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이 무너지는 세상에서 우리는 무엇으로 연대하는가?
세계의 비참을 직시하기
벨기에의 영화감독 다르덴 형제의 영화 <내일을 위한 시간>(2014)은 실직위기에 처한 노동자산드라(마리옹 꼬띠아르 분)의 분투기를 담은 이야기다. 남편과 함께 아이 둘을 키우며 사는 산드라는 태양열 전지를 만드는 공장에서 일한다. 우울증으로 회사를 쉬다가 복직하려는 참인데 회사에서 그만두라는 연락이 온다. 왜? 사장은 아시아와의 치열한 경쟁으로 사업이 위기에 처했다며 비용을 줄여야한다고 말한다. 산드라가 속한 팀 16명의 노동자들에게 1인당 1,000유로의 보너스와 산드라의 복직 중 무엇을 선택할 것인지 투표하게 했더니 단 두 명만 산드라의 복직에 투표했다는 것. 그런데 희망의 불씨가 생겼다. 산드라와 절친한 줄리엣이 투표에 절차상 하자가 있다며 반기를 들었다. 반장이 산드라의 해고가 사장의 뜻이라며 몇몇 노동자들을 협박했다는 것. 결국 사장은 월요일 아침의 재투표에 동의한다. 이제 산드라가 할 일이 분명해졌다. 토요일, 일요일 이틀 동안 14명을 만나서 보너스 대신 자신의 복직에 투표해달라고 설득해야 한다. 영화의 원제가 '이틀 낮, 하룻밤'인 이유다.
영화는 특별한 줄거리가 없다. 이틀 동안 동료들을 만나서 나누는 대화가 전부다. 어떤 이들은 미안해하며 마음을 돌린다. 티무르는 산드라를 붙잡고 흐느낀다. "보너스 택한 게 계속 마음에 걸렸어. 미안해" "사과할거 없어. 이해해" "부끄러워. 나 도와준 것도 잊고 기억나? 내가 전지 깨뜨렸을 때 네 실수라고 했잖아." 계약직인 흑인 알퐁스는 보너스 때문이 아니라 반장과 사람들이 무서워서 보너스에 투표했다고 고백한다. 사람들이 보너스를 원하는데 산드라에게 투표하면 곧 있을 재계약이 무산될까 두려웠다고 고민하던 알퐁스는 월요일 아침, 산드라 편에 서기로 약속한다.
거절하는 이들도 제각각 사연이 있다. 어떤 이에게 보너스 1,000유로는 하나뿐인 대학생 아들의 학비 몫이고, 어떤 이에게는 1년 치 가스와 전기요금이다. 이혼 후 만난 남자친구와 새출발하는 데 필요한 돈이기도 하다. 대부분 미안해하지만 산드라가 자신을 괴롭힌다며 화내는 이들도 있다. 이윽고 지친 산드라가 남편에게 소리를 지른다. “매번 거지가 된 기분이고, 돈 뜯으러 온 도둑 같아. 복직한다 해도 보너스 놓친 사람들이 날 어떻게 보겠어? 온종일 내가 어떻겠어? 같은 공장, 같은 기계, 같은 식당에서 어쩌란 말이야!"
투표 결과는 8대 8, 과반수를 넘기지 못한다. 짐을 싸서 나가는 산드라를 사장이 부른다. 산드라 편이 여덟 명으로 늘어난 결과에 놀랐다며, 노동자들 사이의 감정을 고려해서 보너스도 주고 산드라도 복직하게 해주겠다고 말한다. 해피 엔딩일까? 단정 짓기엔 이르다. 사장은 말을 잇는다. 지금 당장은 곤란하다고 두 달 뒤 알퐁스와 재계약하지 않고 산드라를 복직시키겠다고 약속한다. 산드라가 말한다. "남을 해고시키고 복직할 순 없어요" "해고가 아니라 재계약을 안 하는 거예요." "같은 거죠." "아닙니다.” “안녕히 계세요" 공장을 나선 산드라가 남편에게 말한다. "우리 잘 싸웠지? 나 행복해" 지친 웃음으로 천천히 걷는 산드라의 뒷모습을 비추며 영화는 끝난다.
영화는 실화에서 영감을 얻었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와 동료들이 함께 만든 노동자 착취에 대한 보고서 <세계의 비참> 1권에 실린 실제 사건이다. 자본은 노동자들을 착취하기 위한 방법 중 하나로 해고의 권리를 노동자들에게 넘겼다. 동료들에게 해고 대상자로 지목된 노동자 실비아는 죽음을 선택했다. 영화 속에서 노동자들을 분열시키는 장치였던 복직과 보너스는 이 실화를 변주한 것이다. 어떤 선택이든 모두 모멸감에 빠지고 상처받게 되어 있다. 산드라 역을 맡은 마리옹 꼬띠아르는 정신과 의사를 대동한 채 심리 상담을 받으며 촬영을 진행했다. 그럴 수 없었던 실비아는 죽음을 선택했다. 그것이 선택이었을까?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드러나는 것들
산드라도 실비아도 다른 나라 이야기가 아니다. 2017년 11월 16일, 서울교통공사 군자차량기지에서 차량검수원으로 일하던 무기계약직 김모씨(35세)가 자취방에서 목숨을 끊었다. 불안감과 모멸감을 끝내 떨쳐내지 못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한 걸음씩 거슬러 올라가 보자. 죽음 몇 달 전인 2017년 5월, 문재인 정부가 출범하던 무렵에 서울 지하철 1~4호선을 운행하는 서울메트로와 5~8호선을 운행하는 서울도시철도공사가 통합, 서울교통공사가 출범했다. 서울메트로에서는 무기계약직이 담당하던 점검과 보수 업무가 서울도시철도공사에서는 정규직의 업무였다. 한 직장의 같은 일인데 신분을 차별할 수는 없으니, 서울메트로의 무기계약직에 대해 정규직화 작업이 추진됐다. 그리고 정규직 노동자들의 격렬한 반발이 일어났다. 자기들은 공채로 시험 치고 들어왔는데 자격없는 무기계약직들이 무임승차 하려 한다며 격분했다. “폐급을 폐급으로 부르지 못하느냐", “평양교통공사로 꺼지라” 같은 폭언들이 난무했다. 김씨의 지인들은 경찰에서 "고인은 최근 정규직 전환이 물 건너갈까 걱정이 많았”고, "무기계약직에 대한 근거 없는 인격모독에 힘들어했다"고 진술했다. 정규직 노동자들로부터 인신공격을 당하던 무기계약직 노동자들이 인권위원회에 긴급구제를 신청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한 걸음 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보자. 2016년 5월 28일 오후 5시 57분, 서울 지하철 2호선 구의역 승강장에서 스크린도어를 수리하던 용역업체 은성PSD 소속의 김건우 씨 19세가 열차와 스크린도어 사이에 끼어 사망했다. '구의역 김 군' 사건이다. 2인 1조 작업이 원칙이었지만 늘 사람이 부족했다. 그날도 혼자 작업하다 참변을 당했다. 사고가 난 구의역 9-4플랫폼 스크린도어에 그의 죽음을 추모하는 포스트잇이 가득 붙었다. 이런 글귀도 있어서 마음이 무너진다. "비정규직은 혼자 와서 죽었고, 정규직은 셋이 와서 포스트잇을 뗀다." 2017년 후반기에 정규직화를 앞두고 있던 서울메트로의 무기계약직들은 원래 김 군처럼 하청업체 소속의 노동자들이었다. 김 군 사건 이후에 직고용으로 전환, 무기계약직이 됐다. 이윽고 정규직이 되려던 참이었다. 그래서였을까, 정규직 노동자들의 반발이 더 격렬했다. 애당초 하청노동자 신분이던 이들이 원청의 정규직이 되는 게 어처구니없다는 분노가 깔려 있었을 것이다.
그런 분노는 정당한 것일까? 시계를 되돌려 또 몇 걸음 앞으로 가보자 2011년 12월, 서울메트로의 스크린도어 수리를 맡은 업체 은성PSD가 설립됐다. 하청업체라고는 하지만 실제로는 서울메트로의 자회사나 다름없었다. 서울메트로에서 정년이 얼마 남지 않은 인원들이 대거 이직했다. 이른바 ‘낙하산’들이다. 이직하면서 임금은 줄었지만 정년이 늘었다. 은성PSD는 서울메트로의 구조조정 추진 과정에서 자본과 조직노동이 결탁한 결과로 생겨난 편법의 산물이었다. 서울메트로에서 온 이직자들이 고임금을 받을 때, 김 군 같은 현장 노동자들은 최저임금 수준의 급여를 받으며 과로에 시달렸다.
이제 거의 마지막이다. 몇 걸음만 더 거슬러 올라가 보자. 2006년 취임한 오세훈 당시 서울시장은 대대적인 공공부문 구조개혁을 선언한다. 2010년까지 서울시 공무원의 14%를 감축하고, 산하 공기업의 정원도 10~20% 감축하기로 한다. 특히 서울메트로는 2010년까지 20.3%를 감축하기로 한다. 노동자들의 반발은 당연했다. 은성PSD와 같은 위장 하청업체들이 저 갈등 과정에서 생겨났다. 2017년 군자차량기지 무기계약직 노동자 김모 씨의 죽음의 원인을 찾아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보수의 아이콘이 되고 싶다며 무상급식 주민투표까지 밀어붙이던 한 정치인의 날 선 욕망이 나타난다. 그를 지지한 보통 사람들의 비용 절감을 향한 거친 욕망이 똬리 틀고 있다.
자, 이렇게 보수를 비난하는 걸로 끝이 날까? 유감스럽게도 우리 시대의 비극은 이런 식으로 종결되지 않는다. 힘든 몇 걸음을 더 떼야만 한다. 오세훈 시장이 서울시 공공부문 구조조정을 밀어붙이던 2007년 1월 무렵, 노무현정부는 공공기관 총액인건비제도를 실행한다. 공공부문 효율성 향상에 진심이던 노무현정부는 공공기관 경영 자율화의 일환으로 이제도를 도입한다. 경직된 인건비 운용체계가 기관별로 대폭 자율화된다. 대신 총액 인건비 규모 자체는 기획재정부의 통제 아래 남게 된다. 인건비 총액이 묶여 있으니 비정규직의 처우를 개선하거나 정규직화하게 되면 정규직 몫이 줄어들게 된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서로 다투게 되는이유 중 하나다. 2019년 인천공항공사 보안업무직 정규직화 추진 때를 비롯해서 공공기관 정규직화 추진 때마다 정규직의 반발이 거센 데에는 이 제도가 자리 잡고 있다. 시험 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차별하는 건아니라는 말이다. 정규직 노동자의 폭언과 혐오를 옹호할 수는 없다. 정규직조차 불안하게 만드는 제로썸 구조에 대해 침묵한 채 폭언과 혐오만 비난할 수는 없다는 말이다. 괴물을 만든 자도 괴물이다. 그 심연을 응시해야 한다.
오세훈 시장의 불명예 퇴진 후 당선된 고 박원순 서울시장의 행보도이 제도의 틀 안에서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은성PSD는 그의 임기 초에 설립됐고, 그의 임기 중에도 지하철 안전 예산은 꾸준히 감축됐다. 비용 절감을 위한 안전 업무의 외주화 방향을 되돌릴 구상 따위는 세워지지 않았다. 구의역 김 군의 죽음 뒤에야 무기계약직화가 추진됐다. 그조차도 흔쾌하지 않은 면이 있었다. 김 군의 죽음 한 달쯤 뒤인 2016년 6월 말에 서울시 산하 최대 공기업 중 하나인 서울주택도시공사(SH)의 변창흠 사장이 내부 회의에서 김 군을 언급하며 화를 냈다. "사실 아무것도 아닌데, 걔만 조금만 신경 썼으면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될 수 있었는데 이만큼 된 거"라며 김 군의 부주의로 박원순의 서울 시정이 어려워졌다고 분노했다. 2020년 12월, 문재인 정부의 국토교통부 장관으로 임명될 때 청문회 과정에서 밝혀진 발언이다. 소위 민주진영의 전문가로 알려진 인사의 사고방식이다. 그가 예외일까? 그들을 지지하는 이들은 비용 절감의 욕망에서 보수와 얼마나 다를까? 자문하게 된다. 우리 시대 노동의 비극은 일부 악의 세력이 대다수의 선한 의지를 무릅쓰고 만들어낸 것이 아니다. 좁은 진영론의 이편저편을 넘어 함께 자본의 편에 선 욕망이 만들어낸 합작품이다.
사라지는 미래
'자본에 맞서 단결하는 노동자' 관념이 어느덧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같은 것이 되어가고 있다. 물론 예전이라고 해서 노동자의 처지가 같았을 리는 없다. 젠더차별은 지금보다 더 끔찍했고, 다른 여러 차이도 억압됐던 시절이다. 그때는 좋았는데 지금은 나빠졌다고 말하려는 게 아니다. 전선의 중심축이 이동한 면이 있다는 말이다. 자본과의 싸움보다는 노동자와 노동자의 다툼이 더 부각되는 상황을 직시하자는 말이다. 노동이 서로 다투는 시대의 뚜렷한 특징 중 하나는 노동의 세계에서 '미래'라는 단어가 사라지고 있다는 것이다. 자격증 따고 기술 익혀서 숙련노동자가 되고, 팀장도 되고 공장장도 된다는 꿈이 희미해지고 있다. 연공급이든 직무급이든 기업 내부노동시장의 보상과 승진 규칙 따위를 두고 의미 있는 논란이 벌어지는 세계는 노동시장의 기껏 15% 내외에 불과하다. 나머지 85% 정도 불안정노동의 세계에는 아예 체계도, 미래도 없다. 그 세계를 다룬 수기 <쇳밥일지>에서 용접공 출신의 작가 천현우는 고민을 털어놓는다. “이 일만 해서 정년까지 벌어 먹고살 수 있을까? 자신이 없었다. 출근했더니 부스에 다른 사람이 일하고 있는 꿈을 세 번쯤 꾼 것 같다." 저임금, 고용불안정, 하청과 원청, 노조 원청과 비노조원청 간의 이중 갈등, 탐욕스러운 하청업체 사장, 저임금과 과노동에 시달리는 외국인 노동자까지 모든 문제들이 미래라는 단어를 지운다.
첫 용접 직장에서의 경험을 들어보자. 회사는 한 명만 일할 수 있는 자리를 두고 두 명이 교육받게 한다. '경쟁'을 시켜서 실적이 안 나오는 사람은 자동용접 라인으로 보내는 것이다. 그의 짝이자 경쟁 상대는 인도네시아에서 온 아짐. 그런 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렇게 살갑다. 경쟁은 한 달여 만에 싱겁게 끝난다. 아짐존이 자동용접 라인으로 갔다. 실력 때문은 아니다. 이슬람교도였으니 라마단 기간 동안 업무 집중력이 떨어진 탓이다. 아짐존은 그런 상황을 설명하고 협상을 할 만한 처지가 못 됐다. 그때는 혼나는 그를 보면서도 별생각 없이 침묵했다며 미안해하는 한국인 노동자다.
이주 노동자와의 경쟁에서 손쉽게 승리한 한국인 노동자라고 하지만, 사실은 제조업 현장에서 한국인 노동자는 점차 사라지고 있다. 마치 미래가 그런 것처럼. 대신 이주 노동자들이 그 자리를 채우고 있다. 공장도, 농장도, 건설현장도, 병원도 이들이 없이는 굴러가지 않는다. 그들이 팀장도 되고 사수도 된다. 미래가 없기는 마찬가지다. 어차피 돌아갈 사람들이니 그래도 괜찮을까?
용접 이야기가 나온 김에 경기도 파주에서 12년간 일하다가 영구 귀국한 스리랑카 출신의 용접공 니로샨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무너져가는 노동의 세계가 어떤 방식으로 지탱되고 있는지 보인다. 니로샨은 스물여덟 살 때 이주 노동자로 한국에 왔다. 이주 노동자 대부분이 받는 E9비자로 들어왔다. 3년 기한으로 일할 수 있고, 1회에 한해 1년 10개월을 연장할 수 있다. 그렇게 4년 10개월이 지나면 귀국해야 한다. '성실근로자'로 인정받게 되면 재입국해서 이 과정을 1회 더 반복할 수 있다. 그러니까 총 9년 8개월간 일할 수 있다. 바꿔 말하면 그다음에는 무조건 돌아가야 한다. 미래는 없다.
12년을 일한 니로샨의 길은 특별하다고 할 정도로 달랐다. 그는 '용접의 달인'이 됐다. 20여 명을 이끄는 용접실의 팀장이었다. 그리고 숙련기능인력 비자를 얻는 데 성공했다. E9비자로 5년 이상 일한 이들 중에 한국어 능력, 연봉, 학력, 나이, 은행잔고 등을 고려해서 상대평가 점수로 E7비자를 준다. 파주지역 스리랑카 노동자 공동체 구성원 400여 명 중 오직 니로샨만이 이 비자를 얻는 데 성공했다. 원한다면 영주권 신청할 자격이 있는 비자다. 덕분에 기한 걱정 없이 일할 수 있게 됐다. 가족도 초청할 수 있어서 그리던 아내와 딸을 데려와 함께 살았다. 어린이집에 간 딸은 한국말을 금방 배웠다. 아내는 이웃을 사귀었다. 서로 오가고 함께 식사하는 한국인 이웃이 생겼다. 니로샨은 스리랑카 노동자 공동체의 대표였다. 세월호 희생자의 명복을 비는 법회를 열고, 규찰대를 만들어서 야간순찰을 돌았다. 지역의 무의탁 노인들을 위한 잔치도 벌였다. 스리랑카 노동자들이 십시일반으로 모은 돈으로 벌인 잔치였다. 내가 속한우리 동네 합창단이 찬조출연을 했다. 서로 기쁜 날이었다.
회사의 중심인물이자 노동자 공동체의 리더, 지역사회의 중심인물이 되어가던 그였지만, 한 달 실수령 월급이 200만원 남짓에 그쳤다. 둘째까지 생기자 네 식구가 도저히 살 수 없었다. 같은 지위의 한국인이라면 최소한 두 배 이상은 받아야 했다. 300만 원 이상 주겠다며 오라는 공장들도 있었다. E7비자를 따도 직장을 옮기려면 사장의 동의가 있어야 한다. 사장은 동의해주지 않았다. 돌아가는 것 외에 방법이 없었다. 용접은 주조 금형 · 표면처리 · 소성가공 열처리 등과 함께 2011년에 법률로 지정된 뿌리산업의 하나다. 나무의 뿌리처럼 곁에서는 보이지 않지만, 제조업의 근간이 되는 산업이라는 의미다. 그 뿌리산업에서 12년을 일하며 달인이 된 노동자의 현주소가 이렇다. 미래가 없다. 귀국하기 전에 '사말'이라는 가명으로 언론 인터뷰에 응했다. "나는 여기서 10년, 20년, 아니 100년 일한다 해도 똑같을 거예요. 10년 일해도 최저임금, 100년 일해도 최저임금... 아무리 좋은 기술로 오래 열심히 일해도 달라지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니 힘이 쑥 빠졌어요." ‘용접의 달인이 100년을 일해도 최저임금’, <한겨레>, 2020.8.8.
여기까지 온 김에 조금만 더 가보자. 이 니로샨조차 행복한 경우일지 모르겠다. 파주에는 '용주골'이라고 불리는 동네가 있다. 미군기지가 있던 시절 홍등가로 알려진 곳이다. 오늘날 그곳에는 주로 아프리카 출신의 난민들이 많이 산다. 집세가 싸니 그리로 모였다. 난민으로 인정받지 못하니 대개 미등록 노동자로 살아간다. 예전에는 '불법체류자'라고 불렸다. 사람에게 불법이라는 딱지를 붙이는 일의 잔인함에 대한 자각 탓에 부르는 이름이 바뀌었다. 현실은 그리 바뀌지 않았다.
한국은 세계에서 난민 수용에 가장 인색한 나라 중 하나다. 이미 1992년에 유엔난민협약에 가입했지만, 2019년 기준 한국의 난민 인정률은 1.6%, 인도적 체류허가까지 포함한 난민 보호율은 5.0%에 그친다. 2018년 기준 세계 190개국의 난민 인정률은 30%, 난민 보호율은 44%다. 우리가 난민들에게 얼마나 모진 사람들인지 폭로하는 수치다. 난민 되기가 하늘의 별 따기인 나라에서 결국 적지 않은 이들이 미등록 신분으로 살아간다. 합법적으로 취업할 수 없는 탓에, 안 그래도 열악한 이주 노동자 중에서도 가장 열악한 저변에서 일한다. 최저임금으로 가장 힘들고 숙련도 쌓을 수 없는 일을 떠맡는다. 난민을 돕는 단체에 종종 일할 난민을 보내달라는 연락이 온다. 이들 없이 지역의 영세 공장과 농장은 굴러가지 않는다. 이들이 오늘날의 전태일이자 시다들이다. 전태일과 시다들 앞에서는 미안하고 아파했는데, 오늘날의 난민들에게는 “너희 나라로 돌아가라"고 말한다. 돌아갈 곳 없는 이들에게.
프롤레타리아트와 프레카리아트는 무엇으로 연대하는가?
서구에서 산업 자본주의가 본격적으로 부상하던 19세기 동안 계급으로서의 노동자도 부상했다. 노동자계급과 겹치되 그 이상이거나 그 이하인 무언가를 함축하는 프롤레타리아트라는 단어/집단도 함께 부상했다. 본래 프롤레타리아트라는 단어는 고대로마의 센수스, 즉 인구조사에서재산이 없어서 대신 자식(proles)을 등록한 최하층 무산자를 가리키는 단어에서 유래했다. 마르크스주의가 노동운동의 주도권을 장악하면서 노동자계급은 프롤레타리아트와 동일시됐고 '역사의 주인'으로 떠올랐다. 노동은 인간의 유적 본질을 실현하고, 세계를 창조하는 실천의 지위를 얻었다. 20세기가 되자 세계의 이곳저곳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정당들이 힘을 얻고 혹은 세상을 뒤집었다.
현실 사회주의의 실패 이후 프롤레타리아트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는 이는 드물다. 대신 거기서 유래하되 구별되는 프레카리아트라는 단어가 떠오르고 있다. 불안정 노동자 정도로 옮길 수 있겠다. 영어로 보면 '불안정하다', '위태롭다'라는 뜻의 프리케어리어스(precarious)에서 앞부분 preca-를 가져오고, 프롤레타리아트(proletariat)에서 뒷부분 -riat를 가져와 조합한 단어다. 1970년대 이탈리아 급진좌파 사이에서 유래한 단어다. <뉴욕 타임스>는 "직업 안정성이 거의 없거나 전혀 없기 때문에 삶이 불안정한 사람들의 계급"이라고 풀었다. 자본주의의 신자유주의적 전환 과정에서 일어난 노동자의 지위 하락과 불안정성을 고발하는 단어가 됐다. 임시직, 파트타임, 프리랜서는 물론 경우에 따라서는 영세 자영업자, 영세 노인, 청소년, 실업자 등도 포함한다. 부르디외는 <오늘날 불안정성은 어디에나 있다>(1997)라는 글에서, 실업자와 프레카리아트들은 경제적 계산은 물론 모든 합리적 행위의 조건이 되는, 미래로 자신을 투사할 수 있는 능력에 손상을 입게 된다고 지적한다. 그 결과 정치적으로 동원될 가능성이 거의 사라졌다는 비관이다. 반면 기본소득의 강력한 지지자인 경제학자 가이 스탠딩은 프레카리아트를 기존의 노동자계급, 프롤레타리아와는 다른 ‘새로운 계급’으로 보면서, 이들이야말로 그 불안정성 때문에 근본 개혁을 요구할 가능성을 담지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프레카리아트와 같은 불안정 노동자는 신자유주의화가 진전된 세계 어디서나 넘쳐난다. 미국에서는 '영원한 비정규직'을 뜻하는 퍼머템프(permertemp)가 일본에서는 아르바이트로 살아가는 프리터(free + Arbeiter)와 직업도 없고 교육이나 훈련도 받지 않는 니트족(NEET, Not in Employment, Educationor Training)이, 하루 단위로 고용되는 일고노동자를 뜻하는 히야토이가, 중국에서는 백수, 패배자를 뜻하는 댜오시가 그런 존재들이다. 이 글은 벨기에에서 시작했지만, 이 행성 위 어디서든 시작할 수 있는 이야이다.
노동자계급이든 프롤레타리아트, 불안정노동자든 프레카리아트든 이름보다 중요한 것은 이들의 연대가 어떻게 가능할지에 대한 실천적 해답일 것이다. 산업별 노동조합체계와 연대임금제도가 정답처럼 얘기되곤 하지만, 해결하기 어려운 숱한 쟁점들이 있다. 예컨대 임금 몫의 극대화와 고용 증가, 임금 형평성의 확대라는 세 가지 목표를 동시에 달성할 수는 없다는 피터 스웬슨의 '노동운동의 삼중의 딜레마' 명제는 잘 알려져 있다. 이 트릴레마 속에서 한국의 노동운동은 종종 임금 몫의 극대화로만 기운다고 비판받곤 한다. 이렇게 상충하는 선택지들 사이의 난제들이 무수하다.
성급하게 판단하기 전에 잠시 현실을 생각해 보자. 그들 자신을 제외하고 불안정 노동자의 증가로 가장 고통받는 이들은 바로 조직 노동자들이다. 때로 괴물이 되는 이유다. 괴물이 되기 싫어서 몸부림치는 이들도 조직 노동자들이다. 노동 현장에 대한 경험적 연구들이 공통적으로 보여주는 경향이 있다. 노동조합에 소속된 노동자들이 그렇지 않은 노동자들보다 비정규직의 정규직화에 대해 더 적극적으로 찬성한다. 때로 정규직 노조가 괴물이 되는 걸 본다. 그래도 노조를 만들고 가입을 독려해야 할 이유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동일한 노동과정 속에서 함께 일할 때 정규직 노조는 비정규직에 대해 연대하려는 성향이 높아진다. 반대로 노동과정이 분리되어 있거나 위계화되어 있을 때면 배제 성향이 높아진다. 같은 노동과정에서 일할 수 없더라도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일상에서 접촉하는 기회가 많을수록 서로에 대한 이해가 깊어진다. 동일노동을 향해, 더 많은 접촉면을 향해 애써 실천해야 할 이유다.
대공장 조직노동자들이 이기적으로 변했다며 냉소하는 고학력 중상층 엘리트들이 있다. 그렇다고 이들이 프레카리아트와 연대하는가 하면 딱히 그렇지도 않다. 그저 말로만 진보연하는 것이다. 나 같은 이들이다. 내 참된 고민은 여기서 시작된다. 조직됨을 향해, 더 많은 접촉면을 향해 애써 실천해야 할 이유다.
조형근, 동네를 기반으로 불평등한 세상을 비판하면서 연대하는 세상을 모색하고 있는 독립연구자 지은 책으로 <나는 글을 쓸 때만 정의롭다>, <우리 안의 친일> 등이 있다. remineur21@gmail.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