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 후 집중 읽기 모드로 전환됩니다

[책으로 세상을 보다 3월 3째주] 집중구매

효율의 이름으로 선택권을 양보할 때

기사 듣기
국가처럼 보기
국가처럼 보기
제임스 C. 스콧
국가처럼 보기제임스 C. 스콧 · 1998

병원 대기실에 앉아 있으면 종종 같은 제조사의 의료기기들을 본다. 혈압측정기부터 주사기까지, 어느 순간부터 모든 게 통일되어 있다. 환자들은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 작동만 하면 되니까.

중국 정부가 의료기기 중앙집중식 구매(VBP) 정책을 밀어붙이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의료비 절감을 위해 정부가 나서서 대량구매하는 방식이다. 제조사들은 가격 경쟁에 내몰리고, 병원은 선택의 여지 없이 낙찰된 제품을 쓴다. 효율적이라고들 한다. 실제로 가격은 떨어진다.

그런데 효율이 정말 모든 것의 답일까. 제임스 C. 스콧은 『국가처럼 보기』에서 국가가 추구하는 단순화와 표준화가 어떻게 현실의 복잡성을 무시하는지 추적한다. 숲을 목재 생산량으로만 보기 시작하면서 생태계가 무너진 독일의 과학적 산림 관리. 획일적인 도시계획으로 삶의 터전을 잃은 브라질리아의 주민들. 효율을 위한 단순화는 늘 무언가를 지워버린다.

의료기기 하나를 고르는 일도 사실은 복잡하다. 의사의 손에 익은 기구가 있고, 환자의 체질에 맞는 재료가 있다. 하지만 중앙집중식 구매는 이 모든 개별성을 가격이라는 하나의 기준으로 환원한다. 누군가는 이것이 합리적이라고 말한다. 낭비가 줄어든다고도 한다.

스콧이 말하는 메티스(metis)가 떠오른다. 그리스어로 실천적 지혜를 뜻하는 이 개념은 현장에서 축적된 암묵지를 가리킨다. 오랜 경험으로 어떤 환자에게 어떤 바늘이 적합한지 아는 간호사의 감각. 특정 수술에는 특정 제조사의 실이 더 낫다는 외과의사의 판단. 이런 지식은 표준화된 입찰 서류에 담기지 않는다.

한국도 비슷한 길을 가고 있지 않나. 공공조달, 표준화, 일괄구매. 효율성의 논리는 점점 더 많은 영역을 삼킨다. 작은 차이들, 미세한 선택지들이 사라진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이 사라진 줄도 모른다. 애초에 있었는지조차 잊어버린다.

다시 병원 대기실. 획일화된 의료기기들 사이에서 문득 궁금해진다. 이전에는 어땠을까. 의사들이 자신의 손에 맞는 도구를 고르고, 환자의 특성에 따라 재료를 선택하던 시절. 그때는 비효율적이었을까. 아니면 우리가 효율이라고 부르는 것이 사실은 무언가를 포기하는 대가일까.

스콧은 경고한다. 위에서 내려다보는 시선은 아래에서 살아가는 복잡성을 놓친다고. 지도는 영토가 아니라고. 하지만 우리는 자꾸만 지도를 영토인 양 믿는다. 숫자가 현실인 양 착각한다.

집중구매 정책이 확산되는 걸 보며 생각한다. 우리가 얻는 것과 잃는 것을. 가격표에 적히지 않는 비용을. 선택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효율적인 세상은 때로 너무 단순해서 숨이 막힌다.

한국 공공기관 수의계약 비율 추이
출처: 조달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