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는 시간마다 책을 읽는 친구가 정말로 있었다. 내 뒷자리에 앉는 남자애였다. 그는 말뚝박기와 공차기로 난장판이 되어가는 교실 따위는 보이지도 않는 것처럼 얌전히 앉아 책장을 넘겼다. 혼자 있으면 외로움을 넘어 비참함을 느끼는 중학생들 사이에서 꿋꿋이 홀로 자리를 지키는 그의 모습은 감탄을 자아냈다. 또래가 아닌 선생님한테만.

 

당장 전학 간다고 해도 롤링 페이퍼에 딱히 남긴 말이 없는 친구, '친구'라 부르기엔 말 한마디 섞을 일 없이 책만 보는 애. 흐릿하게만 인식되던 그 애를 들여다보게 된 건, 수업 시간에 앞에서 건넨 프린트물을 뒷자리로 넘겼을 때였다. 그는 교과서 밑에 책을 그럴듯하게 숨겨놓고 읽느라 프린트물에 눈길도 주지 않고 있었다. 심상치 않았던 건 그의 표정이었다. 글만 빽빽하게 박힌 책을 읽으면서 만화책을 책상 밑에 감춰놓고 슬쩍슬쩍 보는 친구들과 다를 바 없는 얼굴을 하고 있던 것이다! 흘끗 본 책에는 정말 그림 한 점 없었고, 당시에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던 귀여니를 필두로 한 인터넷 소설특유의 이모티콘이나 과도한 여백마저 없었는데도.

 

"재밌어?"

 

그는 길게 답하는 대신 책가방에서 책을 하나 꺼냈다. 때마침 지금 1권이 있다면서, 얼결에 받아 든 책의 표지는 일반적인 소설에 비해 제법 화려했고, '판타지 장편소설'이란 설명과 함께 <하얀 늑대들>(윤현승, 파피루스, 2003)이란 제목이 세로로 쓰여 있었다. 처음 접하는 판타지란 장르, 섣불리 시작하기 겁나는 '장편'이란 단어, 화려하고 장엄한 표지 위의 세로쓰기모든 게 수상쩍었지만, 나는 홀린 듯이 책장을 넘겼다. 그리고 그 책은 내가 몰랐던 이세계로 들어가는 최초의 입구가 되었다.

 

하얀 늑대들이 나를 이끈 곳은 왕과 작위 서열을 가진 귀족들이 등장하는 얼렁뚱땅 중세 유럽 느낌의 세계였다. 전쟁이 벌어지고 알 수 없는 음모가 판치는 대혼란 시대,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마을의 차기 촌장으로 각광받는 정도의 삶을 살던 주인공이 전쟁터에 나가게 되는 이야기였다.

 

판타지 소설이라기에 주인공이 통쾌하게 검과 마법을 휘두르면서 세계를 악의 무리로부터 구하는 내용일 줄 알았다. 착각이었다. 하얀 늑대들의 주인공은 소설 첫 장에서부터 전쟁 한복판에서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시체 밑에 몸을 숨기느라 바빴다. 페이지를 넘길수록 주인공이 강해지기는커넝 그가 가진 한계만 분명해졌다. ‘전쟁 같은 대한민국 경쟁 사회에서 살아남는 것도 힘든데 이럴 거면 내가 일기를 썼지. 왜 판타지 소설을 읽나.......’라는 생각이 들 때쯤, 약하디약한 주인공의 고백이 마음을 거세게 두들겼다. 못난 스스로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나중에 손자에게 들려줄 이야깃거리가 있는 모험담을 가진 할아버지가 되고 싶다는 꿈이 담긴 독백이었다. 이 소설이 '판타지'로 분류되는 건, 마법이나 이종족 같은 것보단 주인공의 이 꿈 때문이 아닐까. 타고난 재능과 상관없이 누구나 자기가 원하는 꿈을 꿀 수는 있는 거라고 부추기는 그 말이 그 말을 하는 사람이 나와 비슷한 범위의 인간이라는 점이 인생의 주체의식이라곤 없었던 중학생의 마음을 뒤흔들고 말았다.

 

물론 소설 속에는 속이 시원해질 정도로 강한 사람들도 등장한다. 일단 '하얀 늑대들' 자체가 세계관 내 최강의 기사단인 울프 기사단 중에서도 가장 손꼽히는 사람들을 부르는 말이다. 그들이 "하얀 늑대의 이빨을 보고 살아남을 수 있는 건 하얀 늑대뿐이다"라고 말할 때면, 나도 그런 무리의 일원이 되어보고 싶어서 애가 탔다. 다만 짜증 날 정도로 현실적인 주인공은 잘난 하얀 늑대들과 자신을 비교하며 자괴감에 빠지는데, 그런 그에게 하얀 늑대들은 말한다. 곧 네 이빨이 뭔지 알게 될 날이 올 거야."

 

그게 대체 뭔지, 결국에는 주인공이 강해지는 건지 궁금해죽을 지경이었던 나는 하교할 때쯤 친하지도 않았던 남자애의 교복 자락을 붙들고 얼른다음 권을 내놓으라고 닦달했다. 책 읽느라 밤을 새우다시피 한 다음 날의 등교는 하얀 늑대들의 다음 권을 읽기 위한 것이었다. '뒷자리에 앉아서책만 읽는 애'에서 '뭘 좀 아는 뒷자리 친구'로 승격된 남자애는 마지못해하면서도 상기된 표정으로 착실하게 책을 건넸다. 아직 완결되지 않아서 더 이상 빌려줄 책이 없다는 충격적인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내 안에 앞으로 채워주지 않으면 계속해서 갈증을 느끼게 될 새로운 웅덩이가 생겼다는 걸 깨달았다.

 

친구에게 빌려 보는 책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게 된 나는 자연스레 대여점에 수시로 드나들게 되었다. (웹소설 플랫폼도, 스마트폰도 없던 비극적인 시절이었다.) 문제는 대여점에서 빌린 책을 읽을 곳이 없었다. 아버지는 학업과 전혀 상관없는 허황된 판타지 소설 따위에 시간을 쓰는 걸 절대 용납하지 않았으니까, 나는 빌린 책들을 들키지 않게 체육복으로 한 번 감싸서 책가방에 넣었다. 책은 이불과 교과서 밑에서 은밀하게 펼쳐졌다. 한 자라도 더 읽고 싶었던 나는 길 위에서도 쉴 새 없이 책장을 넘기기에 이르렀다. 누가 보면 문학소녀라고 대단히 착각했을 만한 모습이었다. 판타지 소설을 읽는 것 자체가 모험이 되는 상황이 닥치자, 비로소 하루 종일 묵묵하게 책만 붙잡고 있던 나의 '뭘 좀 아는 뒷자리 친구'를 이해할 수 있었다. 갠 정말로 뭘 아는 애였다.

 

책장을 넘기는 것만으로 나는 온갖 세계를 누비며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하얀 늑대들과 비슷한 중세 느낌의 세계관, 중국 무림, 몇천 년 후의 미래, 심지어는 게임 속 세상까지 넘나들었다. 대부분의 등장인물은 내가 하얀 늑대들을 읽기 전에 기대했던 대로 강력했다. 검의 최강 달인급인 소드 마스터부터 마법의 정점에 선 9서클 이상의 대마법사를 비롯해 정령사, 치유사, 테이머 등 다양한 직업군의 최강자들이 끝없이 등장해 세계를 구하고 일생의 사랑을 얻었다. 자극적인 클리셰로 점철된 판타지소설들은 '양판소'(양산형 판타지 소설)라고 사람들에게 비난받기도 했지만, 나는 그런 소설들이 끝없이 양산되기만을, 그래서 내 모험이 끝나지 않기만을 바랐다. 그 시절의 나는 환상이 필요했다. 현실과 동떨어질수록 좋았다. 학교와 학원을 왕복하는 지긋지긋한 하루가 수없이 반복됐고, 지루하기만 한 시간을 쌓아 올려 얻을 수 있는 미래는 그다지 멋질 것 같지 않았으니까. 중상위권의 성적을 유지하지만 전교권은 아니고, 피구를 할 때 친구들이 꽤나 반기는 운동 실력을 가지고 있지만 꼭 있어야 되는 선수는 아니고, 그림을 잘 그리긴 하는데 대회에 나가 생활기록부에 보탬을 줄 수 있을 만한수준은 아니고, 모두가 좋아하는 친화력을 가진 것도 아닌, 그렇게 크게 바뀔 여지 없는 인생 속에서도 꿈은 꿀 수 있는 거니까.

 

나의 '뭘 좀 아는 뒷자리 친구' 역시 이런 마음 아니었을까. (역시 정말 뭘좀 아는 애라니까.) 그와 나는 각자 판타지 소설을 읽느라 대화할 겨를은 없었지만, 종종 문자를 주고받았다. '요즘 뭐가 재밌냐'라고 물어보면 괜찮았던 목록을 주루룩 뽑아주는 식이었다. 참으로 정보 전달에만 충실한, 담백한 연락이었다. 다만 나는 말하지 않아도 '우리'는 뭔가 통한다고 생각했다. 현실과는 다른 세계로 들어가는 입구를 공유하는 그 세계로 잠시라도 들어갔다 나와야만 현실을 견딜 수 있는 마음을 아는 일종의 모험 동지라고나 할까.

 

착각에 불과했을 것이다. 학년이 올라가며 그와는 순식간에 멀어졌으니까. 그래도 판타지 소설들은 계속해서 쏟아졌고 내 하루 역시 별다를 것 없이 흘러갔다. 그 모든 일이 너무나 자연스러웠고, 대한민국 중학생의 일정은 반 친구 하나쯤은 쉽게 잊을 만큼 빽빽했다. 그리고 그즈음, <하얀 늑대들>의 완결이 나왔다. 한없이 약했던 주인공의 이빨은 대체 뭐였을까? 그간 수많은 판타지 소설을 섭렵했던 나는 기대를 안고 다시 하얀 늑대들 정주행을 시작했다.

 

기다린 세월이 무색하게도 주인공은 여전히 부족했다. 주인공은 무력이 최강인 세계관에서 끝까지 검을 휘두르며 싸우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는 자신의 못난 모습을 고백할 줄 알았고, 그 부족한 부분을 주변의 친구들로 채울 줄 아는 사람이 되었다. 그가 약해도 주인공이 될 수 있었던 이유였다.

 

차라리 내가 엄청난 재능을 타고나지 못했거나 기연을 만나지 못해서 이 세계의 주인공이 되지 못하는 거라고 해달란 말이야! 나는 토로할 사람도 없이 비밀스럽게 판타지 소설이나 뒤적거리고 있는 처지가 외롭고 쓸쓸해서 견딜 수 없었다. 동시에 나의 '뭘 좀 아는 뒷자리 친구'가 책가방에서 <하얀 늑대들> 1권을 선뜻 꺼내주던 장면이 떠올랐다. 네가 나에게 다른 세계로 들어가는 방법을 알려주었듯, 나 역시 한 번쯤 너에게 왜 판타지 소설을 읽냐고 물어볼 걸 그랬지. 그랬다면 우리는 정말로 친구가 될 수 있었을 텐데. 그럼 주인공이 되지 못하는 사람들끼리 외롭지 않았을 텐데, 불현듯 그 친구의 가방엔 언제나 좋아하는 판타지 소설의 첫 권이 들어 있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읽음으로써 돌아가는 상상 속 영사기

 

김효연

독자 게스트 에디터,

 

다양한 플랫폼이 제공하는 영상 속에서 친절하게 다가오는 감정에 재미를 느끼는 것이 익숙해진 세상입니다. 친절한 세상에서 누군가의 글을 읽는 행위는 꽤 단순하고 다정한 일처럼 느껴지기도 해요. 편지를 읽는 것처럼요. 하지만 이미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져버린 친절함에 한 걸음 떨어져 어쩌면 능동적으로, 불친절한 글을 읽는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닐 겁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여러 이유로 책을 사고, 읽기에 도전하곤 합니다. 하지만 책을 온전히 읽어 내리는 사람은 그에 비하면 적은 것 같습니다. 저 역시도 책을 '사는' 행위를 좋아하던 사람이었으니까요. '읽어야 한다' 혹은 '읽고 싶다'라는 마음으로 책을 집어 들었지만 막상 가져가면 책장에 박혀 있기 일쑤였죠. 그런데도 제가 독서를 할 수 있게 된 이유는 책을 읽어 내렸기 때문이었습니다. 편안하고 자극적인 외적 공간에서 잠시 멀어져 단순히 글을 읽어 내려갔습니다. 무슨 힘이 있었기에 자발적인 독서를 시작했는지 그때는 몰랐습니다만, 돌아보니 그 힘은 '재미'였습니다. 읽는 행위를 지속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 속에 있는 재미를 찾았기 때문이었던 겁니다.

 

그러나 재미를 찾기 위해서는 책을 읽는다'는 과정이 존재해야만 합니다. 책을 읽고 싶다면 말 그대로 읽어야 합니다. 독서를 하기 위해 필요한 건 읽는 행위에 재미를 느끼는 것이고 읽는 행위에 재미를 느끼기 위해선 책에서 재미를 느껴야 한다는 단순하지만 어려운 독서의 순환에 조금은 도움이 되고 싶습니다. 독서의 재미를 알 수 있도록 도와주고 그 시작을 독려하고 싶습니다.

 

이 기획의 요점은 책을 읽어보자는 이야기가 되겠으나 그 접근 방법에서 사람들이 반감을 느끼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작가님들께 첫 독서의 경험과 읽는 데에서 오는 즐거움을 곁들여 책을 추천해달라고 부탁드렸습니다. 글이라는 질료로 창작을 하고 있고 엄청난 양의 글들을 읽어오신 독서 고수님들에게 말입니다.

 

우선 제 이야길 해볼까 합니다. 어릴 적부터 집에 책이 가득했습니다. 거실부터 방 곳곳 책 없는 곳이 없었어요. 친구들은 저희 집을 도서관이라 부르기도 했습니다. 엄마는 책을 많이 접할 수 있게 도와주셨고 저는 어린 마음에 단순히 책을 많이 읽었습니다. 명작, 미술, 위인전, 과학, 경제, 각종 소설 등, 읽고 싶어서 읽었던 건 아니었지만 어린 시절부터 여러 분야의 책을 접하면서 호기심을 갖게 되었고, 얕지만 다양한 이야기들을 제 안에 담아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자발적인 읽기가 아니었던 탓일까요. 제 독서는 본격 청소년기에 들어서며 정체기를 맞이했습니다. 독서의 필요성과 재미를 전혀 느끼지 못했어요. 책을 읽지 않아도 일상생활에 문제가 없었고 청소년기 많은 학생들이 그렇듯 SNS와 친구에 빠져 책이라는 건 일상에서 잊힌 지 오래였습니다. 읽는 것이라고는 국어 책에 나오는 짧은 시와 잘린 소설들뿐이었죠.

 

한창 페이스북을 할 때였습니다. 우연히 책 소개하는 페이지를 발견하고 오래 잊고 지내던 책이라는 걸 떠올리게 되었어요. 책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영상 속 사람들의 모습이 어딘지 모르게 특별해 보였습니다. 동시에 책을 읽고 싶다는 욕구가 차오르기 시작했습니다. 문제집을 사겠다는 명목으로 온라인 서점에 들어가 소설 책 한 권을 주문했습니다. 온전히 자의로 책을 산 건 처음이었습니다. 데드맨, 고등학생 소녀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히 흥미로운 제목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책을 펴자마자 단숨에 읽어 내려갔습니다. 미스터리하고 자극적이라고 할 수 있을 법한 이야기를 읽으며 제삼자가 되어 소설 공간 속에 들어와 있는 듯했습니다. 책의 재미를 알게 된 순간이었습니다. 작고 예민하게 글을 받아들이고 감정을 느끼다 보니 어느새 아주 커다란 무언가가 제 안에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커다란 무언가는 즐거움이라는 명목으로 제 안에 꿈틀대기 시작했고 저는 즐거움을 마다할 필요도 그럴 힘도 없었습니다. 재미로 시작한 독서는 제 안에서 점차 넓어지고 다양해졌습니다. 문장이 주는 위로가, 슬픔이 독서라는 즐거움으로 느껴지는 날들이었습니다.

 

책은 저에게 헤르만 헤세의 소설 데미안속 데미안이었고, 흥분과 설렘을 온전히 품게 하는 사랑이었다가 날카로운 무기이기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책은 결국엔 내가 되는 길이었습니다. 나를 찾아 나서고, 찾고 또다시 찾아 나서는 순환, 아무리 반복해도 지겹지 않은 나를 알아가는 방법이었습니다.

 

고등학생이었던 저는 시간을 틈타 책을 읽었습니다. 학교 점심시간, 쉬는 시간 언제나 책상 위에는 책이 놓여 있었고 어느새 이과 반의 문학소녀로 통하게 되었어요. 친구들은 종종 책에 대한 질문을 해왔습니다. 어떤 책이 재미있는지, 너는 왜 계속 책을 읽는지, 책은 다 사서 읽는 건지 등의 순수한 질문들을 말입니다. 질문을 받을 때마다 책에서 느꼈던 감정을 온전히 전해주고 싶어 열심히 그리고 흥분을 담아 떠들었습니다. 유명 인터넷 서점에서볼 수 있을 법한 정확하고 깔끔한 정보는 아니었겠지만 경험을 섞어 조심스럽게 그들을 읽기의 세계로 유인하는 작은 비행기가 되고 싶었습니다. 제유인책이 통한 걸까요. 어느 날은 점심시간에 친구들이 찾아와 함께 책을 읽기도 했습니다. 각자 조용한 시간을 보내는 듯 보였으나 실은 아주 소란스러운 읽기의 장이었습니다. 각자만의 세계에서 누구보다 소란스럽게 영사기를 돌리고 있었으니까요.

 

책에 대한 질문 중 반 이상은 책을 추천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책 추천을 좋아하는 편입니다. 책을 사이에 두고 이야기를 나눈다는 것, 그것은 무엇보다 신나는 일로 느껴져요. 어떤 책을 이야기해야 할지에 대한 고민은상대의 물음, 상황, 내가 알고 있는 상대의 모습에서 단서를 찾곤 합니다. 제 추천이 그들의 취향을 저격하길 바라며 신중하게 이야기합니다. 그 한 권이 상대에게 얼마나 큰 즐거움을 가져다줄지 모르는 거니까요.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열심히 책들을 떠올렸습니다. 제가 추천할 첫 번째 책은 두 가지를 고려해 소개하게 되었어요. 우선 정말 재미있는 책을 추천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독서를 하려면 재미의 순환이 있어야 합니다. 재미있어야 읽기가 가능하고 읽어야 다음 읽기의 원동력을 얻을 수 있어요. 너무 재미있어서 끝까지 읽을 수밖에 없는 책을 소개하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재미에 비해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지 못해 아쉽다고 생각되는 책을 골랐습니다. 이 두 가지 조건을 충족시켜줄 만한 책을 찾는 건 쉽지 않았습니다. 제가 재미를 느끼며 읽었던 책들은 이미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고 있는 책이었기 때문이죠. 고민을 이어가던 여름날, 종종 들르는 동네 서점 사장님의 추천으로 정미진 작가의 <>(엣눈북스, 2015)를 읽게 되었습니다. 처음 책 소개를 간단히 읽곤 '그냥 평범한 추리소설 아닌가?'하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습니다. 하지만 챕터가 하나씩 넘어갈수록 머릿속영사기를 끌 수 없었습니다. 아마 영사기를 끌 수 없었던 이유 중에는 이 책이 포토 소설이라는 흥미로운 양식을 가지고 있다는 점도 한몫할 겁니다. 머릿속에 그려지는 이야기의 장면을 확인시켜주려는 것처럼 사이사이 들어있는 사진들은 이야기와 하나가 되어 책을 다 읽은 후 영화를 한 편 본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마지막까지 숨죽여 읽다가 마침내 책을 덮었을 때, 책의 제목을 다시 한번 보곤 말로 다 할 수 없는 전율을 느꼈습니다. 이 책의 장르를 평범한 추리소설로 못 박아버리려 했던 스스로가 머쓱해질 정도로 소설의 전개, 결말 모두 소름 돋게 재미있고 특별했습니다. 영화관에서영화를 막 보고 나온 것 같은 흥분을 책으로도 느낄 수 있다니 적잖은 충격을 안겨준 책이었습니다. 책이 지루하게 느껴진다거나 혹은 독서가 마음대로 되지 않을 때 읽어본다면 전에 없던 새로운 흥분을 느끼실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하나만 추천하기에는 도무지 아쉬워서 한 권 더 추천해야겠습니다. 빗방울처럼 나는 혼자였다(해냄, 2016)는 공지영 소설가의 산문집입니다. 이미 충분히 많이 읽힌 책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이 산문집을 읽으며 '읽는 것'에 대해 깊은 흥분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글을 읽을수록 느끼게 되겠지만 읽는다는 건 아주 벅찬 행위예요. 그 벅참은 공감이라는 단어로 가장적절하게 설명할 수 있겠으나 공감보다 더 극적인 단어가 있다면 그 단어를 골랐을 겁니다. 특히 이 책은 모든 문장에 줄을 그어가며 읽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연필을 놓지 못하고 읽었어요. '나만 이런 감정을 느끼는 게 아니구나. 나만 그런 상황에 놓인 게 아니었어. 너도 그랬던 거지?' 하는 안도와 놀람의 반복이었습니다.

 

책은 내가 혼자가 아닐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게 해줍니다. 어디서나 활발하고 천진난만해 보이는 사람에게도 조용해지는 시간이 있어요. 우울하고 차분해지는 그런 시간 말입니다. 그 시간을 겪다 보면 외롭고 쓸쓸해 혼자가 된 것 같다는 느낌을 받기도 합니다. 혼자 놓여진 것 같은 시간을 견뎌내게 하고 스스로를 알아가는 방법을 가르쳐주는 매개가 책이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사람을 만나 털어놓고 웃으며 이야기하는 시간이 필요하듯이 책을 읽으며 감정을 알아내고 조용히 줄을 긋는 시간을 배우는 것 또한 필요할 겁니다.

 

글을 재료로 만들어진 책이라는 예술이 당신이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다정하게 읽어줄 거예요.

나의 독서 연대기와 아끼는 전차 한 권

 

유지혜

쓰는 사람, 여행하는 사람 산문집 <조용한 흥분>, <나와의 연락>, <쉬운 천국> 등을 냈다.

 

책을 읽을 때 우리는 혼자다. 독서는 시간의 다른 가능성을 희생한 채 전적으로 혼자여야만 시작되는 경험이다. 읽는 동안에는 딴짓을 할 수 없다. 그 기쁨이 다른 이에게 공유될 수도 없다. 무조건 멈춰 서서 고독해야 하는 것이다. 책을 고르는 일은 고독을 선택하는 일이기에 지극히 개인적이다. 그것은 한동안 내 머리 위를 덮을 하늘과 기댈 감정, 삶의 분위기를 정하는 일이다. 내가 속할 새로운 세계를 결정하는 동안 우리는 우리에게 익숙한 시간을 잃고 원래의 ''와 기꺼이 멀어진다. 그 세계에서는 울거나 고백하는 일도 유치하지 않다. 모든 게 용서받는 체험의 세계. 다른 사람이 되어볼 기회가 널려 있는 그러다 종종 어떤 책들은 나의 현실이 되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나는 책 추천을 좋아하는 편이 아니다. 책만큼은 스스로 선택하고 싶다. 책은, 온갖 리뷰와 하이라이트만 모아둔 요약본들을 외면하며 유일하게 남겨놓는 실패의 영역이다. 마음에 쏙 드는 작품을 발견할 때도 있지만 반대로 실망할 기회도 얻는다. 타인의 간섭이 없는 나만의 선택은 그 모든 시행착오를 애착으로 바꾸는 힘이 있다.

 

어릴 적부터 부모님은 내가 읽을 책을 직접 고르게 했다. 인터넷 서점, 핸드폰 검색, 추천 알고리즘이 없던 시절 어린 내게 책이란 서점에서 심사숙고한 끝에 품에 안고 돌아오는 독립된 취향이었다. 유년 시절은 많은 이들이 그렇듯 나의 독서 전성기였다. 나는 머리말에 책을 쌓아두고 읽다가 안경을 쓴 채로 잠드는 어린이였다. 밥 먹으라는 엄마의 말에 아쉬움을 삼키고 식탁으로 불려 나가던 <빨간 머리 앤>, <제인 에어>는 모서리가 닳도록 반복해 읽어도 싫증이 나지 않았다. 상상 속에서 방문한 최초의 여행에 마음을 빼앗겼다. 억지로 책을 읽은 적이 없었다. 아이는 시시한 것 따위 절대 견딜 수 없다. 런던 게 아니라 그저 사랑한 거다. 불안을 이기려 뽐내려 삶을 더잘 살아보려 하는 욕망 때문이 아니라 단지 재밌어서 읽었다. 디즈니 만화영하는 매주 일요일 아침마다. 여름방학은 1년에 고작 한 번뿐이었지만 책은매일 읽을 수 있었다. 나는 책벌레였다. 극장에서 <해리 포터>를 보고 나오는 길목에서 이렇게 속삭이는 어린이를 상상해보시라. '영화 재밌었는데, 책보다는 별로였어.....‘

 

중학교 때까지는 나름 책에 열심이었지만 금방 시들해졌다. 그보다 더 재밌는 게 많이 발견되었던 탓이었다. 그러다 재수 시절 다시 독서와 재회했다. 그도 그럴 것이 공부 이외의 것은 전부 짜릿했기 때문이다. 독서는 엄마에게 들켜도 꾸중을 듣기에는 왠지 어색한 가장 설득력 있는 반항이었다. 스물한 살, 하루키 소설의 대부분을 섭렵하고 대학에 들어갔다. 캠퍼스에서가장 그럴싸한 장소는 도서관이었다. 몰두한 사람들로 가득 찬 곳. 독서 카드로 고독을 대여한 사람들, 기울어진 그들의 옆모습에서 빛이 났다. 나는 창가 히터 옆 등받이가 없는 긴 소파에 누워 책을 읽다 졸곤 했다. 나를 깨우거나 나무라는 사람은 없었다. 착하고 느슨하고 무해한, 약간의 지적 허영심까지 가미된 그 세계에 속하고 싶다는 막연한 욕심이 났다.

 

빌렸던 책을 반납하고 휴학을 했다. 그 이후 10년 내내 여행을 다녔다. 출국은 독서의 비수기를 의미했다. 여행할 때는 여행만 했다. 다른 세계 안에서 또 다른 세계에 몰두하는 일은 오히려 산만한 게 아니냐며 핑계를 댔다. 그러나 유럽에 머물 때보다 더 책을 갈구했던 적은 없었다. 책을 읽고 있는 사람의 모습은 가장 건강한 방식으로 독서를 부추긴다. 그들은 그 행위에 능숙했다. 책을 많이 읽는다는 점에서 그들은 언제까지나 소년처럼 보였다. 강가의 가로수와 역사적인 건물들을 제치고 카페만큼 준비한 서점들과 지갑처럼 책을 휴대한 사람들이 그 도시의 주연이었다. 희한한 패배감이 일었다. 나만 안 읽고 있다는 나는 골목마다 겹치는 광경을 질투하고 있었다. 그 후로 여행 중 몇 권의 책을 집으로 주문해두는 습관이 생겼다. 책에 대한 그리움과 왠지 모를 조급함 때문이었다. 귀국하면 먹어치우듯 읽는 것으로 갈증을 풀었다. 스치듯 무심하게 모국어 읽기, 돌아온 독서 성수기의 시작이었다.

 

끝없는 비수기와 성수기를 오가며 많은 책을 만났다. 우연에만 의지하는 패기에도 좋은 책들은 쏟아졌다. 운명적으로 다가온 책들과의 첫 만남은 그 자체로 생생한 무용담이었다. 알고만 있던 작가가 최애가 되는 일도 종종 생겼다. 존 버거를 좋아하게 된 일이 그랬다. 4년 전의 어느 날 읽고 있던 집지에서 그의 부고 소식을 접했다. 이름이 낯익었다. 순간 몇 년 전 그의 대표작인 다른 방식으로 보기(최민 옮김, 열화당, 2012)를 읽다 포기했던 기억이 스쳤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그가 미술비평가일 뿐 아니라 세계적으로 존경받는 소설가 겸 수필가라는 사실을 몰랐다. 기사를 덮고 곧장 서점에 가서 그가 쓴 얇은 책 한권을 샀다.

 

그때 읽었던 책은 <존 버거의 글로 쓴 사진>(김우룡 옮김, 열화당, 2005) 이다. 이 책은 제목 그대로 사진으로 순간을 포착하듯 저자 주변의 인물들을 관찰하고 기록한 스물아홉 편의 글을 담고 있다. 오직 글로만 찍은 사진들 담백했다. 그가 말하는 쪽이 아니라 듣는 쪽을 선택해서 그럴 것이다. 그의 글은 흐느끼는 이의 어깨 위에 말없이 얹어진 손이었다. 그 위로는 태양이라기보다 달빛에 가깝다. 벌거벗은 대낮의 파격이 아닌 친절한 침묵. 소박한 사람들에게 만들어진 이전에 없던 작은 무대. 적당히 어둡고 사적인 채로 남아 있는 구석구석 차별 없이 닿은 빛 안에 거주하는 이야기들. 은은하게 밝혀진 타인의 이야기 뒤로 나는 숨었다. 남을 주목했다. 그러고는 나를 잊었다. 자아의 응어리가 풀리고 그것만으로도 무언가가 해결되었다. 이야기는 제자리에 치장도 기척도 없이 그대로 있었다. 하릴없는 일상을 특별한 것으로 뒤바꾸려는 시도를 하지 않는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응시하는 그의 시선이 그 이야기를 전한다. 정직한 애정으로, 나는 사람과 사랑을 연관 짓고 싶을 때 이 책을 꺼내 든다. 팍팍한 삶이 지속될 때 미움을 덜어내려 펼쳐본다. 그 안에는 항상 해답이 있었다. 다양한 사람들과 저자 사이에 오가는 대화들은 내가 제일 좋아하는 부분이다. 그중에서도 열일곱 번째 이야기에서 나온 사제의 말에서 나는 항상 멈추게 된다. 그 말은 이 책과 그 밖의 모든 책들에 담긴 뜻을 한마디로 정리해주는 듯했다.

 

> 우리 인생에서는 어떤 것도 헛되지 않습니다.

 

그런 글들을 만나려고 책을 읽는다. 뒷모습에, 사소함에 빛을 비추는 희귀한 장면을 포착하려 서점을 헤맨다. 맵고 짠 세상에서 잠시 벗어나려는 저항이다. 그 싸움은 온전히 나의 것이며 허구의 세계에서 진실의 세계까지 나의 것이라고 할 만한 모든 인생을 지켜낸다. 때로는 아직 가보지 않은 미래까지. 그 모든 것을 두세 시간만에 얻을 수 있으니 황홀한 가성비다.

이러한 나의 생각에 동의하듯 에밀리 디킨슨은 책을 이런 말로 대변했다.

 

> 인간의 영혼을 실을 전차인데 이다지도 검소하다니.

 

커피 두 잔 값으로 마련한 전차에 몸을 싣고 나는 아득히 먼 곳으로 입장한다. 이동하는 내내 스친 경치와 살갗에 닿은 바람과 번쩍이는 침묵으로 나는 전혀 다른 영혼이 되어도 본다. 삶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장담도 해보고, 배신도 당해본다. 자주 탑승할수록 더 나은 사람이 된다는 구닥다리 미신을 믿으며, 자꾸 까먹는 꿈과 가치를 말해줄, 세상에 헛된 것은 없다는 착각 속에 빠뜨릴 그 전차가 나는 영원히 필요하다.

 

 

김혜경

 

회사 다니고 팟캐스트 하고 글 써서 번 돈으로 술 마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