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침 7시 반, 편의점 계산대 앞에 선 알바생이 손님의 커피값을 받으며 미소짓는다. 시급 9,860원. 하루 8시간을 꽉 채워도 8만원이 채 안 되는 돈이지만, 그에게는 이 일자리가 절실하다. 같은 시각, 강남 어느 빌딩에서는 한 기업 대표가 자신의 연봉을 최저임금 수준으로 낮추겠다고 선언한다.
카카오페이 신원근 대표가 주가 20만원 달성 때까지 최저임금만 받겠다고 한 발표가 화제다. 연간 2,400만원 남짓. 그가 포기한 수억원의 연봉은 어디로 갈까. 주주들의 주머니로? 직원들의 성과급으로? 아니면 회사의 투자 재원으로? 언론은 그의 결단을 미담으로 다뤘지만, 정작 최저임금으로 살아가는 이들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최저임금을 둘러싼 논쟁은 늘 뜨겁다. 기업은 부담이 크다고 하고, 노동자는 턱없이 부족하다고 한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왜 최고경영자가 스스로 최저임금을 받겠다고 하면 미담이 되고, 노동자가 최저임금 인상을 요구하면 논란이 될까? 같은 최저임금인데 말이다.
바버라 에런라이크의 『노동의 배신』(2001)은 이런 아이러니를 정면으로 파고든다. 저널리스트인 저자는 직접 최저임금 노동자가 되어 식당 서빙, 청소, 마트 직원으로 일했다. 그녀가 발견한 것은 충격적이었다.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집세를 내면 끼니를 걱정해야 했고, 병원은 꿈도 꿀 수 없었다. 최저임금은 '최저 생활'조차 보장하지 못했다.
에런라이크가 특히 주목한 것은 저임금 노동의 악순환이었다. 돈이 없어 싼 모텔에 머물면서 오히려 더 많은 숙박비를 내고, 자동차가 없어 대중교통으로 출퇴근하느라 시간과 체력을 소진한다. 가난이 더 비싸다는 역설. 그녀는 묻는다. 정말로 이들이 게을러서 가난한 것일까?
한국의 최저임금 노동자는 약 340만명에 달한다. 전체 임금노동자의 15퍼센트가 넘는 수치다. 이들 중 상당수는 여러 일자리를 전전하며 생계를 유지한다. 편의점 야간 알바를 마치고 새벽 배송을 나가고, 주말엔 식당에서 서빙을 한다. 그들에게 최저임금은 숫자가 아니라 삶 그 자체다.
흥미로운 것은 최저임금 미만율 추이다. 정부 통계에 따르면 최저임금조차 받지 못하는 노동자 비율이 2019년 15.5퍼센트에서 2023년 13.7퍼센트로 소폭 감소했다. 하지만 여전히 7명 중 1명은 법정 최저임금도 받지 못한다. 감독이 강화됐다지만 사각지대는 여전하다.
대표의 최저임금 선언으로 돌아가보자. 그에게 연 2,400만원은 상징적 제스처일 수 있다. 하지만 실제 최저임금 노동자에게 그 돈은 월세와 식비, 교통비를 겨우 충당하는 생존의 숫자다. 같은 금액이 누군가에겐 희생이고 누군가에겐 한계선이라는 이 간극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지금도 새벽 편의점엔 불이 켜져 있다. 최저임금을 받으며 묵묵히 일하는 이들이 그 자리를 지킨다. 그들이 우리 사회의 기반을 떠받치고 있다는 사실을 잊곤 한다. 최저임금이 단순한 경제 지표가 아니라 누군가의 삶 전체를 규정하는 선이라는 것도.
에런라이크는 책 말미에 이렇게 적었다. 부자들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기대는 것이지, 그 반대가 아니라고. 값싼 서비스와 노동력 덕분에 중산층의 일상이 유지된다고. 아침마다 들르는 편의점, 점심을 먹는 식당, 퇴근길 들르는 마트. 그곳에서 일하는 이들의 노동이 있기에 가능한 일상이다. 최저임금이란 결국 그 일상의 대가를 누가, 얼마나 치를 것인가의 문제가 아닐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