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당신은 지난주 병원에 갔다가 진료를 받지 못하고 돌아왔을지도 모른다. 의사들이 파업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아니면 당신은 뉴스로만 접했을 수도 있다. 정부가 의대 정원을 늘리겠다고 하자 의사들이 집단행동에 나섰다는 소식을. 어느 쪽이든 당신은 묘한 감정을 느꼈을 것이다. 아픈 사람을 치료하는 의사가 왜 환자를 두고 자리를 비우는가.
2024년 2월 둘째 주, 전공의들이 병원을 떠나기 시작했다. 정부의 의대 증원 계획에 반발해서다. 응급실과 수술실에서 일손이 부족해졌다. 환자들은 다른 병원을 찾아 헤맸다. 언론은 연일 의료 대란을 보도했다. 정부는 업무복귀 명령을 내렸지만 파업은 계속됐다.
의사와 환자의 관계란 무엇일까. 치료하는 사람과 치료받는 사람. 단순해 보이는 이 관계가 왜 이토록 복잡하게 꼬이는 것일까. 한쪽은 생명을 다루는 전문가로서의 자부심을 말하고, 다른 한쪽은 아플 때 치료받을 권리를 말한다. 그 사이에서 대화는 평행선을 그린다.
미셸 푸코는 『임상의학의 탄생』(1963)에서 근대 의학이 어떻게 환자를 대상화하는지 추적한다. 18세기 말 프랑스에서 시작된 임상의학은 환자를 '보는' 방식을 바꿨다. 의사의 시선은 환자라는 인간이 아니라 질병이라는 대상을 향했다. 병원은 질병을 관찰하고 분류하는 공간이 됐다. 환자는 질병의 운반체로 축소됐다.
푸코가 주목한 것은 이 과정에서 형성된 권력관계다. 의사는 보는 자, 환자는 보이는 자가 된다. 의사는 말하는 자, 환자는 듣는 자가 된다. 이 비대칭은 단순한 역할 분담이 아니다. 한쪽이 다른 한쪽을 규정하고 통제하는 권력의 작동이다. 질병을 아는 자가 모르는 자 위에 군림한다.
그런데 푸코가 놓친 것이 있다. 의사도 또한 시스템 속의 한 부품이라는 사실이다. 병원이라는 거대한 기계 속에서 의사 역시 정해진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진료 시간은 짧아지고, 환자 수는 늘어난다. 의사는 환자를 '처리'해야 한다. 효율성이 인간성을 압도한다.
한국의 의료 현실은 이 모순을 극단적으로 보여준다. 3분 진료라는 말이 일상이 됐다. 의사 한 명이 하루에 봐야 하는 환자 수는 다른 나라의 몇 배에 달한다. 환자는 긴 대기 시간 끝에 짧은 진료를 받는다. 의사는 과로에 시달린다. 양쪽 모두 피해자인 셈이다.
파업이 터져 나온 배경에는 이런 구조적 문제가 깔려 있다. 정부는 의사 수를 늘려서 해결하려 한다. 의사들은 그것이 해법이 아니라고 말한다. 더 많은 의사가 더 나은 의료를 보장하는가. 아니면 더 많은 경쟁과 더 낮은 질로 이어지는가. 답은 간단하지 않다.
당신이 다음에 병원에 가게 된다면, 잠시 주변을 둘러보길 바란다. 대기실에 앉은 사람들의 얼굴을, 분주히 움직이는 의료진의 모습을. 그들 각자가 이 시스템 속에서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 역할이 정말 그들이 원했던 것인지. 의사와 환자가 대립하는 것처럼 보이는 순간에도, 실은 모두가 같은 구조 속에 갇혀 있는 것은 아닌지.
의료는 단순한 서비스가 아니다. 생명을 다루는 일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너무 쉽게 상품처럼 다루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의사 파업이 던지는 질문은 단순하지 않다. 누가 옳고 그른가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어떤 의료를 원하는가의 문제다. 그 답을 찾기 위해서는 의사와 환자가 대립하는 구도를 넘어서야 한다. 둘 다 인간이라는 단순한 사실로 돌아가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