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 조사실에서 국회의원회관까지, 50년을 돌아온 ‘11·22 사건’
지난 11월 22일 오후, 서울 영등포구 국회의원회관 대회의실 무대 위에서 현악과 피아노 선율이 천천히 쌓였다. 객석 맨 앞줄에는 흰 머리를 묶은 노인들이 곧게 앉아 있었다. 명찰에는 대학 이름이 아니라 “피해자”, “유가족” 같은 단어가 적혀 있었다. 20대에 끌려가 국가보안법 위반자로 낙인 찍힌 사람들이 70~80대가 된 얼굴로 마이크를 주고받았다. 국회의원회관 밝은 조명 아래, 이들의 청춘은 여전히 1970년대 중앙정보부 지하 조사실 한구석에 묶여 있는 듯했다.
1975년 11월 22일, 중앙정보부 대공수사국장이던 김기춘은 기자들 앞에 서서 “북괴의 지령에 따라 국내 대학에 침투한 간첩단을 검거했다”고 발표했다. 이른바 ‘11·22 사건’이다. 재일동포 유학생 13명을 포함해 국내 대학생 21명이 한꺼번에 “간첩단”으로 포장됐다. 이들은 대학 내 서클 활동과 공부 모임, 유학생 네트워크를 통해 북한과 연계했다는 혐의를 떠안았고, 재판은 빠르게 진행됐다. 상당수가 사형과 무기징역, 장기 징역형을 선고받으며 교도소로 끌려갔다.
나중에 드러난 사실은 정반대였다. 이 사건은 반공 분위기를 극대화하고 유신 체제를 정당화하려는 정권 의도 속에서 기획한 공안 조작 사건이었다. 중앙정보부 수사관들은 학생들을 장기간 구금하고 고문했고, 강압과 회유 끝에 “간첩 활동을 했다”는 자백을 받아냈다. 한국 사회가 민주화로 방향을 돌리기 전까지 이 기록은 지하 서고 상자 속에서 거의 움직이지 않았다.
2000년대 들어 피해자들이 진실을 요구하면서 상황이 바뀌기 시작했다. 2005년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가 11·22 사건을 조사해 재심을 권고했고, 서울고법과 대법원은 차례로 무죄를 선고했다. 국가는 공식적으로 조작 사건임을 인정했다. 이후 피해자 상당수가 형사 재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고, 뒤늦게나마 명예를 회복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2019년 일본에서 피해 당사자들을 만나 사과했고, 이재명 대통령도 올해 8월 재일동포들을 찾아 과거 국가 폭력에 대해 다시 사과했다.
올해 11월 21일에는 서울 종로구 향린교회에서
을 기리는 치유 모임이 열렸다. 다음 날인 11월 22일, 국회의원회관 대회의실에서는 한국과 재일동포 음악인들이 함께 무대에 올라 피해자들의 싸움을 위로하는 콘서트를 진행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이 행사를 “군사정권 국가폭력에 삶과 청춘을 빼앗긴 이들을 위로하는 자리”라고 설명하며 “지금 우리가 누리는 민주화는 이들의 희생에 빚지고 있음을 기억하자”고 밝혔다. 국회 건물 안에서 국가 폭력 피해자를 위한 음악회가 열린다는 사실 자체가, 50년간 구조가 어떻게 바뀌었고 무엇이 여전히 남았는지를 묻는 장면이었다.
이 사건을 떠올리면 자연스럽게 권위주의 정권 시절의 권력 지형이 드러난다. 중앙정보부와 검찰, 군사정권은 안보 위협을 부풀리면 정권 안정과 예산, 인사에서 이익을 얻는 구조 속에 있었다. 국내 대학으로 유학 온 재일동포 청년들은 그 반대편에 서 있었다. 장학금과 아르바이트로 학비를 겨우 마련한 학생들이었고, 일본과 한국, 북한을 둘러싼 복잡한 정치 지형과 거의 상관없는 개인들이었다. 그러나 한 번 “간첩” 범주에 들어간 순간, 그들의 항변은 법정과 언론에서 거의 들리지 않았다. 가족과 동료, 변호인은 진실을 주장하다 오히려 감시 대상이 됐다.
시간이 흘러 정권은 바뀌었지만, 공안·안보 체계가 가진 기본 구조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대검찰청 통계에 따르면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접수된 인원은 2023년 152명에서 2024년 195명으로 늘었고, 같은 기간 기소 인원도 57명에서 88명으로 뛰었다. 10년 동안 1심 재판에 넘겨진 국가보안법 피고인은 566명인데, 이 가운데 247명이 무죄를 선고받았다. 대략 두 명 가운데 한 명꼴로, 수사기관이 ‘국가 안보’를 이유로 법정에 세운 사람 중 상당수가 실제 재판에서 무죄로 돌아온 셈이다.
이 숫자는 과거의 조작 사건이 “예외적인 흑역사”로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말해 준다. 법원은 점점 더 엄격하게 증거를 따지면서 무죄를 선고하지만, 수사 단계에서는 여전히 국가보안법과 공안 프레임이 넓게 작동한다. 1970년대처럼 조직적으로 사건을 꾸미는 방식은 줄었지만, 안보를 이유로 한 과잉 기소와 과도한 구금이 반복되는 구조는 여전히 남아 있다.
진실을 밝히는 국가 기구도 오랜 시간에 걸쳐 만들어졌다. 진실·화해위원회는 1기와 2기를 합쳐 2만 건이 넘는 사건을 접수했고, 최근 발표에 따르면 2기 기준으로 90% 안팎 사건을 처리했다.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 여순사건, 간첩 조작, 강제징집 등 다양한 국가 폭력 사건에서 진실이 조금씩 드러났고, 여순사건 포고령 위반 희생자 11명이 올해 11월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받는 일도 있었다. 그러나 조사와 판결이 진행돼도 피해자와 유족에게 돌아가는 배상·보상 제도는 여전히 미비하다는 지적이 계속 나온다.
형사 사건 영역에서도 늦은 진실은 반복된다. 같은 날 소개된 서울 신정동 연쇄살인 사건의 진범 확인 사례는 이를 보여 준다. 이 사건은 20년 동안 미제로 남아 각종 추측과 괴담을 낳았는데, 경찰 수사 결과 피해자들이 드나들던 건물 관리인이 진범으로 드러났다. 이미 10년 전에 사망한 뒤였다. 피해자와 지역 주민에게는, 진실이 밝혀졌다는 사실과 “이제 처벌할 수 없다”는 현실이 함께 남았다. 11·22 사건 피해자들이 재심에서 무죄를 받았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법률상 죄책은 지워졌지만, 잃어버린 학업과 경력, 직업, 가족의 삶은 되돌릴 수 없었다.
이런 사례를 통계와 함께 놓고 보면 질문이 선명해진다. 우리는 국가 안보를 이유로 한 수사 권한을 어디까지 허용할 것인가. 검찰과 정보기관이 가져온 사건 가운데 상당수가 법정에서 무죄로 돌아가는데, 그 과정에서 빼앗긴 시간과 낙인은 누구 책임으로 남는가. 진실을 확인한 뒤에도 배상과 사과, 제도 개혁이 지연될 때, 국가가 말하는 “과거 청산”은 어디까지 의미를 가질 수 있는가.
해결 방향도 추상적인 사과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국가보안법을 둘러싼 논쟁은 수십 년 동안 이어졌지만, 최근 통계에서 보이듯 높은 무죄율과 재심 무죄 판결 비율은 이 법이 얼마나 넓게, 그리고 불명확한 기준으로 사람들을 겨냥해 왔는지 드러낸다. 최소한 표현·사상의 자유 영역까지 포괄하는 조항을 대폭 정비하거나, 안전보장 목적을 명확하게 한정하는 입법이 필요하다. 재판에서 무죄가 난 사건에서 수사기관과 정보기관이 어떤 기준과 절차로 혐의를 구성했는지 정기적으로 점검하고, 잘못된 수사 관행에는 조직 차원의 책임을 묻는 장치도 요구된다.
진실·화해위원회가 판결과 권고를 내놓은 사건은 이제 수만 건에 이른다. 그러나 많은 피해자는 여전히 개별 소송을 통해서만 배상을 받아야 하고, 고령 유족 상당수는 소송 과정에서 다시 증언을 반복해야 한다. 이미 국회 안팎에서 논의해 온 국가폭력 피해자 배·보상 특별법을 더 미룰 수 없다는 목소리가 나오는 이유다. 국가가 조직적으로 저지른 폭력에 대해 사과와 배상, 의료·심리 지원, 기록 보존을 묶은 포괄적 제도를 만들지 않는 한, 개별 재판과 임시 예산으로는 구조를 바꾸기 어렵다.
마지막으로 남는 과제는 기억의 방식이다. 국회 대회의실에서 열리는 기념식과 콘서트가 일회성 행사가 아니라, 학교와 언론, 지역사회가 함께 이어 가는 교육과 기록 작업으로 연결돼야 한다. 과거의 간첩 조작 사건과 오늘의 국가보안법 기소, 미제 사건 수사와 뒤늦은 진범 확인을 하나의 연속선 위에 올려놓고 토론하는 공론장도 필요하다. 그렇게 할 때 “지하 조사실로 내려가는 계단”과 “국회의원회관으로 올라가는 계단” 사이에 놓인 50년의 거리를, 단순한 추모가 아니라 제도와 문화를 바꾸는 동력으로 바꿀 수 있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