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2월, 카카오페이의 신원근 대표가 던진 약속이 작은 파문을 일으켰다. 주가가 20만원에 도달할 때까지 최저임금만 받겠다는 선언. 현재 주가는 3만원대를 맴돌고 있다. 이 간극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단순한 경영진의 책임 의식 표명일까, 아니면 우리 시대가 만들어낸 새로운 형태의 계약일까.
최저임금이라는 단어가 품고 있는 무게를 생각해본다. 2024년 기준 시간당 9,860원. 이 숫자는 한 사람이 일하며 받아야 할 최소한의 대가다. 그런데 연봉 수억원을 받던 대기업 대표가 이 금액만 받겠다고 나선다. 여기엔 어떤 역설이 숨어있는가.
바바라 에런라이크는 『노동의 배신』에서 직접 최저임금 노동자가 되어보았다. 웨이트리스, 청소부, 월마트 직원으로 일하며 그녀가 발견한 것은 단순한 경제적 궁핍이 아니었다. 시간의 빈곤이었다. 최저임금으로는 미래를 계획할 수 없었다. 하루하루 생존하는 것만으로도 모든 에너지가 소진됐다.
그렇다면 신 대표의 선언은 이 시간의 빈곤을 자발적으로 선택한 것일까. 아니다. 그에게는 주식이라는 미래의 약속이 있다. 언젠가 도달할 20만원이라는 목표가 있다. 최저임금 노동자들에게는 없는 것, 바로 기다릴 수 있는 여유다.
현대모비스의 통상임금 판결 소식이 같은 시기에 전해졌다. 퇴직급여충당부채가 1조6천억원에서 2조7천억원으로 늘어났다는 숫자들. 법원이 인정한 '정당한 대가'를 지급하는 데만 1조원이 더 필요하다는 의미다. 기업은 이를 부담으로 여기고, 노동자는 당연한 권리로 본다.
에런라이크가 경험한 최저임금 노동의 현실에서, 가장 힘든 것은 존엄의 상실이었다. 매니저의 사소한 지적에도 일자리를 잃을까 전전긍긍해야 했고, 아파도 병원에 갈 수 없었다. 그녀는 묻는다. 이들이 받는 임금은 정말 그들 노동의 가치를 반영하는가.
우리는 종종 임금을 단순한 숫자로만 본다. 하지만 그것은 한 사람의 시간이며, 가능성이며, 미래다. 신 대표가 최저임금을 받겠다고 할 수 있는 것은 그에게 다른 형태의 미래가 보장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짜 최저임금 노동자들에게 그런 선택지는 없다.
2026년 지방공무원 2만8천명 선발 소식도 눈에 띈다. 안정적인 일자리를 향한 청년들의 갈망이 숫자로 드러난다. 공무원 시험 준비생들이 투자하는 시간과 비용을 생각하면, 이들이 찾는 것은 단순히 높은 임금이 아니다. 예측 가능한 미래, 계획할 수 있는 삶이다.
에런라이크의 실험은 2001년 미국에서 이루어졌다. 20년이 넘게 지난 지금, 한국의 최저임금 노동자들의 현실은 얼마나 달라졌을까. 플랫폼 노동, 프리랜서, 특수고용직이라는 새로운 형태들이 등장했지만, 시간의 빈곤이라는 본질은 변하지 않았다.
『노동의 배신』이 최저임금을 바라보는 시선은 표면적 현상 너머의 구조를 향한다. 바버라 에런라이크은 개별 사건의 원인을 개인에게 돌리는 대신, 그 사건을 가능하게 만든 사회적 조건을 추적한다. 이런 관점은 반복되는 문제의 근본 원인을 이해하는 데 필수적이다.
최저임금 문제의 핵심은 제도와 현실 사이의 괴리에 있다. 법과 정책은 존재하지만 현장에서 작동하지 않거나, 작동하더라도 의도와 다른 결과를 낳는 경우가 빈번하다. 바버라 에런라이크이 주목하는 것도 바로 이 간극이다. 설계된 세계와 살아가는 세계 사이의 거리.
신원근 대표의 선언을 다시 생각한다. 그것이 진정성 있는 약속이든 상징적 제스처든, 중요한 것은 이 사회가 최저임금을 어떻게 바라보는가다. 누군가에게는 자발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희생이지만, 누군가에게는 벗어날 수 없는 굴레다. 이 간극이 우리 시대의 불평등을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최저임금을 둘러싼 논쟁은 늘 뜨겁다. 기업은 부담이 크다고 하고, 노동자는 턱없이 부족하다고 한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왜 최고경영자가 스스로 최저임금을 받겠다고 하면 미담이 되고, 노동자가 최저임금 인상을 요구하면 논란이 될까? 같은 최저임금인데 말이다.
바버라 에런라이크의 『노동의 배신』(2001)은 이런 아이러니를 정면으로 파고든다. 저널리스트인 저자는 직접 최저임금 노동자가 돼 식당 서빙, 청소, 마트 직원으로 일했다. 그녀가 발견한 것은 충격적이었다.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집세를 내면 끼니를 걱정해야 했고, 병원은 꿈도 꿀 수 없었다. 최저임금은 '최저 생활'조차 보장하지 못했다.
에런라이크가 특히 주목한 것은 저임금 노동의 악순환이었다. 돈이 없어 싼 모텔에 머물면서 오히려 더 많은 숙박비를 내고, 자동차가 없어 대중교통으로 출퇴근하느라 시간과 체력을 소진한다. 가난이 더 비싸다는 역설. 그녀는 묻는다. 정말로 이들이 게을러서 가난한 것일까?
같은 최저임금이 CEO에겐 상징적 제스처이지만 340만 노동자에겐 생존의 경계선이라는 사회적 불평등을 직시하게 한다.
법정 최저임금도 받지 못하는 노동자가 여전히 7명 중 1명에 달하며, 중산층의 일상이 저임금 노동자의 착취 위에 건설돼 있다는 점을 환기한다.
최저임금이 월세, 식비, 교통비조차 충당하지 못하는 악순환 속에서 '가난이 더 비싸다'는 역설을 통해 근본적인 정책 개선 필요성을 제기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