묻고 답하다
책으로 세상을 보다

야생 붓꽃으로 보는 우리의 이야기

이기성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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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쓰는 일을 하면서도 다른 시인들의 작품을 읽고 글을 쓰는 일은 쉽지 않다. 타인의 작품을 대할 때마다 흥분과 불안이 교차하는 것은 수많은 실패와 오독의 가능성 때문일 것이다. 간혹 오독이 인도하는 낯선 길을 따라가서 새로운 언어를 마주하게 될 것이라는 기대에 부풀기도 하지만, 루이즈 글릭의 시를 읽는 일은 번역이라는 언어의 장벽을 한 겹 더 넘어서 가야하는 길이기에 더욱 불안하였다. 처음 본 마을의 풍광을 신기하게 두리번거리며 걷는 아이처럼, 낯선 시인의 언어에서 떠올린 마음의 풍경들을 적는다.

1. '언어의 정원'에서

흔히 시인의 말을 ‘사물의 말’이라고 한다. 시를 쓰는 일은 '나'를 중심으로 구축된 삶의 질서와 관습에서 벗어나 타인의 편에서 타인의 삶을 이해하는 작업이다. 그것은 자신의 목소리를 사물에게 양도함으로써 ‘사물의 편’에 서는 일이다. 따라서 시인의 목소리가 발화되는 순간 수만의다른 목소리들이 함께 발화된다. 시인들을 ‘천 개의 혀’를 가진 존재로 비유하는 것은 이러한 까닭일 것이다. 루이즈 클릭의 시집 <야생 붓꽃>에서 우리는 다양한 언어가 뒤섞여 공존하는 시적 공간을 만나게 된다.

천 가지 목소리들로 뒤얽힌
한여름의 고요한 대기

각각의 목소리가 외치네.
어떤 필요, 어떤 절대를

-한여름 중

시인은 ‘한여름의 고요한 대기’를 채우고 있는 무수한 목소리'들'이 존재한다고 말한다. 세계는 하나의 절대적인 목소리에 지배되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개별들이 ‘뒤얽힌’ 공간이라는 것이다. 시인은 현실 세계 이면에서 들려오는 이 '목소리들'에 감응하면서, 각각의 존재들에게 제 목소리를 되돌려주려 한다. 일찍이 랭보가 시인을 '보는 자'라고 명명한 바 있지만, 글의 경우 시인은 '보는 자'이며 동시에 '듣는 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녀의 시는 대기 중에 잠재된 목소리들을 분별하여 듣는 동시에 그 언어에 감응하는 다른 목소리이다.

네게 말하네. 나 다시 말할 수 있을 거라고: 망각에서
돌아오는 것은 무엇이든
목소리를 찾으러 돌아오는 거라고.

-‘야생 붓꽃’ 중

목소리를 가진다는 것은 무엇일까? 모든 존재는 목소리를 통해서 자신을 표현하고 세계로부터 인정받는다. 그러니 목소리를 빼앗긴 존재들은 '입이 없는 존재들 즉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지 못하는 죽은 자들이라 할 수 있다. 이 시에서 시인은 죽음으로부터 '돌아오는 이들이 자신의'목소리를 찾으러 돌아오는 것'이라고 말한다. 글릭의 시는 이렇게 현실에서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목소리를 대신 발화하는 '복화술사'의 언어1)로 쓰여진다.

혹시 내게 목소리가 주어진다면, 내 목소리가
슬픔으로 가득 차게 될 거라는 걸 내 문장들이
비명처럼 함께 엮이리라는 것도
내가 슬픔을 느낀다는 것조차 나는 몰랐어, 
그 말이 도착하기 전까지는 비가
내게서 흐르는 걸 느끼기 전에는

-‘연령초’ 중

‘말이 내게 도착하는 순간’ 존재는 스스로를 자각하기 시작한다. 마치비가 사물들을 깨우며 그 속으로 스며 들어가듯이 말은 존재에게 목소리를 주고, 그 목소리를 통해서 존재는 자신의 '슬픔'을 느끼게 된다. 목소리는 '내 몸은/실은 쪼개진 나무 몸통에 동그마니 웅크려‘(아침 기도)에서 보듯, 한껏 웅크린 자세로 멈춰 있는 존재를 깨워 자신의 몸속에 흐르는 빗물을 느끼게 만든다. 이렇듯 ’말‘을 통해서 자신을 표현하고, 그 표현이 가능할 때야 비로소 추상적으로 존재하던 슬픔은 '나의 슬픔'이 되는 것이다. 목소리는 '슬픔'이라는 생의 감각을 환기함으로써 존재를 한없는 슬픔과 우울의 상태에서 벗어나게 한다.

글릭의 시 쓰기는 사물화된 존재에 스며들어 그들의 목소리를 깨워 내고 있다. 시집 <야생 붓꽃>은 다채로운 존재들이 어울려 만들어내는 '언어의 정원'이라 할 수 있다. 그녀의 정원을 채운 사물들의 목소리는 때로는 인간에게 향하기도 하고, 절대자인 신에게 혹은 시인 자신을 향한 전언으로 들리기도 한다. 이러한 화자의 ‘모호함’은 글릭의 시가 다층적 언어들의 곁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글의 시를 읽는 것은 이 '겹의 목소리를 천천히 음미하면서, 때로는 독백으로, 때로는 대화로 퍼져나가는 공기의 파장을 '듣는' 일이다.

2. 들판을 흔드는 바람

글릭은 시적 언어를 통해 침묵하는 세계에 목소리를 부여한다. 아니다. 차라리 세계가 시인의 목소리를 빌려서 자신의 말을 시작한다고 해야 할 것이다. 시인 자신의 목소리 또한 이 거대한 화음의 일부를 이룬다. 시인은 자신의 시에 출현한 대상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세계에서 어떤 '특권'도 요구하지 말아야 한다고 목소리의 주체가 된 존재는 고정된 세계에 머물지 않고 자신을 '확장한 어떤 것'으로 옮겨가야 한다는 것이다.

빛-
넌 절대 받아들이려 하지 않겠지
네가 바삐 이름 붙이는 사물들
무심한 내 목소리 같은 목소리를

-‘맑은 아침’ 중

이 시에서 '빛'은 사물에 이름을 붙이고 질서를 부여하는 절대자를 상징하는 것처럼 보인다. 세계는 '빛의 호명에 복종하고, 그가 이름 붙이는대로 구성되는 '정원'과도 같다. 그러나 글릭은 신이 붙여주는 이름을 거부하는 존재들이 있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그리고 세계의 질서에 '무심한 낯선 존재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이 '이름 없는 자들이 어떻게 자신의 목소리를 찾아가는지를 다음의 시에서 볼 수 있다.

살아 있는 것들이 모두 똑같은 정도로
빛을 필요로 하지는 않아요. 우리 중 일부는
우리 자신의 빛을 만들어요. 아무도 다닐 수 없는
좁은 길 같은 은빛 이파리, 어둠 속
기다란 단풍나무들 아래 얕은 은빛 호수

-‘광대수염꽃’중

모든 존재가 살아가기 위해서는 빛이 필요하다. 절대자의 빛은 사물을 고정된 정체성에 붙박아 놓는다는 점에서 폭력적이다. 그러나 시인은 '태양은 나를 거의 건드리지 않아요'에서처럼 태양의 빛이 닿지 않는 '좁은 길'에서 숨은 채 자신의 빛을 잃지 않는 존재들이 있다고 말한다. 그들은 태양을 반사하여 황금빛으로 빛나는 대신에 자신만의 고유한 빛을 만들고 있다. '태양을 완벽히 가린' 좁고 어두운 곳에 존재하는 그들은 역설적으로 자신만의 내밀한 빛을 가지게 된다. '단풍나무들 아래 숨겨진 '은빛 호수'처럼.

글릭은 절대자가 부여한 빛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빛'을 스스로 만들어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나 자신을 이미지들에/한정짓는 일, 계속 못하겠어'와 같이 고정된 이미지에 붙박힌 존재로부터의 해방을 소망한다. 그것은 '정원'으로 상징되는 현실을 벗어나는 것이기에 쉽지 않은'모험'이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이 글이 스스로의 목소리로 자신을 표현하는행위를 강조하고 있다는 점이다. '마치 네가 너 스스로를 표현하길/원하는 새로운 어떤 것인 듯"(겨울의 끝)처럼, '표현'은 존재를 '새로운 어떤 것'으로 변화시키는 행위이다. 그것은 기존의 언어로 구축된 정원의 문법을거부하고 새로운 언어를 창조하려는 욕망과 다르지 않다. 세계에 얽매이지 않은 이 새로운 목소리는 부드러운 바람처럼 타자에 스며든다.

그렇다 해도 네 목소리는 언제나 내게 닿지
또 나는 한결같이 대답하지.
내 분노가 지나가 내 부드러움
네게 분명히 보일 테지.
여름 저녁의 산들바람 속에서
또 너 자신의 응답이 된
말들 속에서

-‘저녁 노을’ 중

나에게 닿아온 너의 목소리는 세상을 향해 퍼져간다. 모든 경계를 부드럽게 흘러가는 이 바람의 언어가 나에게 닿아오고 나는 거기에 응답한다. 이렇듯 목소리는 외부에서 대답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너 자신의 응답이 된 말’ 즉 자신의 내부에서 울려 나오는 응답이다. 이러한 대화적 관계 속에서 사물과 인간 혹은 주체와 타자의 경계가 지워진다. '저녁 노을'이 모든 사물의 경계들을 지우며 어둠으로 물들이듯이, 세상의 모든 목소리들은 서로 스며들고 반향하면서 새로운 존재로 변화하는 것이다.

너희들삶은 새가 나는 것처럼
고요 속에서 시작하고 끝이 나지一
하얀 자작나무에서부터 사과나무까지
아치처럼 이렇게 메아리치는 형식으로
시작하고 끝이 나지

-‘물러가는 바람’ 중

시인은 우리의 '삶'이 스스로에게 던지는 고요한 물음이며 응답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고요함 속을 날아가는 새의 이미지를 보여준다. 이 투명한 비상은 고요한 대기에 아무런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그러나 시의 밖으로 새가 빠져나간 뒤에도 그 비상의 여운은 무언가를 남겨 놓는다. 그것은 두 그루의 나무 사이를 메아리치는 어떤 '목소리'의 존재이다. 그 목소리는 새의 비상이 품고 있는 필연적인 종말의 예감과 닿아 있다. '자작나무'의 흰빛과 '사과나무'의 붉은빛 사이를 메아리치는 목소리, 그것은 존재의 가장 깊은 곳에서 들려오는 '야생의 목소리이다.

3. 어떤 애도에 대하여

글릭은 잘 가꾸어진 '정원'이 아니라 들판을 가로지르는 바람의 언어에 주목한다. 정원은 가꾸는 이의 의지에 따라서 조성되고 배치되는 곳이다. 신은 자신의 말에 복종하지 않는 인간을 추방하고 처벌함으로써 최초의 정원을 영원히 닫아버리지 않았던가. 글의 시는 차별과 배제의 원리로 구축된 정원의 세계에 대한 부정의 상상력을 보여준다.

살아남기 위해서 당신의 찬사는
필요 없습니다. 내가 여기 먼저 있었으니,
당신이 여기 있기 전부터, 당신이
정원을 만들기 전부터 말이지요.
그리고 나는 태양과 달만 남게 되어도
또 바다, 그리고 이 드넓은 들판만 있어도
여기 있을 것입니다

내가 그 들판을 만들 것입니다.

-‘개기장품’ 중

글릭이 이 시에서 보여주는 것은 어떠한 질서에도 순치되지 않는 야생의 언어로 가득한 풀들의 세계이다. 주목과 찬사를 받지 못하고 중심에서 밀려난 '풀'의 목소리는 '고통받는 주인님‘(’제비꽃‘), 즉 절대자의 언어에 포획되지 않겠다는 단호한 의지를 보여준다. 정원을 만들기 전부터 자신이 존재했다는 말은 자신의 존엄과 정체성을 스스로 지켜나가겠다는 자기선언으로 읽힌다.

글릭이 보여주는 시의 들판은 수천 개의 목소리로 가득하다. 그곳에서 다채로운 목소리는 서로 엮이고 연결된다. '우리를 서로 묶어주는 그쉼 없는 선으로'(‘겨울의 끝’)에서처럼 언어 속에서 타인과 소통하는 언어가 탄생한다.

당신은 모르실 거예요, 우리가 얼마나
끔찍한 공포를 견디고 있는지, 반점 돋은 이파리.
팔월. 이른 어둠 속에서 떨어지는
단풍나무 붉은 이파리들: 나는
이 덩굴들에 책임이 있는 걸요.

-‘저녁 기도’ 중

시인은 세계가 '끔찍한 공포로 가득 차 있으며, 공포 속에서 병든 이 파리처럼 속절없이 스러지는 존재들에 대한 '책임'이 우리에게 있다고 말한다. 책임을 느낀다는 것은 '당신의 슬픔을 아는 일이다. 그것은 타인의 슬픔과 고통을 함께 애도하는 마음이다. 그런데 '정원'의 세계에서는 죽음이나 상실에 대해서도 순수하게 애도를 하지 못하고 타자에게 책임을 돌린다. 시인은 그것을 '애도하면서 동시에 탓하는 일'이라고 표현하는데, 이것은 타자를 추방하고 타자의 책임으로 돌림으로써 스스로를 보존하려는 논리를 말한다.

글릭이 말하는 진정한 '애도의 상상‘(’구월의 황혼‘)이란 '침묵과 어둠을/사랑하는 법을 사람은 배워야 해’(자장가)처럼 침묵과 어둠을 사랑의 언어로 바꾸는 것이다. '이 한 번의 여름에 우리는 영원으로 들어갔어요./그 찬란한 빛을 풀어 주려고 나를 파묻는/당신 두 손을 나 느꼈어요.(흰 백합)처럼, 타자의 슬픔에 공감하는 애도의 상상을 통해서 죽음이 ‘찬란한 빛’으로 바뀐다.

글릭의 시의 어떤 구절들에서 느껴지는 단호한 힘은 이러한 사랑의 언어와 상통하는 것처럼 보인다. 가령 '어떤 것에도 굴하지 않고/이 유약함들 물리칠 준비를 하는/임박한 힘을 믿는 아이의/열렬한 확신과 함께, 때는 바로/꽃 피기 전, 그 통달의 시대‘(입구)와 같은 구절에서, 그녀는 이러한 사랑의 힘을 믿어보자고 말한다. 한여름이 시작되기 직전의 세계에 응축된 열기와 힘, 그 열렬한 확신은 사랑의 언어로 점화된다.

너희가 거기 독립적인 존재들처럼
앉아 있는 걸 보는 게 얼마만큼 나를
기쁘게 했는지, 내가 너희에게 준 연필을 쥐고서
여름 아침이 글쓰기로 사라질 때까지
너희가 열린 창가에서 꿈꾸고 있는 걸 보는 것이

-‘물러가는 빛’, 중

세계의 모든 사물들은 자신의 언어로 글을 쓰고 있다. 시인은 '너희‘가 독립적인 존재가 되어 꿈을 꾸는 존재로 변화하는 것을 지켜보고 있다. 사물들이 스스로를 확장하는 글쓰기의 주체가 되는 동안, 시인 역시 자신의 시 쓰기를 완성한다. '열린 창가'가 보여주듯 창문은 세계를 향해 열려 있고, 꿈꾸는 존재들은 세계 속으로 스며든다. 그리하여 '여름 아침'은 무수한 사물의 목소리들로 가득 찬 완벽한 '침묵'으로 채워진다. 글럭의 시는 이 무한한 가능성으로 우리를 데려간다. 그리고 연필을 쥐여 준다.

그리고,
어떤 애도와 침묵에 대해서 더 말할 것이 있다.
그 방은 틀림없이 아직도 있을 게다. 사층에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작은 발코니가 있는 방.
사각형의 하얀 방 맨 위 시트가 젖혀져
침대 가장자리에 걸쳐져 있고,
그것은 무(無)로, 실제로 녹아들지 않았다.
열린 창문을 통해 바다 공기, 요오드 냄새

이른 아침 : 물에서 돌아온 작은 소년을 부르는 남자.
그 작은 소년은 이제 스무살이 되었겠지.
너의 얼굴 주변에 축축한 머리카락 흩날려, 적갈색 줄무늬로,
모슬린 천, 은빛 반짝임, 하얀 작약 가득 꽂힌 묵직한 단지.

-‘프레스크 아일’ 중

나는 이 아름다운 시편에서 우리를 덮쳐왔던 슬픔의 언어를 다시 듣는다. 텅 빈 방의 고요함은 거대한 상실의 기운으로 채워져 있다. 시트가 젖혀져 침대 가장자리에 걸쳐서 이 침대 위에 누웠던 누군가의 흔적이 아직 사라지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열린 창문으로 들어오는 바닷바람의 냄새에는 살아있는 냄새들, 충만한 생의 감각을 환기하고 있다.

방안을 헤매던 나의 시선은 이 투명한 방 안의 공기를 한쪽에서 지탱하는 '묵직한 단지'에 붙박힌다. 그것은 생생한 이미지들이 어울려 선명하게 빚어내는 삶의 풍경 너머로 나를 자꾸 데려간다. 침대의 주인이었을 소년은 돌아오지 못했다. 살아 있었다면 이제 스무 살이 되었을 소년은, 스무 살이 되지 못했다. 얼굴 주변의 축축한 머리카락, 얼굴을 덮은 모슬린 천의 반짝임, 적갈색의 줄무늬는 선명하고 생생하게 삶과 죽음을 증거하고 있다. 단지유골함의 내부에 가득한 어둠의 무게는 흰 작약의 아름다움을 더욱 덧없는 것처럼 보이게 한다. 단지에 '가득' 꽂힌 꽃으로 누군가의 측량할 수 없는 슬픔의 크기를 감히 짐작해 볼 수 있을까.

나는 흰 모슬린 천 위의 작은 얼룩을 본다. 당신의 얼굴을 적시면서 천천히 번져가던 슬픔. 그것은 낯설지 않다.

이기성
1998년 <문학과사회>에 ‘지하도 입구에서’ 외 3편을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불쑥 내민 손>, <타일의 모든 것>. <채식주의자의 식탁>, <사라진 재의 아이>, 평론집 <우리 유쾌한 사전꾼들>, <백지 위의 손> 등이 있다. 현대문학상, 형평문학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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