 관계와 계약을 넘어 새로운 관계는 어떻게 가능할까? 법에 의해 지배되는 근대사회에서는 법과 정의에 대한 고민 없이 새로운 관계를 형성할 수 없다. 동물에 대한 윤리적 고찰로 시작된 동물권, 동물복지 논의는 단순히 윤리의 문제가 아니라 정의의 문제로 확장돼 사고되기 시작했다. 동물권, 동물복지, 자연의 권리, 환경정의, 생태정의 등 인간과 자연에 대한 새로운 규범의 정립을 통해 자연과의 관계를 새로이 상상하고 써나가야 한다. 이는 단순히 실정법의 제정 문제가 아니라 인간과 자연, 동물, 식물들이 어떻게 정의로운 관계를 맺을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서사, 지식, 실천을 창출하는 것이다.

이들의 고통과 피해를 줄이는 것뿐 아니라 생명체 각자가 고유한 가치와 존엄을 누릴 수 있는 삶의 방식, 사회질서에 대한 상상을 해야 한다.계몽의 밝은 빛이 사라지게 한 은하수와 그늘을 소환해 이들과의 은은한 관계를 보이게 하는 것 역시 필요하다. 관계에 대한 고민 속에서 새로운 종류의 경제와 삶의 방식, 사회질서를 모색해야 할 것이다. 은은한 관계는 근대 이전 사회의 삶의 방식에서도 찾아질 수 있고, 새로운 하이브리드의 형태일 수도 있다.

동물에 대해 사유하는 철학자 데스프레는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이 다른 존재에 요구하는 것에 대해 책임감을 갖고, 그런 책임감에 의거해 행동하는 세계를 생각한다. 이럴 경우, 무지의 허세도 없고 무지의 불가능성으로 인해 우리가 원하는 바 모든 것을 다 행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을 것이다." 순수를 가장한 무지의 허세를 벗어 버리고, 우리가 과거에 동물과 또 자연과 어떤 관계를 맺어 왔는지, 근대 이후의 관계가 야기한 폭력과 부정의(injustice)는 무엇인지, 어떻게 하면 정의로운 관계와 실천을 창출할 수 있을지 상상하는 데서 새로운 정의, 생태적 정의는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주윤정

1974년 인천에서 태어났다.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사회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소수자에 대한 역사적 연구에서 출발해 현재는 인간동물 관계 연구를 생태정의와 생태평화의 관점에서 진행 중이다. 소수자, 타자, 다양한 존재들이 공존하는 사회의 가능성과 다양성의 가치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경이와 돌봄의 정동 천성산과 제주의 여성 지킴이들>(<젠더와 문화>, 2020), <상품에서 생명으로 가축 살처분 어셈블리지와 인간동물 관계>(<농촌사회>, 2020) 등의 논문을 썼고, 저서 <보이지 않은 역사: 한국 시각장애인들의 저항과 연대> 등을 펴냈다. 현재 서울대학교 사회발전연구소 선임 연구원으로 재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