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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으로 세상을 보다 1월 1째주] 산업재해

안전이라는 말이 무거워질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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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사회
위험사회
울리히 벡
위험사회울리히 벡 · 1986

퇴근길 지하철에서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다 문득 손목이 시큰거린다. 하루 종일 키보드를 두드린 탓일까. 옆자리 승객은 깊은 잠에 빠져 있다. 건설 현장에서 일하는 듯한 작업복 차림이다. 그의 손등에는 크고 작은 상처들이 보인다.

새해 첫 주, 재계 총수들의 신년사에서 '안전'이라는 단어가 유독 자주 등장했다. 포스코와 한화, HD현대 등 대기업들이 앞다투어 중대재해 예방을 다짐했다. 지난해 발생한 산업재해들이 남긴 상흔이 그만큼 깊었다는 방증이다. 고용노동부도 소규모 사업장에 공동안전관리자 채용을 지원하겠다고 나섰다.

하인리히 법칙이라는 것이 있다. 한 건의 대형 사고가 일어나기 전에는 29건의 작은 사고와 300건의 아차 사고가 선행한다는 이론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몇 번째 경고음을 듣고 있는 걸까?

독일의 사회학자 울리히 벡은 『위험사회』에서 현대 산업사회가 스스로 만들어낸 위험과 함께 살아가는 구조를 날카롭게 분석했다. 1986년 체르노빌 원전 사고 직후 쓰인 이 책은 기술 발전이 가져온 새로운 형태의 위험을 조명한다. 벡은 묻는다. 진보라는 이름으로 우리가 감수하는 위험의 대가는 정당한가?

산업재해는 단순한 우연의 산물이 아니다. 그것은 효율과 속도를 최우선시하는 시스템이 만들어낸 필연적 결과물이다. 안전 규정을 지키면 작업 속도가 느려진다. 보호 장비를 착용하면 움직임이 불편해진다. 그래서 현장에서는 늘 갈등한다. 생산성과 안전성 사이에서.

벡은 위험이 민주적으로 분배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부유한 사람들은 위험을 피할 수 있는 선택지를 갖지만, 가난한 사람들은 위험한 일자리라도 선택해야 하는 처지에 놓인다. 산업재해 통계가 이를 뒷받침한다. 대기업보다 중소기업에서, 정규직보다 비정규직 노동자들 사이에서 사고율이 높다.

위험은 개인의 부주의로 환원될 수 없다. 그것은 구조의 문제다. 납기일에 쫓기는 하청업체, 인력 부족에 시달리는 작업 현장, 형식적으로만 이뤄지는 안전 교육. 이 모든 것들이 얽혀 위험을 일상화시킨다. 노동자들은 위험을 감지하면서도 일을 멈출 수 없다. 생계가 달려 있기 때문이다.

안전은 비용이 아니라 권리다. 하지만 현실에서 안전은 여전히 후순위로 밀려난다. 기업들의 신년사에 등장하는 안전 다짐이 공허하게 들리는 이유다. 진정한 변화는 구호가 아니라 시스템을 바꾸는 데서 시작된다. 위험을 개인에게 전가하는 구조를 해체하는 일에서.

벡은 성찰적 근대화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근대가 만들어낸 문제를 근대 스스로 성찰하고 수정해나가는 과정이다. 산업재해 문제도 마찬가지다. 더 빨리, 더 많이 생산하려는 욕망이 만들어낸 위험을 이제는 직시해야 할 때다.

지하철에서 내려 집으로 걸어가는 길. 아파트 신축 공사 현장을 지나친다. 밤늦도록 불이 켜져 있다. 그곳에서 일하는 누군가도 무사히 집으로 돌아가기를. 안전이라는 말이 더는 구호로만 남지 않기를. 새해의 다짐들이 헛되지 않기를.

사업장 규모별 재해율
출처: 고용노동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