묻고 답하다
책으로 세상을 보다

아버지의 해방일지로 보는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

김선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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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작품에 관한 이야기로 말문을 열어볼까 한다. 2022년 노벨문학상수상자 발표를 접하자마자 아니 에르노가쓴 <세월>(2008)의 번역본을 주문했다. 상의 권위에 군말 없이 복종하고 있는 나 자신을 슬쩍 비웃으면서 책의 구성은 독특했다. 작가는 지나온 세월의 표지들, 어떤 물건, 사람, 장면, 사건, 말, 느낌과 감정을 수백 페이지에 걸쳐 하나하나 늘어놓았다. 대상들의 나열로 시대의 질감을 전하는 솜씨는 탁월했고, 관찰한다기보다 감응하는 화자의 목소리는 매력적이었다. 그럼에도, 아니 바로 그래서, 이 작품은 오래된 질문 하나를 다시 내 앞에 던져 놓았다. 소설이란 무엇인가? <세월>은 통상 '자전적 소설'로 분류되는 모양이다. 하지만 여기서 '소설'이라는 명칭은 빌려 입은 옷처럼 어색하다. 어쩌면 작품 속 '그녀'에게 투영된 작가의 자의식이 그 어색함을 설명해줄지 모른다. “그녀는 태어나면서부터 제2차 세계대전을 거쳐 지금까지 분리되고 조화가 깨진 그녀만의 수많은 장면들을 서사의 흐름, 자신의 삶의 이야기로 한데 모으고 싶어 한다. 개인의 것이지만 세대의 변화가 녹아 있는 삶. 그녀는 시작하는 순간, 늘 같은 문제에 부딪친다. 어떻게 역사적인 시간의 흐름과 사물들, 생각들, 관습들의 변화와이 여자의 내면의 변화를 동시에 표현할 수 있을까”(<세월>, 238쪽) <세월>은 '그녀'의 바람이 실현된 작품일까? 그 바람의 기록조차 이 책의 성취이기는 하나, 이 책 자체가 그 실현이라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세월은 시대의 변화도 개인의 변화도 담아냈지만 모든 것을 개인의 “삶의 이야기로 한데 모으”는 데는 채 미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 책의 성취는 엄밀한 의미에서 소설적 성취는 아닌 것이다. 작가도 그 점을 모르지 않는다.

여기서 말하는 ‘소설적 성취’는 이야기의 소설적 구성에 자동으로 따라오는 결과가 아니다. 문학 시장에서는, 심지어 ‘중견 작가’나 '대가'로 불리는 이들의 작품 중에서도 잘 짜인 이야기인데 “역사적인 시간의 흐름”은 실종됐거나, 관계적인 동시에 절대적인 개인의 내면(그것을 초기 루카치처럼 '영혼 현실'이라 부르든, 버지니아 울프처럼 '삶'이라 부르든)이 사라졌거나, 둘 다인 경우를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정지아의 <아버지의 해방일지>가 특별한 것은 이런 맥락에서다. 그것의 특별함은 본질적으로 소설적 성취의 특별함이지, 일견 시대착오적인 소재(‘빨치산과 그 딸의 이야기’)의 역설적 특별함도, 종종 회자되는 피상적 주제(‘빨치산에서 아버지로’, 더 소름끼치도록 진부하게 표현하면 '이데올로기에서 인간으로’)의 특별함도 아니다.
“아버지가 죽었다”로 시작하는 아버지의 해방일지는 빨치산 출신이자 “뼛속까지 사회주의자”(11쪽)였던 아버지 고상욱의 생전 모습을 머릿속에 떠올리던 딸 고아리가 여러 부류의 문상객을 접하면서 그의 삶을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보게 되는 과정을 묘사한다. 딸은 화자이기도 하다. 이야기는 화자가 화장한 아버지의 유골을 손에 쥐고 “그게 나의 아버지, 빨치산이 아닌, 빨갱이도 아닌, 나의 아버지”(265쪽)라고 말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아버지의 죽음과 서로 간에 이질적인 문상객들이라는 소설의 기본 모티프는 작가 정지아가 2008년 5월에 겪은 실제 상황에 기초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버지가 살아 있던 순간이 아니라 죽은 시점에서 이야기를 시작한 것은 “보내놓고 시작하면 이야기가 좀 더 편안하게 진행되겠다는 생각”에서였다고 작가는 말한다(<<아버지의 해방일지>, 빨치산 아버지를 온전히 이해하기까지>, <시사IN> 792호, 2022.11.23). 확실히 이런 서술 전략은 객관화의 부담을 더는 효과가 있다. 서사의 중심인 아버지를 정면으로 응시하는 것보다 그를 “보내놓고” 나서 여러 인연들과 파편적인 기억들을 통해 그의 삶을 조금씩 들춰보는 것이 그 삶을 세계 속에, 혹은 역사적 흐름 속에 자리매김하는 덜 부담스러운 방식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이렇게 덜어내진 부담은 고스란히 딸의 묘사로 옮겨간다. 아버지의 죽음 이전과 이후로 서술의 초점이 분산되는 만큼, 생전의 아버지와 사후의 아버지, 딸의 기억과 문상객들의 기억, 그리고 딸과 문상객들 하나하나의 사연을 한데 모아들이는 일인칭 화자로서의 딸의 역할은 더 중요해지고 그녀의 의식은 밀도가 높아질 수밖에 없다. 수많은 에피소드를 떠올리고 전달하는 딸의 의식은 투명한 창이 아니다. 아버지와 그 주변 인물에 관련된 모든 에피소드는 결국 아버지와 딸의 관계에 대한 딸 자신의 의식으로 수렴되는데, 그 과정은 밀어내기 받아들이기의 상반된 운동에 따른 긴장과 세밀한 떨림의 연속이다. 이 작품에서 화자인 딸의 변화하는 의식은 너무나 큰 의미를 가져서, 왜 책 제목을 '아버지의 해방일지'라고 했을까, 수십 년 전에 출간된 <빨치산의 딸>(1990)과 서로 제목을 바꾸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부질없는 생각이 들 정도다.

허황된 상상에 빠진 김에 좀 더 들어가 보자. '아버지의 해방일지'에서 '해방'은 무슨 뜻일까? 당장 민족해방, 인민해방, 계급해방, 인간해방 등등이 떠오른다. <빨치산의 딸>을 염두에 두면 그쪽이 맞을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의 해방일지>는 <빨치산의 딸>의 속편이 아니다. 전자에서 아버지나 어머니의 빨치산 시절 이야기는 단편적으로만 나오고, 주로 묘사되는 아버지의 행적은 빨치산이나 사회주의자가 아닌 사람들, 심지어 우파와 맺은 인연에 관련된다. 게다가 앞서 언급한 이유에서 이 책의 화자는 빨치산들의 활약을 기록하고 재현하는 데 온 힘을 쏟는 <빨치산의 딸>의 화자와 다르다. 그렇다면 혹시 <아버지의 해방일지>에서 아버지는 ‘해방하는’ 아버지인 것 못지않게 '해방되는' 아버지가 아닐까? 이럴 경우 그를 가둔 것은 무엇일까? 이념으로서의 사회주의? 아니면 그의 삶을 평생토록 옥죈 남한의 반공 이데올로기와 자본주의체제? 아니면 딸인 '나'의 시선?

작가의 의도가 무엇이었든, 이런 질문이 가능하도록 소설을 썼다는 것은 그가 <빨치산의 딸>을 쓸 때와는 전혀 다른 자세로 창작에 임했음을 암시한다. 출간된 지 한 달 만에 판매금지 조치를 당하고 세상이 조금 바뀐 2005년에 두 권으로 복간된 <빨치산의 딸>은 6·25전쟁 이전에 입산한 '구빨치'이자 조선노동당 전남도당 조직부부장이었던 정지아의 아버지 정운창과 남부군 정치지도원이었던 어머니 이옥남을 비롯해 남부의 산과 마을을 무대로 '계급해방'과 ‘통일조국 건설’을 위한 무장투쟁에 나선 빨치산들의 삶과 죽음을 생생하게 재현해낸다. 산에서 버티고 버티다 죽은 빨치산들은 말할 것도 없고, 살아남아서 자신들의 이야기를 들려준 이들, 그리고 그 이야기의 조각들을 하나로 엮어 후세에 전한 정지아 같은 작가의 심정을 나로서는 다 헤아릴 길이 없다. 그러나 <빨치산의 딸>이 “소설이 아닌 실록”이라는 정지아의 항변(<소설이 아니라니까요 실록이라구요!>, <한겨레>, 2022.12.2)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주관이 배제된 순전히 사실적인 기록은 아니다. 한껏 고양된 어조부터 그렇다. 가령 “해방을 갈구하는 인민대중의 힘찬 함성처럼 인공기는 가을바람을 잔뜩 안고 마음껏 밝은 하늘을 휘저었다”(1권, 113쪽)는 문장은 화자가 여수 14 연대의 봉기에 고무된 주인공에게 목소리를 빌려준 경우이니 "실록", 적어도 “소설적 형식을 띤 역사서”(복간판 작가 서문, 1권, 5쪽)라는 범주에서 크게 벗어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처럼 인물의 고양된 의식에 밀착된 어조가 책 전체에 일반화되어 있다면 어떨까? “목숨을 구걸하진 않지만 살아 있는 한 최선을 다하는 것이바로 진정한 용기였다”(2권 82쪽)는 도덕적 서술은 그 타당성을 떠나서 극화된, 즉 소설적인 진술로 보기는 어렵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실록으로서의 가치도 덜하다고 할 수 있다.

요컨대 <빨치산의 딸>의 화자는 1권 맨 앞에 ‘프롤로그’로 따로 빼놓은 부분을 제외하면 빨치산 이야기의 충실하고 투명한 기록자이자 전달자를 자처하지만, 그 때문에 오히려 재현 대상의 주관에 갇히고 결과적으로 자기 이야기의 가치를 훼손하게 된다. (이 책의 기록적·문학적 가치를 통째로 부정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역사를 다루는 책이 소설이라서 문제인 것이 아니라 덜 소설적이어서 문제인 것이다. 대상에 대한 적절한 거리가 확보되지 않은 결과 인물은 종종 신비화되거나 영웅화되고(특히 박종하의 경우), 투쟁조직의 총동원체제에 적합한, 그러나 매우 제한된 정서적 경험(동지애, 헌신, 용기, 절제 등)이 다른 경험들을 압도하는 가운데 전경화된다. 작가 자신은 이 작품이 처음 출간되고 15년의 세월이 흐른 뒤에 그것을 돌아보면서 거기에 “혁명적 감상주의에 빠진 부분도 있었”다고 고백한다(복간판 작가 서문, 1권, 5쪽), <빨치산의 딸>의 혁명적 감상주의는 작가 개인에게 속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책이 되살려놓은 시대(1940년대 말에서 50년대 초까지)에 속한 것이자 또한 그 되살림의 작업이 진행된 시대(1980년대 중후반에서 1990년까지)에 속한 것이다. (1990년의 한국 사회는 1989년 11월 9일에 발생한 베를린 장벽 붕괴의 여파가 본격적으로 미치기 이전의 상태였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 특정 시대들이 돌아오진 않겠지만 혁명적 감상주의는 돌아올 수 있다.

<아버지의 해방일지>가 혁명적 감상주의와 결별했음은 확실하다. 감상적 숭고함이나 비장함을 대신해 들어선 것은 유머와 중첩된 시선, 그리고 반성적 의식이다.

화자의 아버지는 허무하게도 “전봇대에 머리를 박고”(7쪽) 죽는다. 시도 때도 없이, 진지하고 근엄하게 유물론이나 사회주의, 민중을 들먹이던 그다. 아버지는 “사회주의자답게 의식만 앞선 농부”(8쪽)였다. 감옥살이를 마치고 깡촌인 고향에서 초짜 농부가 된 그는 자기가 탐독하는 관제농민잡지 <새농민>이 일러주는 대로 작업을 하다 번번이 농사를 망친다. 어머니는 그가 “문자농사”(8쪽)를 짓는다며 핀잔을 주곤 한다. 웃음을 유발하는 것은 아버지의 형상만이 아니다. 화자는 국민학교 시절 자기 집을 뻔질나게 드나들던 선배가 대학에 와서까지 연락을 해오자 첫사랑에 집착한다고 생각하고 그를 피해 다니는데, 알고 보니 어린 시절에 그가 관심을 두었던 대상은 화자의 어머니였다. "이런 젠장. (...중략...) 내가 아니라 어머니였다니!"(59쪽)

작가는 이 소설을 쓸 때 "웃기게 쓰려고 노력을 많이 했다"(<<아버지의 해방일지>, 빨치산 아버지를 온전히 이해하기까지>)는 점을 숨기지 않는다. 그는 아버지의 죽음 이후 "조금씩 가벼워지기 시작했다”(<소설이 아니라니까요 실록이라구요!>)고 한다. 이 '가벼움'은 아버지의 과거로부터, 거기서 이어지는 도덕적 요구로부터, 그리고 가족으로부터 더 넓고 다채로운 일상의 세계로 나아가는 발걸음의 가벼움일 것이다. 그것은 더 많은 것의 탐구와 발견을 의미할 테니, 독자로서는 반가운 일이다. 다만 너무 진지해지지 않으려는 노력, 웃기게 쓰려는 노력이 화자의 말보다 작중 상황으로 더 녹아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아버지의 해방일지>에서는 ‘웃기는 상황’을 웃기는 말로 표현하려는 의도가 과하게 느껴지는 대목이 더러 눈에 띈다.

이 소설에서 웃음이 반가운 것은 화자의 아버지처럼 “진지 일색”(7쪽)인 사람을 똑같이 진지 일색의 어조로 묘사할 때와 달리 그 웃음이 대상을 화자(그리고 우리)에게서 떨어트려 놓는 동시에 가까이 끌어당기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그 웃음은 대상을 복합적인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는 여유로운 공간을 창조한다. 모든 종류의 웃음이 그런 것은 물론 아니다. 어떤 웃음은 그저 대상을 밀어내고 심지어 난도질한다. 그러나 정지아의 웃음은 찌르고 베는 웃음, 냉소적인 웃음이 아니다. 그의 웃음은 살벌하지 않다. (다음날 배은망덕하게도 마늘을 훔쳐갈) 낯선 방물장수 여인을 집에서 재우기를 꺼려하는 아내에게 "저이가 바로 자네가 목숨 걸고 지킬라했던 민중이여, 민중!"(12쪽)이라고 호통치는 아버지는 우스꽝스럽지만, 그 때문에 빨치산 시절을 포함한 그의 삶 전체가 우스꽝스러운 것으로 치부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아버지의 우스꽝스러움은 빨치산이나 사회주의자에 대한 고정관념으로부터 그를 해방시키고, 그럼으로써 화자와 독자가 그의 진면목에 한 걸음 더 다가설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다.

사회주의자 아버지를 향한 화자의 삐딱한 시선은 그를 이해하고자 하는 애정 어린 시선과 중첩돼 있다. 중첩된 시선은 구조적이라기보다 교호적(交互的)으로 작동한다. 화자의 의식은 이쪽에서 저쪽으로, 또다시 이쪽으로 쏠리면서 아버지에 대한 이해를 확장시켜 가는 것이다. 이 확장의 과정은 동시에 반성의 과정이다.

여전히 혁명가처럼 생각하고 말하는 '전직 빨치산'부모 앞에서 연애, 옷차림, 화장품 같은 이야기를 꺼내는 것을 부끄러운 일로 여기고 자란 화자는 그들의 엄숙주의에 거리를 두게 된 지금 “어쩐지 좀 억울”하다고 느낀다(25쪽). "그 틈에 끼어 나는 혁명가도 아닌 나는 신념도 없는 나는, 일상의 평범한 대화를 맛보지 못한 채 어른이 되고 늙어가는 중이었다. 혁명가도 아니고 신념도 없는 주제에 진지하지 않은 것은 참지 못하는 꼰대같은 어른으로 그러니까 아버지, 나는 억울하다니까요!"(123쪽). 그러니 진지함을 웃음거리로 만들려는 충동은 아버지에 대한 거리감의 표현인 동시에 자의식의 발현인 셈이다. 같은 충동은 때로 신념이 강한 자들과 그들의 동지의식에 대한 더 신랄한 논평으로 변형된다. 낯선 사람을 심하게 경계하는 어머니가 장례식장의 황사장이 자기 아버지도 여순 직후에 총 맞고 죽었다고 말하자 사내의 손을 덥석 잡고 토닥이는 것에 화자는 당혹스러움을 느낀다. "나는 저 느닷없는 친밀감과 포용이 퍼스트 클래스에 탄 돈 많은 자들끼리의 유대감과 별반 다르게 느껴지지 않았다"(23쪽) 빨치산 출신들이 진행하는 추모제를 바라보는 화자의 시선도 곱지 않다. "조문실을 가득 메운 늙은 혁명전사들 주변으로 이상한 결계 같은 게 드리운 듯했다. 내가 조문객이었다 해도 쉽사리 발을 디딜 수 없을 것 같았다. 접객실까지 흘러나오는 결의에 찬 그들의 말투도 통일을 목전에 둔 듯한 흥분도 나는 불편했다"(146~47쪽). 빨치산 활동을 하다 위장 자수한 아버지와 그 사실을 모르는 이 '동지들'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금이 있고, 이 점은 그들을 문상객으로 맞는 화자를 더 불편하게 한다. 그러나 교회에 푹 빠진 사촌이나 아버지나 “똑같은 종류의 사람”(115쪽)이라고 일갈하는 데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전직 빨치산들에 대한 화자의 감정은 “뼛속까지 사회주의자”인 아버지를 떠올릴 때의 감정과 본질적으로 통한다. 아버지나 그 동지들의 탓만은 아닐지라도, 일상적 현실에서 유리된 신념과 그 신념의 공동체에 화자는 동질감을 느끼지 못한다. 사회주의자 아버지에게서 떨어져 나온 화자의 의식은 그러나 다시 아버지에게로 향한다. 그 반전에는 아버지를 '사회주의자 아버지'로 박제한 것은 다름 아닌 자신이었다는 깨달음이 있다. 화자는 여러 계기를 거쳐 그 깨달음에 도달한다. 흰 국화에 둘러싸인 아버지의 영정을 보면서 “살아생전 꽃 따위 쳐다보지도 않았던 아버지였다”고 생각하지만, 불현듯 어떤 장면들이 떠오른다. "아니다, 생각해보니 가을 녘 아버지 지게에는 다래나 으름 말고도 빨갛게 익은 맹감이 서너가지 꽂혀 있곤 했다. 연자줏빛 들국화 몇송이가 아버지 겨드랑이 부근에서 수줍게 고개를 까닥인 때도 있었다"(24쪽). 이후 화자는 자기 머릿속의 '사회주의자 아버지'와는 다른 아버지의 갖가지 모습을 기억해내거나, 아니면 조문객들의 사연을 통해 구성해낸다. 직업군인 경력에 조선일보만 보는 박한우와 매일 투닥거리면서도 "그래도 사람은갸가 젤 낫아야"(47쪽)라며 그와 말년을 함께 했던 아버지, 어린 딸을 무릎에 앉히고서도 하동댁의 엉덩이를 토닥거리는, "뻔한 남자들과 다르지 않은 뻔한 행동"(66쪽)을 했던 아버지, 베트남 출신을 엄마로 둔 아이와 ‘담배 친구’인 아버지, 빨치산 시절, 보급투쟁을 나갔다 발견한 나이 어린 순경을 살려 보낸 아버지 등등. "사회주의자 아닌 아버지를 나는 알지 못한다"(24쪽)고 했던 화자는 작품 말미에 다른 이야기를 한다. "사람에게도 천 개의 얼굴이 있다. 나는 아버지의 몇 개의 얼굴을 보았을까? 내 평생 알아온 얼굴보다 장례식장에서 알게 된 얼굴이 더 많은 것도 같았다"(249쪽).

그런데 이 소설이 '사회주의자 아버지'의 주위를 맴돌던 딸의 의식이 마침내 그냥 '아버지', 다시 말해 '인간 고상욱'을 복원하는 이야기라면, 사회주의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빨치산의 역사는? 이 소설에서는 모든 시도, 모든 판단, 모든 가치의 종착지는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는가? 얼핏 그런 것도 같다. “아버지에게는 사상과 사람이 다른 모양이었다”(47쪽)는 화자의 말에서, “긍게 사람이제”(138쪽)라는 아버지의 입에 붙은 말에서, 또 현실의 아버지가 이데올로기를 “인간과 구분해서 바라볼 줄 알았”고 “아버지한테 더 중요한 것은 인간이었던 게 아닌가” 싶다는 작가의 말(<아버지가 죽고 아버지를 깨달은 빨치산의 딸... 정지아 '아버지의 해방일지'>, <경향신문>, 2022.9.2.)에서 우리는 '이데올로기에서 인간으로'라는 이데올로기 자체만큼이나 케케묵고 그 자체로 이데올로기적 의미를 내포한 주제를 읽어낼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화자와 그 아버지와 작가의 저 말들은 이데올로기, 즉 사회주의나 빨치산들의 신념(물론 이 둘이 똑같은 것은 아니다)을 악으로 치부하는 발상과 무관하다. 소설에서 인간애를 보여주는 아버지의 행동 역시 그의 사회주의적 신념을 거스른다기보다 오히려 사회주의나 빨치산 투쟁의 출발점, 그 본뜻을 상기시키는 데 가깝다. 적어도 화자의 아버지에게서 사람을 품는 마음과 사회주의는 별개가 아니었을 터이다. 역사 속의 사회주의자들이나 빨치산들이 다 그 아버지 같지는 않았을 테고, 사회주의가 그의 '천 개의 얼굴' 중 하나였다면 그는 사회주의의 '천 개의 얼굴' 중 하나에 불과하겠지만.

이 작품에서 서사의 기본 줄기는 분명 아버지의 재발견이다. 그러나 그 재발견을 '인간'의 발견으로 환원하는 것은 지나치게 단순하다. 아버지의 삶에 등장했던 사회주의, 빨치산 투쟁의 경험과 평생 간직한 사회주의적 신념을 제쳐두고 아버지를 온전히 이해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나는 이 소설이, 사회주의자 아버지의 시대착오적 진지함을 조소하면서도 그의 본심과 본성에 점점 더 가까이 다가서는 딸의 시선을 통해서 작가의 아버지뿐 아니라 그가 속했던 지나간 시절을 현재의 삶 속에다시 자리매김하는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소설은 과거와 현재의 관계를 그리고 그 관계의 변화에 따라 함께 변화하는 역사적 정동을 탐문한다. 너무 진지해서 우스꽝스러웠던 아버지는 죽었고, 그의 빨치산 경험은 과거로 사라졌다. 성인이 된 화자는 굳이 따지자면 현재에 속한 사람이다. 그러나 비장한 표정의 전직 빨치산들을 불편해하는 만큼이나 (마음 한구석에서 그 불편함이 또 불편하긴 하지만) 진지하지 않은 것도 본능적으로 불편해할 만큼 여전히 아버지의 딸로 사는 사람이다. 과거와 현재 사이에 낀 이 어중간함을 화자는 억울해하지만, 이데올로기적으로 봉인된 과거를 수없이 다양한 인연이 얽히고설키는 삶의 현장으로 경험하도록 이끄는 것, 그러면서도 역사적 단절의 감각을 내내 유지할 수 있게 하는 것은 다름 아닌 그 어중간함이다. 화자가 손에서 따스해져 오는 아버지의 유골을 마을 여기저기에 뿌리면서 "어디로 갔든 아버지의 유골은 어딘가 내려앉아 무언가의 거름이 될 것이었다"(258쪽)라고 속으로 말하는 장면은 조금 너무 '문학적'이기는 하나, 그럼에도 과거를 대하는 화자의 복합적 감정을 응축해서 전달한다. 그의 의식과 자의식 속에서 과거는 현재로 스며들고 현재는 과거의 온기에 반응한다. 역사적 시간의 흐름과 개인 내면의 변화를 완전한 하나의 서사로 녹여낸 작가에게 경의를 표한다.

김성호
영문학을 전공했으며 근래에는 주로 정동 이론과 감상주의를 연구하고 있다. 논문으로 <정동적 미메시스-정동순환의 매체로서의 소설>(2020) 등이, 옮긴 책으로 데이비드 하비의 <자본주의와 경제적 이성의 광기>(2019), J. M. 쿳시의 <엘리자베스 코스텔로>(2022)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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