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요약
이 논문은 황정은의 단편 소설 <파묘>를 분석하며, 촛불혁명 이후 사회적 변화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돌봄 노동의 최전선에 서 있는 여성들의 삶을 조망한다. 여성의 몸이 오랜 역사를 통해 돌봄 노동을 억압하는 근본적 장치로 기능해온 현실에 주목하며, 현대 문학작품들을 통해 이 시대의 돌봄 윤리를 사유한다.

1. 변하는 것 / 변하지 않는 것

황정은은 단편 <파묘>에서 한 가족의 모습을 통해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 사이의 간극을 그린다. 소설은 촛불 시위가 한창이던 2016년 겨울을 배경으로 우리 삶의 부조리를 일소하려는 광장의 장대한 움직임을 보여 주는 한편, 이러한 움직임과는 별개로 흘러가는 어머니 이순일의 삶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지를 묻는다. 소설 속에서 일흔둘인 이순일은 워킹 맘인 장녀를 대신해 황혼육아에 시달리며, 홀로 돌보던 조부의 묘를 대를 이어 관리할 이가 없다는 이유로 파묘한 후 허탈해한다. 황정은은 광장의 구성원이면서도 정작 어머니 이순일의 삶을 문제 삼지 않는 자녀들의 무의식적 이중성을 지적하며 결코 균질하지 않은 광장의 아이러니를 서늘한 시선으로 응시한다.

돌봄 노동에 바쳐진 이순일의 평생은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소설은 가부장제라는 '툴'을 그 원인으로 제시하는데, 툴이란 일종의 장치로서 지배 질서의 이데올로기를 재생산하는 도구를 말한다. 푸코에 따르면, 장치는 사회 구성원 스스로가 이데올로기의 재생산에 참여하게 만드는 치밀한 전략으로 체제의 자연스러운 영속을 이끌어 낸다. 2017년, 촛불혁명의 성공은 가부장제를 비롯한 구시대적 이데올로기를 지탱하는 여러 장치들에 제동을 걸며 관행적으로 반복됐던 여러 부조리와 불합리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사회적 분위기를 만들어 낸다. 페미니즘 문학 역시 여성, 성소수자 등 열악한 처지에 놓여 있는 젠더의 현실을 다각적으로 형상화함으로써 불평등한 현실의 위계를 조정하려는 활발한 움직임을 보인다. 촛불혁명 이후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윤리적 의제는 이제 집단과 개인의 일상을 규율하는 또 다른 장치로 작동하고 있는 것 같다.

문제는 고유명사가 아닌 보통명사로서 우리 안에 여전히 존재하는 '이순일들'에 있다. 이순일의 삶은 포기와 순응, 인내와 희생으로 점철된 과거 우리 ‘어머니들’의 삶의 방식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가부장제가 여성의 삶을 지속적, 반복적으로 억압해 온 장치라면 그것이 장치로서의 기능을 의심받고 있는 지금이야말로 여성의 삶이 획기적으로 변화할 시점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왜 우리 사회의 '이순일들‘은 2020년에도 돌봄 노동의 최전선에 서 있어야 할까. 이 글은 바로 이러한 의문에서 출발하며, 여성(소수자)의 삶을 둘러싼 여러 조건들이 진보하고 있다고 믿는 가운데 바뀌지 않는/바뀌기 어려운 것들에 대해 사유함으로써 여성의 삶을 지속적으로 억압하는 또 다른 장치의 실체를 밝히고자 한다.

수전 그리핀은 <페미니즘과 엄마됨>에서 자신의 삶이 수백 년 동안아이를 키워 온 과거 여성들의 삶과 그리 다르지 않다고 하면서 해방의 실체를 명확히 아는 것과 상관없이 자신은 여전히 해방되지 못했음을 고백한 바 있다.2) 인류사를 통틀어 볼 때, 여성의 몸은 그 자신의 삶을 억압하는 절대적 상수임을 부정하기 어렵다. 구석기시대의유물인 ‘빌렌도르프의 비너스’는 부풀어 오른 복부와 둔부, 거대한 가슴 등 '모체'의 형상으로 존재하는 여성의 모습을 통해 임신과 출산, 양육 등 돌봄 노동의 핵심이 여성의 몸을 매개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드러내며 여성이 오랜 세월동안 무엇으로부터 ‘해방’될 수 없었는가를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 이 글은 여성의 몸이 여성의 삶을 억압하는 하나의 근본적인 장치로 기능하는 현실에 주목하면서 각기 다른 형태의 모체를 그린 김유담과 김초엽의 소설을 겹쳐 읽음으로써 이 시대의 돌봄 윤리를 사유하고자 한다.

 

2. 돌봄의 무한회로 : 김유담, <조리원 천국> <돌보는 마음>

여러 세대가 함께 어우러져 살아가는 대가족제도에서 벗어나 부모와 미혼자녀만으로 구성된 가족의 형태가 보편화되면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성장 과정에서 돌봄에 참여할 기회를 갖기 어렵게 됐다. 가정과 마을공동체라는 일상적 공간에서 돌봄에 필요한 여러 지식들을 자연스럽게 획득할 수 있었던 과거와 달리 오늘날에는 대다수의 부모가 돌봄에 필요한 지식을 충분히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돌봄의 주체가 된다. 출산 후 대부분의 산모들이 필수적으로 머무는 산후조리원은 흔히 산모의 기력 회복을 돕는 곳으로만 알려져 있으나, 사실상 이곳은 돌봄에 필요한 기초 지식을 제공하고, 돌봄 전문가의 지도하에 각종 실습이 이루어지는 수련 시설에 가깝다. 모유 수유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조리원의 일상을 짧게 스케치한 김유담의 조리원 천국은 엄마의 몸 자체에 내장돼 있는 불평등의 근원을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인상적이다.

 

그녀는 자신의 가슴 위로 손을 가져다 댔다. 어제보다 더 단단해져 있었고, 홧홧하고 얼얼한 느낌이 가시지 않았다.

"젖몸살이 시작되려는 거예요"3)

 

소설은 출산 후 젖몸살을 겪게 된 '그녀'에 주목한다. 소설 속에서 '그녀'는 일명 “신의 손”으로 불리는 모유 수유 실장에게 가슴 마사지를 받고 "묽은 빛깔의 액체가 분수처럼 솟아"(15쪽)오르는 충격적인 경험을 한다. 그러나 남편이 보는 앞에서 낯선 이에게 가슴을 내맡긴 채, 단지 젖을 얻기 위해 가만히 있어야 했던 경험은 "관리나 보살핌을 받았다"는 느낌 대신 "젖소"(15쪽)에 동원된 것 같은 불쾌한 기분만을 불러일으킨다.

소설에서는 젖몸살을 단단하고, "홧홧하고 얼얼한 느낌"(15쪽)이라고 했지만, 개인적으로 겪은 젖몸살은 출산의 고통을 뛰어넘는 엄청난 것이었다. 출산 후 호르몬의 영향으로 생성된 젖이 제대로 배출되지 못함으로써 발생하는 젖몸살은 가슴 부위의 엄청난 통증은 물론이고 마치 심한 독감처럼 고열과 근육통을 동반한다. 젖을 먹여 아기를 기르는 일은 대부분의 암컷 포유류가 본능적으로 해내는 일임에 분명하지만 대부분의 여성들은 출산 직후부터 바로 수유가 가능하다는 사실이나 수유의 과정이 쉽지 않다는 사실에 대해 인지하지 못한다. 너무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이어서인 것일까. 나는 학교나 병원 어디에서도 모유 수유에 대해 자세한 설명을 들은 바가 없다. 그래서인지 나는 내 배 속에서 아기가 나왔다는 사실보다도 내 가슴에서 젖이 나온다는 사실이 훨씬 더 판타지적으로 느껴졌다.

 

3. 창조자의 자기윤리와 모성 : 김초엽,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

김초엽의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는 아직 도래하지 않은 미래의 어느 시공간을 배경으로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 정상성과 비정상성, 모성과 성장 등을 주제로 다양한 질문을 던진다. '소피'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으로 돼 있는 이 소설은 데이지 자신이 왜 남들보다 조금 이른 순례를 떠나려 하는지에 대해 차분한 목소리로 답한다. 소설은 ‘마을’이라는 공간에 거주하고 있는 '데이지'가 대대로 이어져 내려오는 성년의식인 '순례'에 대해 의문을 가지면서 시작된다. 시초지로 떠난 순례자들이 모두 다 돌아오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민감하게 받아들인 데이지는 순례 의식을 최초로 고안해 낸 존재에 대해 강렬한 호기심을 느낀다. 고민 끝에 금서 구역을 찾은 그녀는 그곳에서 "릴리는 나를 너무 사랑해서 이 도시를 만들었다."5)는 올리브의 기록을 접하게 됨으로써 마을의 탄생에 관한 진실을 마주한다.

성장소설과 추리소설의 구도 위에서 정상성이라는 개념에 대해 사유하는 듯 보이는 이 소설은 미래의 모성을 현재적 차원에서 사유하게 한다는 점에서 더욱 새롭게 읽힌다. 올리브의 (생물학적) 어머니인 릴리 다우드나는 이 마을의 창시자이다. 콜롬비아에서 태어나 미국에 정착한 이주민이자 뛰어난 과학자였던 릴리는 어느 날부터 인간배아를 디자인하는 바이오해커 ‘디엔’으로 활동하며 부와 명성을 쌓는다. 안면장애 때문에 "스스로를 괴물과 같은 존재"(45쪽)로 여겼던 릴리는 “모든 문제가 자신이 태어나기로 결정된 그 순간에 있다고 생각"(45쪽)하며, 유전병 사전 진단을 받지 않은 채 자신을 낳은 부모의 무책임한 결정을 원망한다. 차별과 배제의 시선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릴리는 배아 디자인을 통해 신인류라 불리는 완벽한 존재들을 만들어내는 것으로 정상성의 자신의 욕망과 신념, 의지를 드러낸다. 마흔 살이 됐을 무렵 갑자기 아기를 갖고 싶다고 생각한 릴리는 자신의 클론 배아를 복제해 ‘나’(올리브)를 만들고 그즈음 종적을 감춘다.

 

릴리에게 아이를 만드는 일은 아주 쉬웠다. 릴리는 먼저 자신의 클론 배아를 만들었다. 그런 다음 릴리가 그녀 자신에게 주고 싶었던 가장 좋은 특성들, 아름다움과 지성, 호기심과 매력을 모두 유전자에 새겨 넣었다. 그녀는 자신의 딸을 인공 자궁에 조심스럽게 옮겼고 발생 과정의 모든 유전학적 노이즈를 섬세하게 통제했다.

그리고 내가 생겨났다.

릴리가 나의 결함을 눈치챈 것은 발생 초기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디자인이 예정대로 됐는지를 확인하는 절차는 전체 프로세스에 항상 포합되는 과정이었다. 실수는 늘 일정 비율로 일어났고 그것을 처리하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배아는 배아일 뿐이다. 폐기하고 다시 만들면 그만이다. 인간은 수정되는 순간부터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발생 과정을 통해 완성된다. 아직 인간이 되지 못한 존재를 폐기하는 것은 릴리에게 어떤 종류의 죄책감도 불러일으키지 못했을 것이다. 릴리는 내가 그녀와 똑같은 유전병을 가진 것을 알았을 때 나를 즉시 폐기할 수 있었다.

그런데 릴리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릴리는 무슨 생각을 했던 걸까? (46-47쪽)

 

미래의 아기는 이렇게 만들어지고 길러지는 것일까. 복제된 배아는 유전자 디자인을 거쳐 완벽하게 설계되며, 임신과 출산은 인공자궁에 의해 손쉽게 해결된다. 갓 태어난 아기는 로봇에 의해 길러져 생후 6개월 즈음이 돼서야 비로소 부모에게 보내진다. 이처럼, 김초엽이 그린 미래에는 임신과 출산, 양육을 담당하는 모체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로봇과 사이보그는 여성을 대신해 사회적 재생산의 역할을 담당한다. 도나 해러웨이는 <사이보그 선언문>에서 로봇을 어떤 유기적 총체성으로 돌아갈 가능성이 없는 ‘고향 없는 피조물’로 규정하며, 스스로를 피해자로 만드는 모든 이데올로기의 원천을 거부하는 존재로 인식한다. 즉, 이들은 생물학적 여성이 아니라는 점에서 이성애의 규범과 이분법적인 성역할에 포획되지 않는데, 이는 과학 기술의 발전이성역할의 구별이나 정상 가족 이데올로기 자체를 지우는 이상적 상태를 만들어낼 하나의 가능성을 제시한다.6)

신인류가 장악한 도시에서는 낙태에 관한 논쟁 역시 불필요하다. 복잡한 “프로세스”를 거쳐 만들어지는 제품에 가까운 아기(배아)는 사람의 형상을 갖추기 전까지는 생명일 수 없으며 조그마한 노이즈라도 발견되는 날에는 그 즉시 폐기된다. 이런 세상에서라면 낙태는 더 이상 “죄책감”을 불러일으키는 행위일 수 없으며 낙태라는 개념어 자체가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소설은 철저한 계획 하에 배아 복제와 유전자 조작을 거쳐 인공 자궁에 이식된 '나'가 릴리의 계획대로 완벽하지 않음으로써 급반전된다. 폐기라는 당연한 선택지가 정해져 있는 상황에서 이상하게도 릴리는 주저하며 망설인다. "어떤 존재에게 살아갈 권리가 부여되는가를 결정하는 문제"에(48쪽) 있어 릴리는 창조자의 자기윤리로부터 절대적으로 자유롭지 못한 모습을 보인다.

릴리를 통해 구현된 미래의 모성은 모든 생명체가 지닌 저 너머의 가능성을 인정하는 방식으로 확장된다. "결국 릴리는 나에게 태어날 가치가 없다는 낙인을 찍지 못했다. 그건 릴리 자신의 문제이기도 했기 때문이다."(48쪽)라는 올리브의 진술을 토대로 우리는 릴리가 다른 한쪽의 가능성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심지어 릴리는 자신과 똑같은 안면장애를 갖게 될 배아(올리브)를 위해 자신이 디자인한 신인류의 배아들을 모두 폐기하고 정상성이라는 개념 자체를 인지하지 못하는 새로운 존재를 만든 후, 그들이 모여 살아갈 커뮤니티를 구상한다. 릴리의 올리브를 위한 마을은 이렇게 해서 탄생하며 이 마을의 오랜 풍습인 순례란 이들과 다른 존재인 신인류가 살고 있는 도시의 모든 것을 경험하는 일에 다름 아니다.

결론적으로 김초엽은 릴리의 극단적인 자기윤리가 또 다른 문제를 야기했다고 여기는 듯하다. 그러나 이 작품의 미덕은 인류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로 집요하게 여성을 억압해 온 기존의 장치들을 전복시키는 기발한 상상력에서 발견된다. 순례에 나타난 창조자로서의 자기윤리는 모체를 매개로 쌓아 올린 퇴행적이고 모순적인 방식의 현재적 돌봄과는 거리가 멀다. 이곳에서 여성은 모체로서의 몸을 벗어나 자유롭게 존재하며, 돌봄을 목적으로 자기 자신을 착취하거나 또 다른 누군가를 착취하지 않는다. 먼 미래에도 우리는 모체로서든, 창조자로서든 돌봄 자기윤리로부터 완전하게 자유로울 수는 없을 것 같다.자기윤리의 정당성을 증명해 보이려는 각기 다른 욕망이 비록 예상할수 없는 결과를 초래하더라도 그 과정에서 우리 삶의 중요한 가치들은 무한히 확장될 것이다.

 

1) 가능하다면, 나는 이 글을 '생활 비평'이라고 나름의 이름을 붙인 후에 논의하고 싶다. 생활 비평이란, 비평가로서의 자의식을 지닌 '나'가 일상생활 속에서 갖게 된 비평적 고민을 문학적으로 풀어내려는 시도로, 이 글에서 '나'는 한 아이를 막 낳고 기르기 시작한 '엄마'이자 비평가라는 두 개의 정체성으로 존재한다.

2) 수전 그리핀, 김하현 역, <페미니즘과 엄마됨>, <분노와 애정>, 시대의창, 2019, 95쪽.

3) 김유담, ‘조리원 천국’, <릿터>18, 2019 6/7, 민음사, 15쪽. 이하 쪽수만 표기함.

4) 모유수유의 과정에서 느끼는 모순과 양가적 감정에 대해서 에이드리언 리치는 이렇게 고백한 바 있다. "아이의 젖 빠는 행위는 성행위와 마찬가지로 신경을 곤두서게 하고 신체적 고통을 유발하며 무능감 또는 죄책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또는 성행위와 마찬가지로 신체적 즐거움을 유발하고 마음을 진정시켜 주며 애정 어린 관능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 에이드리언 리치, 김하현 역, ‘분노와 애정’, “분노와 애정”, 시대의창, 2019, 156쪽.

5) 김초엽, ‘순례’,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허블, 2020, 23쪽 이하 쪽수만 표기함.

6) 도나 해러웨이, 황희선 역, <해러웨이 선언문 - 인간과 동물과 사이보그에 관한 전복적 사유>, 책세상, 2019.

 

박윤영

2016년 <실천문학> 신인상(평론) 등단, <실천문학>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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