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종로 정부청사 회의실의 긴 탁자 위로 형광등 불빛이 차갑게 내려앉았다. 7월의 무더위 속에서도 에어컨이 돌아가는 이곳은 서늘했고, 최저임금위원회 위원들은 나흘째 같은 자리에 앉아 있었다. 2025년도 최저임금 1만 30원. 전년 대비 1.7퍼센트 인상. 역대 두 번째로 낮은 인상률이 확정되는 순간, 누군가는 안도의 한숨을, 누군가는 탄식을 내뱉었다.
그로부터 며칠 전, 화성의 한 리튬전지 공장에서는 스물세 명의 노동자가 숨을 거두었다. 아리셀 화재 참사. 대부분이 일용직과 파견직이었고, 그중 열여덟 명이 외국인 노동자였다. 그들이 받던 시급은 최저임금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불길이 삼킨 것은 공장 건물만이 아니었다.
바바라 에런라이크는 2001년 『노동의 배신』에서 최저임금으로 살아가는 실험을 했다. 웨이트리스, 청소부, 월마트 직원으로 일하며 그는 발견했다. 아무리 성실하게 일해도 집세를 내고 나면 남는 것이 없다는 사실을. 스무 해가 지난 지금, 한국의 최저임금 노동자들도 비슷한 질문 앞에 서 있다. 하루 여덟 시간을 일해도 방 한 칸을 구하기 어려운 이 도시에서, 우리는 노동의 가치를 어떻게 매기고 있는가.
최저임금위원회는 매년 비슷한 논쟁을 반복한다. 경영계는 인건비 부담을 호소하고, 노동계는 생활임금을 요구한다. 숫자 싸움이 벌어지는 동안 정작 그 임금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에런라이크가 지적했듯, 최저임금 논쟁의 본질은 경제학이 아니라 윤리학의 영역일지도 모른다.
한국의 최저임금 미만율은 꾸준히 상승하고 있다. 법으로 정한 최저선조차 지켜지지 않는 일터가 늘어난다는 의미다. 특히 5인 미만 사업장, 비정규직, 이주노동자가 밀집한 곳일수록 이 비율은 높아진다. 아리셀 공장의 희생자들이 일했던 조건이 바로 그런 사각지대였다.
에런라이크는 실험을 마치며 고백했다. 가난은 개인의 실패가 아니라 시스템의 실패라고. 최저임금으로는 인간다운 삶을 유지할 수 없도록 설계된 구조 자체가 문제라고. 그의 실험이 끝난 뒤에도 미국의 최저임금은 물가상승률을 따라잡지 못했다. 한국도 다르지 않다.
정부청사 회의실에서 1.7퍼센트를 놓고 밀고 당기는 동안, 어디선가는 최저임금을 받으며 위험한 일터로 향하는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들에게 시급 1만 30원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월세와 공과금을 내고 나면 얼마가 남을까. 아플 때 병원에 갈 수 있을까. 자녀의 학원비는 어떻게 마련할까.
화성 공장의 시계는 화재가 발생한 오전 10시 31분에 멈췄다. 그 시각, 희생자들은 시급 9,860원을 받으며 리튬전지를 조립하고 있었다. 안전교육은 형식적이었고, 비상구 표시는 중국어로만 되어 있었다. 목숨값이 시급으로 계산되는 일터에서, 안전은 언제나 비용의 문제로 환원된다.
에런라이크가 남긴 질문은 여전히 우리 곁에 있다. 왜 가장 힘든 일을 하는 사람들이 가장 적은 돈을 받는가. 왜 그들의 노동은 보이지 않는가. 최저임금을 둘러싼 숫자 게임이 계속되는 한, 이 질문에 답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세종로 회의실의 불이 꺼지고 위원들이 떠난 뒤에도, 도시 곳곳에서는 최저임금 노동자들이 일하고 있다. 편의점 카운터 뒤에서, 건물 지하 청소 도구함 옆에서, 공장 조립 라인 위에서. 그들이 멈추면 도시도 멈춘다. 하지만 우리는 그 사실을 너무 쉽게 잊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