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34년의 어느 날, 우리는 건설현장이 사라진 도시를 상상할 수 있을까. 지금으로부터 10년 후, 임금체불로 현장을 떠난 노동자들의 빈자리를 누가 채우고 있을지. 2024년 3월, 임금체불이 전년 대비 49퍼센트 급증했다는 뉴스는 단순한 숫자가 아니었다. 건설노동자들에게 유독 집중된 이 부당행위는 우리 사회가 만든 구조적 배제의 결과물이었다.
특수고용노동자. 이 낯익은 단어 뒤에는 산업안전보건법의 보호도, 근로기준법의 적용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노동자이면서 노동자가 아니다. 일하지만 일하는 자로 인정받지 못한다. 법은 그들을 사업자라 부르고, 현실은 그들을 노동자로 부린다.
바버라 에런라이크의 『노동의 배신』은 2001년 미국에서 출간됐다. 저자는 최저임금 노동자로 직접 살아보며 그들의 삶을 기록했다. 웨이트리스, 청소부, 월마트 직원으로 일하며 그녀가 발견한 것은 단순했다.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가난에서 벗어날 수 없는 시스템. 그로부터 23년이 지난 지금, 한국의 건설현장에서도 비슷한 이야기가 반복되고 있지 않은가.
에런라이크는 썼다. 가난은 개인의 실패가 아니라 임금 구조의 실패다. 그런데 우리는 여전히 임금체불을 개별 사업주의 도덕성 문제로만 본다. 49퍼센트라는 숫자 앞에서도 구조를 묻지 않는다. 왜 하필 건설노동자인가. 왜 특수고용 형태인가. 이런 질문들을 던지지 않는다.
택배기사들이 특수고용노동자로 분류된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건설노동자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같은 법적 지위 아래 놓여 있다. 하지만 택배기사의 과로사는 사회문제가 되고, 건설노동자의 임금체불은 개인 문제로 치부된다. 이 차이는 어디서 오는가. 우리가 매일 받는 택배상자는 보이지만, 우리가 사는 건물을 짓는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다.
『노동의 배신』에서 저자는 중산층의 편안한 삶이 저임금 노동자들의 희생 위에 서 있음을 폭로했다. 깨끗한 호텔, 저렴한 음식, 편리한 서비스. 이 모든 것이 누군가의 낮은 임금으로 가능하다. 한국의 건설현장도 다르지 않다. 우리가 사는 아파트, 일하는 사무실, 쇼핑하는 건물들. 그 모든 공간이 임금체불의 위험을 감수한 노동 위에 세워진다.
법의 사각지대라는 표현은 마치 법이 미처 닿지 못한 곳처럼 들린다. 하지만 특수고용이라는 제도는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배제 장치다. 노동자의 권리는 주지 않으면서 노동자의 의무는 요구하는 교묘한 시스템. 이것이 우연일까. 건설업계에서 임금체불이 집중적으로 발생하는 것도 우연일까.
2024년 3월의 이 뉴스는 곧 잊혀질 것이다. 하지만 건설현장의 노동자들은 내일도 일할 것이다. 임금을 받을지 모른 채 일할 것이다. 그들이 짓는 건물에서 우리는 살고, 일하고, 만날 것이다. 이 연결고리를 우리는 언제까지 외면할 수 있을까. 『노동의 배신』이 던진 질문은 20년이 넘도록 유효하다. 누군가의 희생으로 유지되는 시스템은 과연 지속가능한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