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석탄 이라는 말이 너무 무섭다고 말하는 노동자를 만난 적이 있다. 석탄발전소 노동자이고, 오랜 노동조합원인 그는, 기후위기의 심각성에 대해 잘 알고 있고 에너지 전환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어느 날 발전소 앞에서 환경운동 하는 동지들이 '석탄발전 중단하라'는 플래카드를 들고 와서 시위를 하던 날, 이상하게 무서웠다고 했다. 그날 집회에서는 탈석탄 이후 이야기는 나오지 않았다. 발전소 노동자들에 대한 대책을 요구하는 연사도 없었다. 연대발언을 하는데, 노동자는 어쩌란 말이냐

 

하는 말을 하지 못했다. 노동자들과 지역 주민들의 불안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고 탈탄소만 말하고 끝내는 것은 어쩐지 억울하고 부당하게 느껴졌지만, 그런 말을 하면 노동자들이 자기 밥그릇만 생각하고 에너지 전환에 반대하는 것처럼 보일까봐 두려웠다. ‘노동조합 짬밥 먹은 지 수십 년간 회사하고도 정권하고도 어지간히 붙어서 싸워봤지만, 이 싸움은 이상하다고 했다. 우리를 파괴하러 온 적들이 아닌데 우리 편은 아닌 것 같은 사람들과 안 나오는 구호를 외치려니, 구호가목에 턱턱 걸렸다. “석탄발전소 즉각 폐쇄하라!”고 외칠 때, 발전소 안에 있는 노동자들이 떠올랐다. 술잔을 기울이며 여기 문 닫으면 어떡할 거냐 서로 묻던 동료들이다. 공장으로돌아오니 어쩐지 배신자가 된 것 같았다. 노동조합 간부라는 나도 이렇게동요하는데, 저 사람들은 집회를 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게 참 이상하게 무섭더라고요." 그가 말했다.

 

그 토론회는 공공운수노조에서 개최한 토론회 자리였고, 나는 '체제전환과 기후정의'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역사적이고 정치적인 분석 잘 들었고, 노동자 편에서 말해줘서 고마웠습니다. 요즘은 '정의로운 전환'을 많이 이야기하니까, 어딜 가도 '일자리 대책 수립하라'는 말은 다 하더라고요. 그런데 다들 본인이 뭘 하겠다고는 않고 다 남한테 미뤄요. '해야 한다', '필요하다' 그런 말만 하고요. 정부더러 하라고 하는데, 정부도 대책 수립한다 말뿐이고, 구체적인 건 아직 하나도 결정된 게 없어요. 우리는 내일모레 사라질 건데..." 마지막 말을 나는 내내 곱씹었다. 에너지 전환 과정에서 기업의 피해 액수나 산업 전환, 기술 개발 등에 필요한 지원금은 세밀하고 촘촘하게 계산되어 정책에 반영되고 있다. 전문가들은 탄소국경세나 국제 기후협약 등을 통해 기업이 안게 될 부담을 이야기하고, 정부차원의 지원과 대책을 촉구한다. 그런데 노동자들은? 그날 이후 나는 한가지 결심을 했다. 앞으로 탈석탄이나 에너지 전환을 이야기할 때는 거기 있는사람들 이야기를 반드시 함께 하겠다고. 사람뿐만 아니다. 그곳을 삶터로 살고 있는 존재들에 대해 반드시 함께 이야기해야 한다.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에 대해서 말이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산업 전환이나 '에너지 전환'이라는 것이, 공장 바꾸고, 연료 바꾸는 것으로 끝나는 일이 아니다. 지금 대개 '산업 전환'이라고 하는 것은 20년 전만 해도 '산업 구조조정'이나 '경제 구조조정'이라고 불렀다. 요즘은 구조조정 대신 전환이란 말을 쓰는데, 이것은 현재 일어나는 일들이 정부와 기업이 의지와 목적을 가지고 추진하는 일이 아니라 마치 자연스러운 이행과정인 것처럼 착각하게 만든다. '지역 소멸'이란 말도 그렇다. '전환한다. 이행한다. 소멸한다'는 동사는 마치 바위가 바람에 풍화되어 자갈이 되고 모래가 되는 것처럼, 우리의 일터와 삶터가 자연히 사라져 가는 것인양 착시를 일으킨다. 하지만 '산업 전환'이 일어날 때 구체적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1970년대는 서구 자본주의의 탈산업화 시기로.같은 표현은 고도로 압축된 추상적인 문장이다. '탈산업화는 어떻게 이뤄졌을까. 영국의 '탈석탄' 과정을 들여다보자.

 

1980년대 영국에서는 대처 정부가 석탄노조와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비유가 아니다. 말 그대로 노동자에 대한 전쟁이었다. 그중에 오그리브 전투가 있다. 1984, 광산업 구조조정에 맞서 약 5천 명의 광부들이 사우스요크셔 지역의 오그리브로 집결했다. 오그리브는 브리티시 철강회사의 코크스 공장으로 가는 석탄 운송로의 길목에 있었다. 석탄 노동자들의 투쟁은 광산 파업과 함께 운송로를 차단하는 전통적인 방식으로 진행됐다. 기마병을 포함한 6천 명의 경찰병력이 왔다. 경찰은 종전의 방어적 태도를 바꿔 완전히 끝장내 버리겠다는 태도로 시위를 진압했다. 이날의 전투는 훗날 영국 역사상 가장 폭력적인 시위 진압으로 기록된다. 노조파괴는 치밀한 계획 하에 이루어졌다. 나중에 리들리 플랜으로 알려진 파괴공작은 파업의 시작과 함께 세력 크기순으로 노동조합의 명단을 작성하고, 가장 전투적인 노동조합부터 하나씩 공격해 나가는 계획을 세웠다. 시위 이후에도 참가자들을 일일이 색출하여, 파업에 참가한 이들을 추적해서 실업수당까지 받지 못하게 만들었다. 조직적이고 계획적인 노조 분쇄작전이었다. 영국의 경제학자이자 저널리스트인 그레이스 블레이클리는 "10년 동안 대처 정부는 영국의 거의 모든 탄광을 폐쇄했고 광부들을 거의 궤멸시켰다"고 말한다. 당시 광부들은 해외의 값싼 노동력과 경쟁해야 했을 뿐만 아니라 신재생 에너지원에도 맞서 싸워야 했는데, "더럽고, 위험하고, 환경을 오염시키는 탄광을 폐쇄하는 것이 영국이 전통적인 제조업 경제에서 서비스 산업 경제로 이행하기 위한 현대화로 묘사되었다." 하지만 대처 정부 하에서 벌어진 광부들과의 전쟁은 단지 산업 전환을 위해서만은 아니었다. 탄광노조는 영국에서 가장 강력하고 잘 조직된 노동조합이있다. 제일 먼저 이곳을 박살내야만 대처는 이후 신자유주의 정책을 추진할 수 있었다. 블레이클리는 단언한다. "영국의 노동운동 세력이 계속 남아서 저항하는 한, 대처 총리는 신자유주의를 결코 제도화할 수 없었을 것이다."1)

 

다른 곳은 어땠을까? 영국의 폭력적 산업 구조조정과 비교하여, 독일은 '질서 있는 구조조정'의 사례로 곧잘 인용된다. 1987년 독일 보훔에선 철강노동자들이 대규모 집회를 열고 있었다. 보훔 금속노조 제1 대표 루드거 힌제가 마이크를 잡고 말한다.

 

수년 전부터 보훔 철강 산업에서 수많은 일자리가 사라졌다..17,581개의 일자리가 사라진 것이다. 앞으로도 1,363개의 일자리와 견습공 자리가 보훔에서 사라지게 된다. 보훔 철강산업에 있는 철강 콘체른의 계획에 따라 일자리가 사라질 우리 노동자, 사무직 노동자, 직업교육생들! 이에 따라 광산, 상업, 가공, 배달산업에서 고용된 일자리 또한 위협받고 있는 우리들 보훔에서 매상의 격감으로 경제적 실존이 걱정되는 상공업자와 개별상인들, 우리 보홀의 시민들은 고향의 궁핍화를 우려할 수밖에 없다.우리는 다음과 같이 요구한다. 실업 대신 일자리를 고용계획과 대체 일자리를 실업을 지원할 것이 아니라 노동을 지원해야 한다!"2)

 

루르 지역의 철강 산업은 1970년대 중반 위기가 시작되어 1983~1987년 정점에 도달했다. 독일 산업경제에서 핵심지역이었던 루르 지역은 1980년대에 실업률이 15~17퍼센트에 이르는 지경이 된다. 노동력이 모자라 외국에서 광부를 수입해야 할 정도로 석탄을 캐내던 곳이었지만, 싼값의 외국 석탄이 들어오자 루르 석탄은 경쟁력을 상실했다. 1960년에 40만명이던 탄광노동자는 1980년에는 단지 142천 명으로 줄어든다. 영국과 같은 폭력은 없었다. 노동자들에 대한 구제 계획도 장기적으로 잘 준비되었다. "하지만 매일 목숨을 걸고 일해야 했던, 그 특별한 노동의 종사자들은 모두 어디로 사라졌는가?" 헬가 그레빙의 <독일노동운동사>전환 이후노동자들의 모습을 이렇게 그리고 있다.

 

"그들은 근처 공업도시의 광산을 찾거나, 수십 년간의 육체적 부담으로인해 조기정년에 들어가거나, 광부자조조합(Knappschaft)으로부터 특별연금을 받았다. 그들은 광산 숙소 뒤에 있는 작은 정원에서 진폐증이 그들의 삶의 끝을 장식할 때까지 햇볕을 쬐며 낡고 삐걱거리는 의자에 앉아 있었다. 새롭게 세워진 오펠 (Opel) 자동차 공장에 일자리를 구하러 가는광산 인부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3)

 

폭력적 구조조정과 질서 있는 구조조정은 외형적으로는 달랐지만, 노동자들을 무력하고 비참하게 만들었다는 점에서는 유사한 정치적 결과를 만들어냈다.

 

기업과 공장이 사라진 곳에선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애초에 루르 지역에서 탈산업화의 목표는 국제적으로 경쟁력 있는 기술입지 지역으로 만드는 것이었지만 그 목표는 제대로 달성되지 않았다. 루르 지역의 사회구조는 다른 탈산업화된 지역의 다변화된 주민구성 및 인구구성과 비슷해졌다. ‘다변화되었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기업이 철수하고 공장이 폐쇄된 곳은 대체로 비슷한 경로를 따라간다. 유령도시가 되거나 아니면 관광지로 개발되거나, 사북은 유령화됐고, 태백은 관광도시가 됐다. 원주민들은 고향을 떠나고, 외지인들이 유입되면서 결속력 있던 공동체는 해체되고, 모래알처럼 따로 노는 서로 아무 상관없는사람들이 본척만척 각자 살아가는 것이 '다변화'에 담겨 있는 숨은 의미다. 원주민과 이주민 사이, 지역민과 방문자 사이에는 간극이 점점 커지고, 개발지구와 낙후 지역 사이에는 알 수 없는 선이 그어진다. 공동의 기억과 역사적 장소는 노인들과 함께 사라져 간디 지역은 활력과 생기를 잃고, 무기력과 패배감이 도시의 공기를 채운다. 독일의 철강 산업 단지의 몇몇 도시들은 '라인 강의 기적'을 전시하는 체험 관광지로 변신했다. 하지만 더 이상 과거처럼 힘 있는 노조나 의미 있는 민중조직과 자치단체들, 자긍심을 가진 주민들은 없다.

 

영화 <노매드랜드>는 공장이 폐쇄된 이후의 도시를 좀 더 깊숙하게 보여준다. 영화는 한때 미국경제를 돌리며 흥청망청한 성장기를 누렸던 중부산업지대인 러스트 벨트 중 한 곳을 배경으로 한다. 쉴 새 없이 연기를 내뿜었을 철강공업지대의 굴뚝은 차게 식었고, 더 이상 가동되지 않는 거대한 공장이 전쟁의 잔해물처럼 흉물스럽게 남아 녹슬고 있다. 사람들이 떠난 마을에는 돌보지 않는 빈집들만 남아 낡고 부서져 간다. 하지만 공장이 철수한다고 모든 것이 갑자기 증발하진 않는다. 어디로도 떠나지 못하고 여전히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고, 갈 곳이 없어 떠돌다가 폐허로 돌아오는 사람들이 있다.

 

폐허는 도처에서 생겨나지만, 소멸은 말처럼 그렇게 쉽게 되는 게 아니다. “산업과 일자리는 들고 나길 반복한다. 도시를 쓰다듬고 할퀴고 지나간다. 들고 나는 산업과 일자리에 따라 모습은 바뀐대도, 아무튼 도시는 그 자리에 머물 수밖에 없다.”4) 한국지엠 군산 공장과 현대중공업 군산 조선소가 있었던 군산 지역을 취재한 기자는, "산업구조 변화에 지역은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로 시작한 질문을 취재를 마칠 즈음 이렇게 바꾼다. "지역에게 일자리는 무엇인가? 사람에게 일자리는 무엇인가?" 정부와 지자체는 일자리를 만들어 줄 기업을 유치하기 위해 '기업하기 좋은 도시'가 되려고 물심양면 노력한다. 기업들은 우세한 위치에서 요구 조건을 내건다. 교통이나 전력 같은 기본 인프라는 물론이고 노동자들이 머물 주거 공간, 상업과 금융시설, 교육 기관에 이르기까지, 각종 기반혜택을 요구한다. 군산에 현대중공업이 '구세주'처럼 들어올 때, 200억 원의 보조금을 도와 시가 분담해서 도로와 주차장을 새로 지었다. 조선업 인력 양성을 위해 군산대학교에는 '조선공학과'가 신설됐다. 조선소가 떠나고 나니, 모든 것이 쓰레기가 됐다. 사람들로 북적이던 거리는 텅 비어 버렸다.

 

나는 그런 거리를 본 적이 있다. 고향 통영은 관광지로 유명하지만 주민들의 생업은 어업과 조선업으로 먹고살아온 곳이다. 관광객들이 음악당과 요트 선착장이 있는 리조트 단지로 가는 길에는 옆으로 문 닫은 조선소들이 즐비하다. 주말이나 연휴에는 케이블카를 타러 가는 승용차로 붐비지만, 바로 옆으로 빠져 한 블록만 들어가면 <노매드랜드>에 나오는 유령도시가 나타난다. 철문은 밖에서 잠겨 있고, 인적은 찾아볼 수 없다. 봄이면 활짝 핀 벚꽃길이 도시의 명물이 되지만, 벚꽃을 배경으로 웃으며 사진 찍는 관광객들은 벚꽃나무 뒤로 높다랗게 보이는 크레인이 '버려진 좌초자산'이라는 것은 알지 못한다. 조선소가 줄줄이 폐업할 때, 시내에는 낮에도 조선소 작업복 입은 노동자들이 북적거렸다. 어머니는 작업복 입은 사내들이 낮부터 무리지어 쏘다니는 게 무섭더라고 했다. "왜요? 노조 하는 사람들일까 봐요?", "아니, 한참 일할 시간인데 그리고 있으니. 게다가 다들 눈이 시뻘게서 엄청 화가 나 있었거든." 화라도 낼 수 있을 때가 좋았다. 화난 눈동자는 곧 멍한 눈동자로 변했다.

 

불황과 실업이 장기화되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한 지역에서 대규모 실업이 장기화될 때는 무슨 일이 일어날까? <실업자 도시 마리엔탈>'사라진 일자리와 파괴된 공동체에 관한 사회지학'의 살아 있는 보고서다. 처음 사람들을 덮치는 건 무력감이다. 일자리를 잃으면서 노동자들은 외부 세계와의 접촉이 끊어지고 시간을 활용해야 하는 물질적 정신적 유인을 상실한다. 질서 잡힌 생활은 서서히 와해되고, 규율도, 약속도, 처리해야 할 일도 없는 날들이 지속되면, 늘어난 여가는 '비극의 선물'이 된다. 연구자들은 마리엔탈에서 남자들의 보행속도가 매우 느리다는 것을 발견한다. 목적지까지 금방 갈 수 있는 거리도 한참 동안 이동한다. 잘 아는 길에서도 이곳저곳을 서성인다. 여자들은 반대다. 실업이 장기화되면 여자들은 점점 시간에 쫓긴다. 돌봄 노동시간이 늘어나기 때문이다. 남자들이 5분이면 할 수 있는 일을 한 시간 내내 붙잡고, 이동시간이라도 늘이며 아무것도 하지 않는 무력한 시간을 줄이려고 할 때, 여자들은 실업 전이라면 하지 않았을 옷 수선, 가구 고치기, 중고나 구호 물품 구하기 등, 가정 살림의 수많은 빈틈을 메우기 위해 총총걸음을 걸어야 한다. 남자들의 시간과 여자들의 시간은 다른 방식으로 증발한다. 자존심을 지킬 수 있는 시간의 한계를 넘고 나면 본격적으로 자존심을 버리는 시간이 찾아온다.

 

일자리가 생기자마자 사람이 충원된다. 터무니없이 임금이 낮은데도 마리엔탈 노동자들은 종종 몇 시간이고 걸어서 지역에 있는 공장으로 일하러 가고, 먹거리를 받는 대가로 지역 농가에서 닥치는 대로 일을 한다. ... 추가 소득을 올릴 수 있는 기회가 생기기만 하면 아무리 보잘것없는 일이라도 사람들은 우르르 달려든다.”5)

 

상황이 좋아지지 않는다면 그 다음은 어떻게 될까? 지옥 아래 지옥은 계속 나타난다. 마리엔탈에서는 개와 고양이가 사라져도 주인이 찾지 않는다. 틀림없이 누가 잡아먹었을 거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밭에서 감자를 홈치거나 철도에 쌓인 석탄을 슬쩍 하는 정도는 다들 눈감아준다. 멕시코의 국경도시 티후아나에서 개와 고양이는 '사람'으로 바뀌고 감자와 석탄은 마약으로 바뀐다. 누군가 사라지면 사람들은 살해됐을 거라고 생각하고, 마약 운반이나 시체 처리 같은 일도 '직업'이 된다. '아무리 보잘것없는 일이라도 일자리만 생기면 우르르 달려들었던 마리엔탈 사람들은, 티후아나에선 '아무리 끔찍한 일이라도 돈만 주면 줄을 서는 사람들이 된다. 이것은 인간 본성의 문제가 아니다. 사야크 발렌시아는 이런 자본주의를 고어(gore) 자본주의라고 명명한다.

 

마리엔탈의 20세기적 실업과 티후아나의 21세기적 실업은 전혀 다른 이유와 방식으로 발생한다. 자본이 노동력을 착취해서 이윤을 남기는 것이야 자본주의 경제의 일반 법칙이다. 하지만 20세기 초반까지의 산업자본주의는 착취를 위해서라도 노동자를 고용해야 했고, 살려놔야 했다. 자본주의 체제의 유지를 위해서라도 정부는 적극적으로 실업을 줄이고, 대책을 수립하려 노력한다. 21세기의 자본주의는 다르다. 이제 실업은 불가피하게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창출된다. 금융화 이후에 기업은 생산물을 판매해서 돈을 버는 것보다 돈을 굴려 돈을 버는 것이 훨씬 쉬워졌다. 기업경영은 자기 기업과 공장에 대한 애착을 가진 이전 세대의 가부장제적 사장들에서 전혀 다른 식으로 사고하는 아들들에게로 넘어갔다. 선진 경영기법을 배운 세대는 기업을 키워서 쪼개고 팔아서 이득을 남기는 '기업 장사꾼' 같은 사장들로 물갈이 됐다.

 

자본이 국민경제 안에 갇혀 있을 때는 높은 실업률이 기업에도 유리하지 않다. 시장의 수요를 창출할 노동자들의 구매력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21세기의 자본은 국가적 영토에서 해방되어, 가장 저렴한 지역과 가장 저렴한 자원을 가장 저렴한 노동력과 마음대로 결합시킬 수 있는 무한한 자유를 얻었다. 오늘날 글로벌 자본은 레고 조각처럼 지역, 노동, 자원을 그때 그때 끼워 맞추고, 부수고, 재조립한다. 이런 것을 적시 생산체제'지구적 가치사슬'이라고 부른다. 실상은 먹을 만큼 먹어치운 다음 버리고 떠나기, 이것이 21세기 약탈자본주의의 핵심 기술인 창조적 파괴의 본질이다. 물건이 고장이 나도 고치거나 되살리지 않고 쉽게 버리고 새로 사는 건 그쪽이 더 싸고 편하기 때문이다. 금융자본은 기업도 그렇게 쓰고 버린다. 폐업하는 게 싸면 청산해서 폐업해 버리고, 투자 목표를 달성하면 깔끔하게 손을 턴 후에 다시 새로운 기업 사냥을 시작한다. '먹튀'는 악덕 자본의 일탈 행위가 아니라 모든 금융자본의 속성이자 행동 원리다. 동네 하나를 흔적도 없이 밀어버리고 도시개발을 하는 것도 똑같은 원리다. 도시 재생과 산업 전환의 논리와 방식은 사실상 동일하다. 원래 있던 장소를 절멸시킨 후에, 완전히 다른 성격의 공간으로 재창조한다. 산업단지 개발도, 좌초 자산을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이 아니라 철수하고, 다른 지역을 찾아내서 원주민들을 밀어버린 후에 산단을 새로 조성하는 방식이다. 그게 비용이 적게 들기 때문이기도 하고, 그렇게 하면골치 아픈 주민 분쟁도 없고 책임져야 할 노동자도 수월하게 해결되기 때문이다. 먹을 만큼 먹어치운 다음 버리고 떠나는 수법을, 오늘날에는 거의대부분의 기업들이 어떤 도덕적 법적 제약도 없이 모방한다. 사회도 그것을 혁신가적 '기업가 정신'이라고 부르며 추앙한다. 그리고 기업이 쓰고 버리는, 창조적으로 파괴해 버리는 집단 폐기물의 목록에는 '생산기지'라고불리는 한 마을이 한 지역이 통째로 들어 있기도 한 것이다. 그러니까 소멸한다는 말은 틀렸다. 소멸당하는 것이다.

 

노동조합이 사라지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더 중요한 것은 정치적 결과다. 영국과 독일에서 그렇게도 막강했던 광산노조와 에너지노조가 와해된 것은 이후 진행된 신자유주의와 민영화에 제동장치가 없어진 결과를 낳았다. 강력한 노조를 잃어버린 노동자와 주민들은 협상력을 상실한다. 이런 지역 단위의 구조적 변화는 독일의 정치지형 전체에도 영향을 미쳤다. 루르 지역은 사회민주당의 철옹성과 같은 지역이었지만, 사민당의 지지기반이 되었던 노동조합이 사라짐으로써, 노동운동과 진보정당 간의 조직적 연합을 통한 사민주의적 정치 모델도 함께 사라졌다.

 

게다가 노조 파괴를 전문으로 하는 기업도 등장했다. 리들리 플랜은 정부에서 만들어졌지만 오늘날 노조 파괴 플랜은 민간 전문업체의 손을 빌린다. 공권력이 독점하던 폭력도 다양한 폭력 용역업체로 이전됐다. '업자들은 역사적 경험에서 얻은 지식으로, 공장을 닫으면 해고나 노조 문제도 함께 처리할 수 있다는 걸 기업 경영진에게 컨설팅 해줬다. 태안 석탄화력발전소에서 산재로 사망한 김용균은 '공공부문 정규직화' 피켓을 들고 대통령 면담을 요구하던 비정규직 노동자 노동조합원이었다. 공장이 폐쇄되면 노동의 장소만이 아니라 투쟁의 장소도 사라진다. 단협의 대상도 사라지고, 노동자도, 노동조합도 다 함께 사라진다. 이것은 노동조합을 통해 표출될 수 있었던 지역 문제나 주민들의 불만도 자신들의 대변자를 잃게 된다는 것을 의미이기도 하다.

 

노동자들을 재교육과 재취업을 통해 이동시켜 새 일자리와 매칭하면 된다고 말하는 전문가들도 있다. 하지만 일을 찾는 노동자 수만큼 일자리가 생긴다고 해서 테트리스 게임처럼 빈자리에 노동자들이 쏙 들어가 실업이 뽕 사라지는 건 아니다. 다른 지역으로의 이주는 쉽지 않다. 노동자들이 '피해를 입지 않도록' 구제 관점에서 접근하는 것도 문제다. 스스로 문제를 제기하고 해결을 촉구하는 당사자가 되는 것과 시혜와 구호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전혀 다른 것이다. 단결한 노동자는 집단적 요구를 할 수 있지만, 흩어져 파편화된 노동자는 당장 '닥치는 대로 아무 일이라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에 놓인다. 그렇게 되면, 노동자들은 협상력을 잃고 자본은 맘대로 노동자들을 경쟁시키고 통제할 수 있게 된다.

 

그런데 지금까지 우리가 산업 구조조정또는 '산업 전환'이라고 불렀던 것을 다른 용어로 바꿔서 불러보자. '탈탄소', '탈석탄', '탄소중립', '에너지전환', '녹색 전환' 등으로 말이다. 난감한 일이 벌어진다. 대처 정부의 리들리 플랜에 분노하고, 보훔에서, 마리엔탈, 티후아나르를 거쳐, 군산, 통영, 태안까지 오는 동안 함께 '돈보다 생명'으로 굳게 단결했던 우리는 갑자기 이상한 상황에 직면한다. 폭력적 구조조정 반대를 외치기는 어렵지 않지만, 폭력적이라고 해도 탈석탄 반대를 외치기는 쉽지 않으니 말이다. 게다가 현재 상황은 폭력적이거나 강제적으로 보이지도 않는다. 지금 일어나는 일은 기후위기 때문에어쩔 수 없이 일어나는 일이 아닌가. 지금 이곳에는 오그리브 전투도 없고, 대규모 집회도 파업도 없다. 대신 '팬데믹'이 집회를 막아주고, '기후위기'가 녹색(산업) 전환의 명분을 만들어준다. 전문가들의 공론장에는 먼 곳의 기후위기와 불쌍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차가운 데이터와 함께 자료로 제시되지만, 정작 이곳에 사는 사람들의 불안한 목소리, 겁먹은 눈동자는 보이지 않는다. 기후위기 속에서 기업의 리스크를 걱정하고 대책을 내놓는 연구는 쏟아지는데, 가장 시급하게 준비해야 할 노동자, 농민, 최전선 공동체의 안전은 나중에 또 나중에로 미뤄진다. 그동안 많은 과학자 전문가들은 지구온난화가 자연적 현상일 뿐이라고 말하며 기후위기의 자체를 부정하는 기후부정론자들을 논박해 왔다. 이것은 인간이 자초한 위기고, 그 중에서도 특히 자본세의 위기다. 그렇다면 '탄소중립 시나리오'에는 탄소배출 주범인 자본의 힘을 약화시킬 방안들이 들어 있어야 한다. 그를 위해 필수적인 것은 노동자들의 힘을 강화하는 것이다. 하지만 탄소중립위원회가 제출한 배출 감축 시나리오에는 그런 정치적 전환의 경로는 완전히 배제되어 있다. 우리가 만들어야 할 전환의 시나리오는 자동차를 전기자동차로 바꾸는 것, 석탄 화력 발전소를 재생에너지로 바꾸는 것, 주택 공장을 탄소중립 건물로 바꾸는 것, 몇 년까지 몇 퍼센트를 바꾸는 그런 이야기에서 끝나서는 안 된다. 지금 시급히 필요한 것은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에 대한 시나리오를 촘촘히 그려내야 하는 것이다.

 

기후위기 속에서 우리에겐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그러니까, 우리도 질문을 바꾸어야 한다. 탄소 중심에서 사람 중심으로, 경제 중심에서 생명 중심으로, 글로벌 기준에서 지역 기준으로 "기후위기 속에서 지역에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건가? 노동자들에겐 농민들에겐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건가? 여성에겐 가난한 사람들에겐, 노약자들에겐 무슨일이 일어나는 건가?"라고 다시 물어야 한다.

 

예컨대, 군산에는 "제가 군산에서 태어나'로 운을 떼는 이해하기 어려운 도시에 대한 정념을 표현해대곤 하는 차마 도시에서 떠날 수 없는25만 명의 사람이 있다. 그들이 엮는 수억 개의 관계가 있다. 사람을 위해,이 숱한 관계를 위해 일자리가 존재할 수도 있는 거였다. 거기 맞는 일자리를 지역이 구상할 수도 있는 거였다."6)

 

내가 살고 있는 농촌 인구감소로 '소멸예정지'의 일순위에 들어 있는 이곳에도, 사람과 사람이, 사람과 동물과 강물과 숲이, 함께 엮어온 수억 개의 관계가 있다. 연료를 바꾸고, 탄소중립을 기술적으로 실현하는 것이 우리의 관계와 안전을 담보하지는 못한다. 기후위기 주도권이 자본과 시장으로 넘어갈수록 지역 공동체는 더 위험해진다. 산업도시 군산은 투자 철수가 도시를 위험에 빠트렸지만, 농어촌 지역은 신규 투자지가 되어 위험에 처했다. 지금 내가 사는 곳은 인제에서도 가장 너르고 비옥한 땅이라, 이름도 '상서로울 서, 평화로운 화'라는 서화면이다. 그런데 근래 5,6년 사이에 논물 위로 햇살이 반짝이고 논물에 비친 구름이 호수처럼 바람에 일렁이며, 가을이면 황금빛 가득한 들판에 조금씩 태양광 발전시설과 인삼밭이 잠식해 들어오더니, 이제는 논이 검은 밭에 둘러싸여 3할도 채 남지 않은 지경이 되었다. 남은 곳도 곧 '스마트 괌이 될 것이다. 태양광 발전 업자와 인삼밭 업자들이 농지 임대 비용을 턱없이 올려 놓아, 임차농은 농지를 빌리기가 점점 힘들게 되었다. 산촌 지역 주민들의 주요 수입원이던 잣, 버섯, 약초, 꿀도 해를 거듭할수록 흉작이다. 재작년에 홍천까지 왔던 잣나무 재선충병은 지난해는 인제까지 덮쳐, 잣나무들은 병든 가지를 잘라내느라 우람한 모습을 잃고 먼지털이 총채마냥 깡총한 모양으로서 있다. 잣 수확량도 줄었는데, 나무를 타는 것도 더 힘들어져서, 채취 작업의 강도와 위험은 더 높아진다. 기후가 바뀌면서 버섯 따러 간 산꾼들은 산을 더 오래 헤매고 다녀도 버섯은 예년의 반도 따지 못하고 돌아온다. 남쪽에서 벌들이 다시 실종되기 시작했다는 소식에, 이곳 농민들도 간이 철렁 내려앉아, 만나기만 하면 벌의 안부를 걱정한다. 벌이 없으면, 곡식도 없고 과일도 없으니까.

 

그래서 나는 기후 환경운동이 경제 용어를 무분별하게 사용하고 시장경제 논리를 차용하는 것을 경계한다. '투자 철수'라는 말을 사용하거나, '녹색이 돈이다'라는 말로 기업들을 기후위기 대응의 협력 파트너로 삼고 녹색 투자로 견인하겠다는 식의 태도도 위험하다. 시장의 언어체계와 행동법칙을 공유할 때 기후운동은 자본의 조력자가 된다고 생각한다. 투자 철회든 신규 투자든 그건 금융시장에서 모니터를 보면서 클릭 한 번으로 이루어지는 자금 이동 같은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어떤 금융기관의 투자금이 회수된다고 해서 석탄발전이 당장 중단되는 것도 아니고, 녹색펀드에 투자한다고 해서 그 돈이 바로 나무가 되고 숲으로 변신하는 것도 아니다. 해당 지역의 노동자와 주민에게 자본의 투자 철회는 해고 통보이며 지역 경제 파탄이다. 어떤 녹색펀드의 투자금은, 탄소배출원과 재생에너지 발전원을 확보하기 위해 농지와 산림을 훼손하고, 그곳에서 살고 있는 수많은 존재들의 삶터를 앗아간다. 산업 전환이나 에너지 전환을 시장의 논리나 기술적 방식에 의존하고, 자본이 주도하도록 해선 안 되는 이유다. 기후위기 대응이 자본의 돈벌이 기회로, 노동파괴의 수단으로 성장을 위한 산업 구조조정의 명분으로 쓰여서는 안 되지 않겠는가. 기후위기 시대에 시장이 어떻게 변할 것인가가 아니라, 우리의 삶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더 많이 말하고, 더 깊이 귀 기울일 때다.

 

채효정

 

정치학자. 오늘의 교육 편집위원장. 저서 <먼지의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