묻고 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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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해한 세계는 가능할까요?

조성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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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밀한 것은 다정하고 따뜻하게 느껴진다. 친밀하다는 것은 말 그대로 사이가 가깝거나 친하다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서로를 잘 알고 익숙하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그래서 우리는 친밀성이라는 말 속에서 편안함을 느끼고 안심할 수 있는 관계를 상상한다. 나에 대해 더이상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관계, 나를 증명하지 않아도 되는 관계 속에서 다치지 않고 다정함을 나누며 살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 친밀한 관계를 간절히 상상해보게 되는 날이 있다. 학생들에게 하는 말인지 나에게 하는 말인지 모를 졸지 말고 조금만 더 힘내봅시다!"라는 말을 외쳐가며 내리 다섯 시간을 혼자 열심히 떠들고 나서, 편의점 도시락을 사서 불 꺼진 원룸으로 돌아와 보일러부터 켠다. 차게 식은 바닥에 온기가 돌 때까지 한 번도 갠 적 없이 펴져 있는 이불 안에 쏙 들어가서 누웠다가, 방이 적당히 따뜻해지면 컴퓨터 책상에 앉아 편의점 도시락을 먹는다. 오른손으로 젓가락질을 하는 동시에 왼손에는 스마트폰을 쥐고 온갖 SNS를 한 바퀴 돌며 주변 사람들에게 오늘 별일이 없었는지 둘러본다. 별 재미있는 이야기가 없으면 카카오톡으로 친구나 동료들에게 괜히 메시지를 보낸다. "뭐함?" "밥 먹었어?" 그렇게 식사를 마치고 간단한 일(메일에 답장하기 등)이 있으면 바로 하고, 간단하지 않은 일(원고 쓰기 등)이 있으면 뒤로 미룬다. 그리고 밤이 늦으면 이불 속으로 다시 쏙 들어가 눕는다. 나 혼자 떠드는 것 말고 대면으로 즐겁게 대화한 것이 얼마 전인지 생각해보니 울적해진다. 메신저나 SNS로 이야기하는 것 말고, 친구들을 만나서 먹고 떠들고 싶어지지만 그들은 바쁘기 때문에, 시간을 따로 잡고, 어디서 만날지 정하고, 무엇을 먹을지 정해야 하기 때문에 만나기도 어렵다. 그럴 때 나는 가까운 주변에 친구들이 살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간절해진다.

먼저 룸메이트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마침 그때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김하나. 황선우, 위즈덤하우스, 2019)를 읽고 부러움에 눈물을 흘렸다. 작가와 패션 매거진 에디터로 멋지게 사회생활을 하던 두 여자가 친구가 되어 그들의 토실토실하고 귀여운 고양이들까지 한집에 모여 살게 된다. 여자 둘에 고양이 넷이라 W2C4라는 분자식의 구조를 갖춘 이 식구가 살림을 합친 아파트는 삼십 평에 방 세 칸과 화장실 두 칸, 널찍한 거실과 베란다와 다용도실을 갖추고 있어 함께 살기도 안성맞춤이라고 했다. 이사가 결정되자 건축을 전공한 친구가 인테리어를 맡아주었고, 또다른 친구는 호두나무와 떡갈나무로 멋진 책장을 만들어주었다. 그렇게 같은 아파트나 같은 동네에 사느 친구들이 모여 함께 동네 산책도 하고 고양이도 돌봐주고 단골 카페와 단골 바를 다니며 이웃과 네트워크를 만드는 삶에 대한 이야기를 읽다보니, 혼자 편의점 도시락을 먹으며 동네방네 메시지를 보내는 내 모습이 더욱 대비가 되었다. 나도 저렇게 살고 싶었다. 

문제는 비정규직이나 프리랜서, 활동가를 전전하는 나와 친구들이 그럴싸한 삼십 평 아파트를 장만할 돈을 만들기 위해서는 한 열 명쯤 돈을 합쳐야 할 것 같은데, 친구가 열 명이나 있지도 않을뿐더러 문화 다양성이 넘치는 친구들 열 명이 한 아파트에 와글와글 모여 사는 것은 상상만 해도 끔찍한 기숙사지 아름다운 동거 생활은 아닐 것 같다는 것이었다. 거기다 함께 살 집을 아름답게 꾸며줄 건축가 친구나 목공예를 하는 친구, 디자이너 친구는커녕 집들이 날에 휴지나 사와주면 다행일 친구들뿐이라는 것까지 생각하면, 나에게 그런 아름답고 다정한 동거 생활은 너무나 먼 이야기로 느껴졌다. 

하지만 친밀성을 나누기 위해 꼭 한집에 살 필요는 없다. 게다가 한집에 살다가 오히려 사이가 더 나빠질지도 모른다. 집에서 옷을 훌렁훌렁 벗어던지고, 잘 때는 코를 골고, 항상 여기저기 부딪혀서 물건을 박살내고, 정리정돈도 안 하는 나와 사는 것은 누구에게나 썩 편한 일은 아닐 것이다. 이제 나는 친구들이 한집은 아니라도 한 건물에 모여 사는 것을 상상해본다. 상상 속 아파트에 서는 옆집이나 아랫집에 친구들이 살고 오며 가며 반찬을 나눠 준다. 하지만 얼마 전에 한 친구가 층간 소음 문제로 윗집과 죽일 듯이 싸웠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이 떠올랐다. 즉 친구가 만약 나의 아래층에 살게 되면 이제 나를 죽이려고 할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역시 너무 가까이 사는 것은 아름답고 친밀하고 따뜻한 이웃이자 친구 관계를 만드는 데 좋은 것만은 아닌 듯했다. 그렇게 친밀한 이웃들에 대한 상상은 나는 혼자 살 테니 친구들이 적당히 도보로 십 분 정도 거리에 살아주면 어떨까 하는 것을 마무리가 되었따. 

그러니까 내가 상상한 친밀성의 세계는 사실 이런 것이다. 너무 가깝지 않으면서 너무 멀지도 않은 세계, 그래서 서로 간 적절한 거리를 지킬 수 있는 세계이자 서로 불쾌해질 일 없는 세계이며 서로의 무해함을 보장받을 수 있는 세계, 하여 아름답고 다정하고 무해하고 따뜻한 세계이다. 이 세계에서는 누구도 나의 스위트 홈을 함부로 침범하지 않는다. 친구들 또한 층간 소음을 일으키지 않고 적당히 좋은 이웃이 될 수 있을 정도로만 가까이에 살 것이다. 우리는 모두 서로에게 선량한 이웃이 될 것이고 선한 영향력을 주고받을 것이며, 정치적으로 올바른 대화를 나누고, 세련되고 산뜻하고 중산층적이고 도시적인 익명성을 해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친밀함을 주고받을 것이다.

따라서 이 세계에서는 멋진 이웃이 되기 위해 누구도 서로 폐를 끼치지 않아야 한다. 서로의 기분을 침해하지 않을 정도로 정중한 부탁과 산뜻한 답례가 오고 갈 것이며, 고양이들은 모두 느긋하고 통통할 것이고 밤늦은 시간에 온 동네가 쩌렁쩌렁하게 울리도록 시끄럽게 울고 싸우는 길고양이들은 이 아름다운 거리에서 추방당하거나 중성화를 당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당연히 그런 세계에 살고 있지 않다.

2. 떠나거나 남거나-지긋지긋한 친밀함의 세계

친밀한 것은 때로는 지긋지긋하고 폭력적으로 느껴진다. 친밀하다는 것은 말 그대로 사이가 가깝거나 친하다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서로를 잘 알고 익숙하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그래서 우리는 때로 너무 많이 알기 때문에 환멸을 느끼고, 너무 익숙하기 때문에 지긋지긋해한다. 좀 멀어졌으면 좋겠는데 너무 가까워서, 서로 간의 거리를 지키지 않는 관계, 자주 불쾌해지는 사이가 된다. 나는 길고양이에게 밥을 줘서 옆집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고, 옆집 사람들은 밤늦게 술을 마시고 쩌렁쩌렁 떠들고 싸워서 나를 짜증나게 한다. 이웃만이 아니다. 사랑의 이름으로 때리는 부모나 애증이 깊어져 서로 괴롭히고 싸우는 연인들은 친밀하다못해 서로 속속들이 알고 있지만 그래서 더욱 길게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한다. 다정하고 무해하고 안온하기는커녕 짜증나고 유해하다. 그래서 때로 우리는 지긋지긋해진 친밀한 관계를 떠나 나를 모르는 세상으로 가고 싶어진다. 그래서 나는 이 소설의 도입부를 좋아한다.

쇼코는 해변에 서 있으면 이 세상의 변두리에 선 느낌이 든다고 말했었다. 중심에서 밀려나고 사람들에게서도 밀려나서, 역시나 대양에서 밀려난 바다의 가장자리를 만나는 기분이라고. 외톨이들끼리 만나서 발가락이나 적시는 그 기분이 그렇게 좋지는 않다고 했다.

“언젠가는 바다를 떠나서, 사방을 둘러봐도 빌딩밖에 없는 도시에 가서 살 거야.” 쇼코는 ‘언젠가는’ 이라고 말했다. 열일곱 살에도, 스물세 살에도. 언젠가는 도시로 나갈 거고, 언젠가는 한국을 일주일 동안 여행할 거고, 언젠가는 남자와도 함께 살아볼 거고, 언젠가는 병원을 관둘 거고, 언젠가는 고양이를 키울 거고, 무엇이든 해보리라고 내게 이야기했다.(1)

「쇼코의 미소」에서 쇼코는 “언젠가는 바다를 떠나서, 사방을 둘러봐도 빌단밖에 없는 도시에 가서 살 거야"라고 선언한다. 자신이 태어나 살아온 작은 도시, 천변과 바다와 익숙한 사람들과 무엇보다 지긋지긋한 가족들을 떠나 다른 무엇이 되고 싶은 소녀들은 바다를 보면 이가 갈린다. 사방을 둘러봐도 빌딩밖에 없는 도시의 사람들에게 바닷가는 아름답고 호젓한 휴양의 공간이겠지만, 자신을 둘러싼 친밀성의 세계를 박살내고 떠나고 싶은 소녀들에게 바다는 벗어나고 싶은 이 세상의 변두리이다.

쇼코와 소유. 두 소녀에게 가족의 친밀함은 변두리에서의 삶을 더욱 질척질척하게 옥죄는 것으로 느껴진다. 쇼코는 자신을 아끼는 할아버지에 대해 “할아버지에게 나는 종교이고, 하나뿐인 세계야. 그런 생각을 할 때마다 죽어버리고 싶어 (13쪽)라고 말하면서 "할아버지가 자기를 마치 여자친구처럼 생각하는게 소름 끼친다고, 고등학교만 졸업하면 도쿄로 떠나서 다시는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을 거라고(같은 쪽) 이야기한다. 소유도 “변화할 의지도, 아무런 목표도 없이 그저 그 자리에서 멈춰버린 사람들 (14쪽) 엄마와 할아버지가 지긋지긋하다. 그래서 애정이라는 이름으로 질척거리거나 항상 나의 곁에 있다못해 멈춰있는 것 같은 사람들이 아니라, 오히려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먼 곳에 있는 사람 (18쪽)에게 왜 고향을 떠나고 싶은지, 가족이 왜 날 죽어버리고 싶게 만드는지 말할 수 있을 때 '친밀성이 생겨난다.

그렇게 작고 좁은 변두리에서 살아가는 소녀들에게 주어지는 선택지는 단 두 가지이다. 세계지도를 펼쳐놓고 "세상은 넓고, 우리는 어디든지 갈 수 있다'(15쪽)고 다짐하며 어디든 지금 여기를 벗어나 "기왕이면 서울로, 베이징으로, 파리로, 뉴욕으로 가(같은 쪽)기를 택하거나, "자신이 태어난 고향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21쪽)하고 스물세 살에 벌써 직업을 정하고 태어난 소음에서 떠나지 못한다는" "형편없는 선택"(31쪽)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곳을 떠날수만 있다면 환멸스러운 지긋지긋한 친밀성이 아닌 다른 세계가 펼쳐질 것만 같다. 그 다른 세계에서의 삶은 소유가 상상한 대로 "속물적이고 답답한 삶과는 달리 "자유롭고 하루하루가 생생한 삶'(같은 쪽)일 것이다. 그 세계의 사람들은 도시인의 익명성과 친밀성 사이의 거리를 잘 유지하면서 퇴근 후에도 산뜻한펍에서 맥주를 나누며 영화와 예술과 정치에 대해 토론을 하리라. 누구도 그저 TV 앞에 못박힌 채로 "아무런 목표도 없이 그저 그 자리에서 멈춰버(14)리지않고 "꿈을 따라가기 때문에 의미 있는 삶(32쪽)을 사는 그야말로 아름답고 다정하고 무해한 친밀성의 세계를 그들은 상상한다.

그러나 고향에 남아 할아버지를 간호하며 물리치료사가 된 쇼코와 달리 서울의 한 사립대학으로, 캐나다의 교환학생으로, 뉴욕의 여행자로, 영화계로 멀리 더 멀리 다니며 소유가 마주한 것은 고향의 바깥에도 그런 아름답고 무해한 친밀성의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예술과 문화에 대해 토론할것 같았던 영화계 사람들은 "이런저런 영화판 뒤풀이 자리에 가서 가십을 듣고퍼뜨리(32쪽)거나 "꼬인 혀로 영화 없이는 살 수 없어, 영화는 정말 절실해" (34쪽) 같은 말로 자신을 속이고 있었다. 바다를 떠나서 사방을 돌아봐도 빌딩밖에없는 도시로 왔지만, 그곳에서도 지긋지긋함과 환멸을 만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소설 속에서 쇼코와 소유는 모두 할아버지를 잃은 후에야 그들의 삶과 내면을 들여다보고 고향과 가족의 지긋지긋한 친밀함의 세계에도 의미가 있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러나 그것이 끈적한 가족 간의 사랑으로의 회귀는 아니다. 쇼코와 소유는 "몸은 약간 떨어져서 팔로 서로의 등을 두르는 식의 포옹"(64쪽)으로 마지막 인사를 나눈 채로 서늘하게 헤어진다. 그러나 소설이 아닌 현실 속의 우리는 그저 서늘하게 헤어지는 것으로 이야기가 끝나지 않고, 계속해서 삶을 이어가야 한다. 떠나거나 떠나지 못한 후에도 계속되는 삶 속에서 우리는 어떤 친밀성을 마주하면서 살아가야 할까.

3. 지긋지긋한 친밀성으로부터 망명하기

집으로서의 몸. 하지만 몸은 장소와 공동체 그리고 문화가우리의 뱃속 깊이 파고들어 있다는 것이 이해될 때에만 집일 수 있다.- 일라이 클레어, 『망명과 자긍심』

지긋지긋한 친밀성의 세계에서 벗어나서 바다가 보이지 않고 빌딩밖에 없는 도시의 삶 속으로 들어가기를 그렇게나 바랐지만, 소유와 쇼코는 결국 '할아버지'로 대표되는 가족의 친밀성을 상실한 것을 애도한다. 그것은 그저 우리가 결국 '가족'을 떠날 수 없고 여전히 '혈족'이라는 세계를 버리지 못하기 때문일까. 그러나 지긋지긋한 친밀성의 세계를 떠나는 것은 그저 속시원하게 다른 산뜻한 세계로 옮겨가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일라이 클레어는 그런 떠남을 '망명'이라고 이름 붙였다.

이제 망명으로 되돌아가보자. 이는 중요한 단어이자, 어려운 단어이다. 이 단어는 상실의 의미뿐만 아니라, 뒤에 남겨두고 온 장소에 대한 애정 어린 소속감과 연결같은 의미도 듣고 있다―그것이 아무리 양가적인 것이라 해도 말이다. 그곳을 잘 벗어났다는 태도라기보다는 애도하는 태도인 것이다. 망명은 또한 쫓겨나고 강제로 떠난다는 감각을 담고 있다. 그렇다. 내게 집의 상실은 내가 퀴어로 존재한다는 것이 관련되어 있다. 그러나 이는 망명인가? 이 물음에 대답하기 위해선 익명성, 그림, 안전, 그리고 더 혼란스럽게 뒤섞인 것에 관하여 또다른 이야기를 할 필요가 있다.(2)

그는 오리건주의 포트오포드라는 태평양 북서부 마을에서 자랐다. 그 작은 마을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시스키산맥의 숲과 강에서 자라나는 나무를 벌목하고 연어를 잡으며 살아가고 아이들은 목재 산업에서 걷은 세금으로 운영되는 학교를 다닌다. 남성들은 벌목을 하며 목재 운반 트럭을 몰고, 여성들은 센트리 마켓에서 출납원으로 일하며 비슷하게 가난한 노동자들로 태어날 때부터 서로를 아는 익숙한 친밀성 속에서 살아간다.

그러나 그는 그 익숙한 친밀성의 세계에서 살아갈 수가 없다. 그는 장애를 갖고 있으며, 퀴어이고, 아버지와 이웃 어른들에게 성적으로 학대를 당했다. 그래서 그는 물리적인 안전을 위해, 그리고 행복하고 편안하게 살아가기 위해서 도시의 대학으로 떠나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시골 마을에 남아서 가난한 노동계급으로 살아가는 친구들에게 예정된 삶이란 "졸업 후에 바로 결혼해 부모님 댁 근처로 이사를 가거나 음주운전 사고로 또는 101번 고속도로에서 추격전을 벌이다 죽거나, 아기를 가져 열다섯 살에 학교를 그만두(96쪽)는 것뿐이다.

그러나 도시로 떠난 그는 그런 삶 대신 자신을 고문했던 인간들과 수천마일 떨어진 곳에서 안전하게 지내고, 일자리를 구하고, 퀴어 문화에 접근하여다이크 활동가로서 살아갈 수 있게 된다. 우리는 그가 지긋지긋한 친밀성의 세계를 떠나서 드디어 안전하고 무해하고 따뜻한 친밀성의 세계에 살게 된 것을 축복하고 싶어진다. 그러나 그는 도시의 익명성, 레즈비언 페미니스트 활동가들의 지지, 다이크 공동체 속에서도 완전한 소속감을 느끼지 못한다. 그는 "도시의익명성을 매우 소중히 여기고, 거기서 만났던 많은 문화, 생각, 차이들을 즐겼"지만, 동시에 "나무들, 강, 험준하고 조용한 시스키유(81쪽)와 그가 자라났지만 상실할 수밖에 없었던 시골 백인 노동계급 문화가 그의 몸에 새겨놓은 감각들이 그를 도시의 삶에 부대끼게 만든다.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보스턴에서 열린 퀴어 작가들의 회의에 이어진 화려한 파티 중에 한 편집자가 그에게 오리건의 도로가 그렇게 낙후되었는지 물으며 농담을 던지자, 그는 세련되고 재치 있게 받아치고 못하고 진지하게 오리건의 비포장도로와 우기에 대해 설명한다. 누구도 그것을 진짜로 궁금해하지 않는다는 것을, 한겨울의 비로 흙길이 질퍽해진 촌동네의 황량한 풍경을 진지하게 묘사하는 것이 그 파티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을 그도 모를 리가 없다. 그러나그는 설명하는 것을 멈출 수가 없다.

그는 고향을 탈출하듯 나왔지만, 그럼에도 고향 사람들의 삶을, 도로가 포장되지 않아서 겨울 우기에는 우편배달부가 오지 못하는 마을의 풍경을 웃으며 말할 수가 없다. 그는 환경을 보호하기 위해 활동하고 있지만, 삼림 파괴가 일어나고 있고 벌목 노동 외에 경제적 선택지가 없어서 절망하고 있는 고향의 노동자들에 대해서 "환경운동가들을 마구 몰아세우는 불쌍하고 멍청한 짐승"이라거나 목재 산업을 방조하는 충성스런 짐승"(116쪽)이라고 비난할 수가 없다. 그는 무정부주의 성향의 사회주의자이자 다이크 활동가이지만 정치적으로 보수적이고 터무니없이 편협한 사람들에 대해 '레드넥' '촌놈' '얼간이'라고 도시사람들과 같이 깔보고 비웃을 수가 없다. 함께 대학에 진학하자고 약속했지만 재정적인 문제로 결국 고향에 남아 남자친구와 결혼을 하고 두 아들을 낳은 친구와는 이제 나눌 이야기가 없어졌지만, 그럼에도 남겨진 사람들을 깔보고 배반할 수 없다. 
하여 지긋지긋한 기억들이 뒤섞인 고향을 떠나는 것이 잘 벗어났다는 태도가 아니라 '애도하는 태도일 수밖에 없는 것은 그 지긋지긋한 기억들과 친밀함이 이미 우리의 속 깊이 파고들어 우리의 몸을 만들고 '장소 감각'을 선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단지 장소를 옮긴다고 해서 바뀔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우리의 몸이고 집이다.

나머지 다이크 공동체를 얻었지만, 내 계급적 위치는 변하지 않았다. 떠나기 전, 나는 이성애 중심적인 시골 노동계급 마을에 사는 시골 혼합 계급 퀴어 아이였다. 떠난 후, 나는 대다수가 중산층인 도시 퀴어 공동체에 사는 도시로 이주해온 혼합 계급 다이크 활동가였다. 이따금 나는 내가 그저 하나의 배제를 또다른 배제로 교환했을 뿐이고, 거기다 집까지 잃어버린 것처럼 느끼기도 한다. (110쪽)

그는 ‘이성애 중심적인 시골 노동계급 마을’의 지긋지긋한 친밀성의 세계를 떠나왔지만, 그것은 '계급 상승이나 정체성에 맞는 공동체로의 편입이 아니 이상의 중심적인 시골 노동계급 마을'과 '대다수가 중산층인 도시 퀴어 공동체‘ 어느 쪽에도 완전히 속하지 못하는 '망명'이자 '상실'일 수밖에 없다. 그러니 소유가 자신의 고향과 가족을 떠나 도시로 향하며 "자유롭고 하루하루가 생생한 삶을 꿈꾸었지만 실패했던 것은 그 개인의 한계가 아니라 그의 계급과 장소 이사 이미 ’망명자'로서의 삶이 노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4. 지긋지긋한 친밀성을 박탈당하기

집으로서의 몸. 하지만 몸은 몸들이 도둑맞고, 거짓과 독을 주입받고, 우리로부터 억지로 떼어내질 수 있다는 것이 이해될 때에만 집일 수 있다. - 『망명과 자긍심』

우리는 지긋지긋한 친밀성의 세계에서 벗어나 아름답고 무해한 친밀성의 세계로 훌쩍 옮겨갈 수가 없다. 우리가 사는 지긋지긋한 세계의 밖에는 또다른 방식의 지긋지긋함이 존재하고, 아름답고 무해한 친밀성의 세계를 찾아가는 것는 요원해 보인다. 설혹 그런 세계를 만난다고 해도 이미 나의 몸은 지긋지긋한 친밀성의 세계를 거치며 형성되고 만들어져서 그 무해한 세계에 영 어울리지 못한 채로 부대끼며 여기도 저기도 속하지 못한 채 망명자가 되어 떠돌게 된다. 그렇다면 그 지긋지긋한 친밀성의 세계 속에서 계속해서 살아가는 것은 어떨까

『도시의 속살』은 부산에서 문화 노동자로 살아가는 저자가 자신이 살아가고 지나온 장소의 모습들을 모아서 엮은 책이다. 당감동, 동양고무, 용사촌, 마리포사, 동보서적 등 책에 등장하는 지명과 상호들은 이미 사라진 이거나 아직 사라지지 않았어도 이제는 그다지 관심을 받지 못하는 곳들이다. 그렇게 도지 속에서 사라져가는 노동계급 마을에서 살아가는 것에 대해 저자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어떻게 해야 가벼워질까. 나는 이곳이 아니라면 어디라도 새 출발을 하고 싶었다. 흔히 독립하면 그런 경험을 하기도 한다고 한다. 이 동네가 원가족처럼 느껴져 아주 부끄러웠다가 애잔했다가 사무치기도 했다. 그렇게 이 동네가 지긋지긋해졌다. 나는 같은 집에서 30년이 넘게 살고 있으면서 이 동네 오만 꼴을 다 봤고 동네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이 동네의 치부가 어디에 있는지 속속들이 알아 눈을 감아도 보이고, 차라리 외면하고 싶은 곳도 있다.(3)

저자는 자신이 삼십 년 넘게 살아온 당감동에 대해 도저히 가벼워질 수가 없다고 말한다. 그에게 이 동네는 "아주 부끄러웠다가 애잔했다가 사무치기도' 하는 한마디로 '지긋지긋한 동네이다. 서로 간에 '오만 꼴을 다 보았고, "‘치부'도 '속속들이 알아 눈을 감아도 보일 지경이다. 신발 공장과 다세대주택을 닥치는 대로 짓느라 "무릎 맞대듯 마주보는 집"(같은 쪽)들 사이로 거미줄 같은 골목들이 만들어졌으니, 서로 간에 오만 꼴과 치부를 보지 않으려고 해도 볼 수밖에 없는 동네가 당감동이었다. 그곳은 집집마다 신발 밑장을 붙이느라 고무조각이 날아다니고 오루꼬미, 시다 등을 구하는 부업 전단이 전봇대마다 빼곡하게 붙어 있는 '신발 요정들의 마을”(32쪽)이기도 했다.

누군가는 그런 마을에서 살아가는 삶에 대해 정이 넘치고 좋다'고 말하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선택할 수 없었던 고향을 벗어나고 싶으면서도 애써 애정을 찾아보려는 시도는 이웃이 있어서 좋지 않냐"는 친밀성보다는 '그 모든 게 폭력처럼 다가오’는 감각을 낳는다.

그랬던 그들은 모두 이곳을 떠났고 나는 매일 밤 여전히 집에 들어간다. 예전에 우리집에 왔던 맏아들은 우리집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어쩌다 고향이 된 이 당항문을 벗어나고 싶으면서도 매써 매점을 찾아보려는 양가감정이 든다. 고향이라는 것은 선택할 수 없다는 뜻일지도 모른다. 가족에게 그런 감정을 느껴본 적이없는 사람에게 이런 내 감정을 설명하고 해명하기도 힘들었다. 이웃이 있어서 좋지 않나고 그 모든 거 폭력처럼 다가오기도 했다. (21쪽)

일라이 클레어는 자신이 남겨두고 온 장소를 상실하는 것은 '애도하는 태도일 수밖에 없다고 했다. 당감동을 떠나지 않고 살아온 김가이에게서도 그와 같은 태도가 엿보인다. 그렇게 지긋지긋한 친밀성을 떠나지 않고 남아 있음에도 상실이 일어나는 것은 그가 당감동을 벗어나기도 전에 이미 지긋지긋한 친밀성의 세계가 속절없이 허물어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폭력처럼 느껴질 정도로 서로의 치부를 알면서 붙어살던 이들은 이미 모두 이곳을 떠났고, 자신만이 매일 밤 여전히 집에 들어간다. 여공들이 바글바글하게 출근하던 진양고무와 동양고무도 폐업하고, 미싱을 돌리며 다닥다닥 붙어 있던 집들은 곳곳이 폭탄 맞은 듯이 허물어져 주차장이 되어버린 마을에서 떠올리는 것은 해명 불가능한 감정이다. 지긋지긋한 친밀성 속에서 살아가고자 해도 '사양산업'이라는 이름으로 그 세계가 나보다 먼저 붕괴하고, 나는 그 세계로부터 벗어나기도 전에 상실을 겪는다.

이 책에서 사라진 지명과 상호를 호명하는 것은 그렇게 억지로 떼어내지고 박탈달한 세계들을 하나씩 부르는 것이기도 하다. 당감동의 길 건너 부암동에는 한국전쟁 살아 용사들이 터를 잡아 동네를 이룬 일명 '용사촌'이 있었다. 태극마을, 광명촌처럼 전쟁 후 생긴 지명인 용사촌에는 "팔이나 다리가 불편한 어르신들이 평상에 앉아“(35쪽) 있기도 하고, 감나무 밑에는 할머니들이 모이기도 했다. 2020년 용사촌은 재개발로 완전히 가루가 되었고, 그 뒤 당감동으로 이사한 할머니가 흙더미가 된 용사촌을 하루에 세 바퀴씩 돈다는 이야기가 들린다. 지긋지긋했지만 떠나기도 전에 박탈당한 친밀성의 세계. 흔하고 흉하고 부끄럽고 애잔해서 누구도 그다지 기억하고 싶어하지 않는 그 세계를 기억할 만한 무언가를 찾기 위해서 "모든 것이 사라진 후의 흙더미 속에서 누군가가 다시 매일 세 바퀴씩 돌며 그 이야기를 다시 찾아”(7쪽)내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우리의 목은 장소와 공동체와 문화가 우리의 뼛속 깊이 파고들며 만들어진 집으로서의 몸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로부터 가볍게 떠나고 싶어도 이미 나이 몸이 되었기에 상실 없이 떠날 수가 없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의 몸은 떠나지 않아도 억지로 베어내어지고 박탈당하기도 한다 나의 지긋지긋한 봄, 지긋지긋한 집을 도둑맞고 뜯겨져 나오지만 우리는 그저 가만히 박탈당하고 애도하고 있을 수만은 없다. 우리의 빼앗긴 집을 되찾아야 한다.

5. 더럽고 과격하고 유해하고 친밀한 세계

집으로서의 몸. 하지만 몸은 도둑맞은 몸을 되찾을 수 있다는 것이 이해될 때에만 집일 수 있다. -『망명과 자긍심』

무해하고 다정하고 따뜻한 친밀함은 안정적인 것을 가진 이들에게 가능한 세계이다. 안정적인 집을 가진 사람이 단물과 이웃을 만들 수 있고, 안정적인 지장을 가진 사람이 식장 동료를 가질 수 있고, 안정적인 멘탈을 가진 사람이 친구를 만들 수 있다. 안성적인 집, 식상, 멘탈, 가족, 수석, 인종, 성병, 신체를 가진 사람들만이 무해하고 다정하고 따뜻할 수 있다. 주거가 불안정한 사람은 이웃을 만들기 어렵고, 직장이 불안정할수록 동료와 인사를 나누지 않으며, 정체성이 불안정할수록 사람들은 쉽게 떠나간다. 우리가 손에 쥔 것은 완전히 버릴 수도 떠날 수도 없지만 또 쉽게 박탈당하고 마는 지긋지긋한 친밀성이다.

상실당하고 박탈당하는 친밀성의 세계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빼앗긴 집으로서의 몸을 되찾을 수 있을까. 그것은 우리가 지긋지긋한 친밀성의 세계를 떠나서 아름답고 다정하고 따뜻하고 무해하고 친밀한 세계로 갈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오히려 이 지긋지긋한 친밀성의 세계를 더 지긋지긋하게 붙들고 상실에 애도하고 박탈에 악을 쓰며 악착같이 드러누울 때에만 가능할 것이다. 고향과 가족과 그 모든 폭력적인 친밀성이 지긋지긋해서 죽고 싶어지는 것, 그래서 고향과 가족에게서 되도록 멀리 떠나려고 하는 것, 좋은 도시로, 대학으로 옮겨가서 환영받아도 끝까지 그 아름답고 무해하고 친밀한 세계에 완전히 편입되지 못한 채로 부대끼는 자신을 느끼며 스스로가 망명자임을 자처하는 것, 지긋지긋하던 동네가 가루가 되어버린 후에도 무언가 쓸모 있고 기억할 만한 것이 남지 않았는지 동네를 하루에 세 바퀴씩 돌면서 끝까지 찾아 헤매는 것. 끝까지 우리는 아름답고 무해한 세계에 살 수 없는 지긋지긋한 존재들이라는 점을마주하는 것. 그것은 기존의 가족과 고향으로 회귀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미래를 더럽고 과격하고 유해한 친밀성으로 만들고자 하는 것이다. 누군가는 이를 '난잡한 친밀성'이자 '오염된 공동체를 만드는 것이라 불렀다.

가족을 구성할 권리는 결코 사적인 영역의 권리에 대한 요구가 아니다. 가족을 구성할 권리는 낯설고, 불온하고 문란한 신체들이 공적 영역에 출현하고, 관계 맺고, 일상과 사회를 함께 점유할 권리를 말하는 것이며, 이는 곧 불온한 정치의 현장이다.(4)

나는 원룸의 이불에 혼자 누워 나의 고독함을 해소해주고 놀아주면서도 나에게 민폐를 끼치지 않고 산뜻한 관계를 맺을 적당한 거리에 사는 유사 가족공동체를 상상했다. 그러나 그런 가족은 불가능하다. 오히려 친밀성은 그 자체로 기존의 삶의 방식을 침범하고, 층간 소음을 일으키며, 길고양이들에게 밥을 뿌려 밤에 고양이들이 싸우는 소리가 쩌렁쩌렁하게 만들고, 그리하여 나와 "관계 맺고, 일상과 사회를 함께 점유할 권리“를 당당하게 들이미는 것이다.

우리는 이성애 규범적인 가족 중심 시민 모델을 통해서 작동해온 나와 타자의 공고한 경계를 무너뜨리고 이상적인 시민/비시민의 경계를 비틀면서 '오염된 공동체를 만들어 낼 필요가 있다. ‘오염된 공동체’란 가족 상황, 인종, 장애, 성적 지향, 성별 정체성 등으로 살므이 경계를 구분하는 권력에 개입함으로써 새로운 시민적 유대의 장을 확대하는 공동체를 의미한다.(5)

이러한 오염된 공동체에서 우리는 서로를 오염시키고 민폐를 끼치는 유해한 존재들일 수밖에 없다. 팀 우프(W/OF Without Frame!)가 개설한 '나의 힘은 쓰레기통이다'라는 웹사이트의 이용 약관 제2조는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우리의 이 더러운 사이트는 제정되어야 할 의무를 버리고 교육받지 않은 불길한 저속한 야한 문제될 만한, 추하고 비참하고 속된 언어들 모두를 밀어내지 않은 채 존재하고자 하며 활발한 교류의 장이 되길 기대한다"(6)

이 웹사이트에 게재된 작품 중 「여름의 보지를 빨아줘」에서 '나'는 '다녔던 가게 대부분에서 남정네들과 성기 결합 노동을 하며, "아예 조건만남으로 번돈으로 밥 사 먹고 월세 내고 했을 때, 성병은 나와 떼려야 뗄 수 없는 병이 되면서, 사람들의 야유 속에서 자신의 몸이 폭력적이고 병균 덩어리인 몸으로 재구성됐다"고 말한다. 그는 모든 성 구매자에게 성병을 퍼뜨려 옮기고 옮기다보면 모든 사람이 성병에 걸려 비난에서 해방될 수 있으리라고 상상하는 동시에 자신이 파트너의 몸을 더럽힐지도 몰라 몸을 사린다.

그렇게 타인들이 병균 덩어리로 재구성한 몸인 '성병 캐리어'와 파트너를 감염시킬까 걱정되어 보여줄 수 없게 된 '슬픈 여자의 구멍' 사이를 오가던 그는 ”보지 냄새나 ・・・・・・ "라고 말했음에도 파트너인 하영이 상관없다고 대답하고 커닐링구스를 해주면서 도둑맞고 빼앗긴 몸을 되찾는다.

질펀하고 거칠고 더러운 사랑일지도 모른다. 하영과 나는 '더러운 몸이기에 우리의 병 따위 아무 상관 없이 비로소 섹스에 열중할 수 있게 됐다. 더럽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들이 있다. 더럽지 않았다면 이 더러움 속에서 느껴지는 오르가슴을 내가 알 턱이 있었을까? 비로소 나는 원하는 것을 정확히 알게 됐다. 내가 성병에 걸렸다고 병원에 보내기보다 그 자리에서 바지를 벗겨 보지를 빨아주는 사람을 원한다. 내가 바라왔던 것은 함께 감염될 마음으로 사랑하고, 보지를 빨아주고, 섹스하는 것이었다. 더러움을 욕망하는 여자들은 치유보다 오르가슴이 필요하다.(7)

그에게 사랑은 감염시킬까봐 두려워하고 몸을 사리는 배려가 아니라 감열될 마음으로 섹스를 하는 것이고, 세정되어야 하고 치유되어야 한다고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감염되고 오염된 더러움 그 자체가 친밀성의 조건이 되는 것이다. 우리의 친밀성은 더럽고 감염되는 것이어야 한다. 여름이 성병을 퍼뜨리는 '성병 캐리어"라는 말을 들었던 것처럼, 무해하고 친밀한 세계는 그런 오염과 감 옆이 더러움을 옮기는 '민폐를 끼치는 것이라고 규정한다. 그렇다. 민폐를 끼치고 '너무 과격한 행동을 하는 것이야말로 더럽고 유해한 친밀성의 세계이자 오염된 공동체의 첫째 조건이다.

때로 무해한 친밀성의 세계는 그런 더러움과 유해함을 심판한다. 구미의 아사히글라스 공장 앞 천막 농성장에서는 비정규직이 노동조합을 만들었다는 이유로 노동조합 결성 한 달 만에 문자 한 통으로 해고를 당한 노동자들이 만 칠 년이 넘도록 싸우고 있다. 해고 노동자들은 부당 해고와 불법 파견에 항의하면서 회사 앞 도로에 래커 스프레이로 구호들을 썼다. 그것은 아세톤으로 간단히 지워지는 스프레이였지만 검찰은 해고 노동자들에게 징역을 구형했다. 노동자들을 해고하고 '불법 파견'을 저지른 아사히글라스 대표이사에게는 징역 육개월을 구형했던 검찰이 그 '불법'에 항의한 이들에게는 더 무거운 징역 십 개월을 구형한 것이다. 재판부는 결국 해고 노동자에게 징역 사 개월, 집행유예 일년을 선고했다. 래커 스프레이 칠이 유죄인 이유로 재판부는 '시위는 적법하고 평화적인 것'이어야 한다는 점을 들었다. 모든 요구가 적법하고 평화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마땅한 아름답고 무해한 친밀성의 세계 속에서, 과격하고 시끄럽고 무언가를 뿌리고 오염시키는 모든 유해성은 즉시 죄가 된다.

아사히글라스 비정규직지회에서는 매주 수요일에 회사 정문 앞에서 문화제를 한다. 나도 되도록 자주 가려고 하지만 가는 길이 쉽지가 않다. 부산에서 김천구미역까지는 KTX를 타고 가지만 아사히글라스 공장은 공단 지역에 있어서 기차역에서 대중교통을 타고 가기가 어렵다. 결국 매번 연락을 해서 김천구미역으로 데리러 나와주십사 부탁할 수밖에 없었다. 여러 명이 연대하러 왔으면 그래도 덜 미안할 텐데, 딸랑 나 혼자 와서는 먼 거리를 마중나오게 만들려니 너무 미안해서 매번 감사하고 죄송하다고 인사를 했다. 어느 날도 내가 "아이고.... 제가 이렇게 매번 폐를 끼쳐서 우짜지요.. "하고 꾸벅거리고 있으니 서울에서 연대를 온 세종호텔지회 조합원이 꺄르르 웃었다. 아사히글라스 비정규직지회 조합원들과 마찬가지로 해고자인 그는 "우리는 남한테 민폐 끼치려고 모였는데, 그런 걸 신경을 왜 써요! 공장 앞에서 시끄럽게 하고 고함지르고 드러눕고 민폐를 더 끼쳐야 하는데!"라고 힘주어 말했다. 그렇다. 우리는 징글징글하게 민폐를 끼쳐보려고 모인 사람들이다. 고함지르고 드러눕고 노래를 부르고 구호를 외치고 발을 구르고 공장 입구 도로에 스프레이를 뿌린다.

민폐를 끼치기 시작한 이상, 우리는 이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 없다. 이전의 나는 시위 공지를 찾아보고 조용히 참석해서 맨 뒤에 앉아 구호도 외치고 노래도 부르다가 마칠 때쯤 조용히 사라지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매번 누군가에게 차를 태워달라고 민폐를 끼치기 시작하면서 조수석에 앉아서 대화를 하고. 얼굴을 익히고, 남아서 밥을 먹게 되었다. 그러다보니 그 대화가 재미있어서, 얼굴 익혀서 인사한 것이 반가워서, 같이 먹은 밥이 맛있어서, 다 같이 고함지르고 노래 부르는 것이 좋아서, 한 번 갔다 오기로 한 것이 두 번이 되고 세 번이 되었다. 도보 십 분 거리는커녕 몇 시간은 가야 하는 길이지만, 오히려 그렇게 온갖 민폐를 끼치며 다니고서야 느낄 수 있는 친밀성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렇게 이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 없어서 길거리로 나온 사람들이 있다. 시설에서, 집안에서만 일상을 보낼 것을 요구받은 사람들이 교육받고, 노동하고, 관계 맺기 위해 지하철 위로 뛰쳐나오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장애인 이동권 시위를 두고 "시민들 불편하게" 민폐를 끼친다고 말한다. 그렇게 '불편'과 '민폐'라는 말로 무해한 세계의 시민들과 유해한 세계의 장애인들을 갈라버린다. 아름답고 무해한 세계의 언어로는 '민폐'라고 하는 것을, 오염되고 유해한 세계의말로는 '권리'라고 부른다.

아름답고 다정하고 무해하고 따뜻하고 친밀한 세계 바깥에서 만나는 존재들은 다이크, 망명자, 지긋지긋한 고향을 떠나고 싶은 사람, 재개발로 마을을 잃은 사람, 한곳에 붙박이 산 역사가 도저히 가벼워지지 않는 사람, 비정규직 노동자, 성병 캐리어, 의족을 차고 쿵쿵 층간 소음을 만드는 사람, 해고 노동자, 성병을 뿌리고 래커를 뿌리는 사람들, 쓰레기봉투를 뜯고 밤에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길고양이들, 균을 옮기고 유해한 존재들이다. 이 유해한 존재들은 따뜻한 우정의 친밀성을 나누는 대신에, 아름답고 다정하고 선하고 따뜻하고 평화롭고 적법한 것으로 이루어진 세계의 법정에 서서, 너의 유해함은 유죄라고 선고하는 판사의 엄정한 시선과 참관인들의 번들거리는 눈동자들 앞에서, 지독하고 악에 받친 눈을 부릅뜨고 그 선고는 잘못되었다고 똑똑히 증언해줄 것이다.

신현아-바람의 연구자. 비정규직 강의 노동자. 산업도시 중공업 노동자 가족의 삶의 양식을 연구하고 있다.


미주
(1) 최은영, 「쇼코의 미소」, 『쇼코의 미소』, 문학동네, 2016. 9쪽. 이하 인용시 본문에 쪽수만 표시한다. 
(2) 일라이 클레어, 『망명과 자긍심-교차하는 퀴어 장애 정치학』, 전혜은·제이 옮김, 현실문화, 2020, 92쪽. 이하 인용시 본문에 쪽수만 표시한다. 
(3) 김가이, 「당감동 토박이」, 『도시의 속살』, 냥이의야옹, 2021, 20쪽. 이하 인용시 본문에 쪽수만 표기한다.
(4) 김순남, 『가족을 구성할 권리-혈연과 결혼뿐인 사회에서 새로운 유대를 상상하는 법』, 오월의봄, 2022, 104쪽.
(5) 같은 책 165쪽.
(6) W/OF, ‘Trashcan 웹사이트 이용 약관’, <My strenght is trash can: 나의 힘은 쓰레기통이다>, http://mystrenghtistrashcan.com/
(7) 여름, 「보지를 빨아줘」, 같은 곳
(8) 「법원, 아사히글라스 해고자 래커칠 시위 징역형 선고」, 뉴스민, 2022. 7. 7.
(9) 「관광객 돌아와도, 세종호텔 해고자는 길거리에,」 매일노동뉴스, 2022. 6. 30.
(10)「[투쟁결의문] 이전의 삶으로 돌아가지 않기 위해/진정선」, 비마이너, 2022. 10. 28

묻고 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