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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으로 세상을 보다 8월 1째주] 전세사기와 주거권

법이 보호하지 못한 삶들이 던지는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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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럼, 지구를 뒤덮다
슬럼, 지구를 뒤덮다
마이크 데이비스
슬럼, 지구를 뒤덮다마이크 데이비스 · 2006

아침 출근길 지하철에서 스마트폰을 꺼내든다. 부동산 앱이 띄운 알림이 눈에 들어온다. 전셋값이 또 올랐다. 2년 뒤 재계약을 생각하면 벌써부터 숨이 막힌다. 옆자리 청년도 비슷한 화면을 보고 있다. 한숨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전세사기 특별법 개정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비아파트 거주자들도 이제 피해 구제를 받을 수 있게 되었다는 소식이다. LH가 피해 주택을 경매로 매입해 공공임대로 전환한다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다. 늦었지만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런데 왜 이리 무거운 마음이 들까.

빌라, 다세대주택, 오피스텔. 이런 곳에 사는 사람들은 그동안 법의 사각지대에 있었다. 아파트가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말이다. 전세 보증금이 날아가는 똑같은 피해를 입었는데도 구제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법은 왜 이들을 외면했을까. 아니, 애초에 왜 우리는 집을 이렇게 나누어 생각하게 되었을까.

마이크 데이비스의 『슬럼, 지구를 뒤덮다』는 전 지구적 차원에서 벌어지는 주거 양극화를 추적한다. 2006년에 쓰인 이 책은 놀랍도록 현재적이다. 선진국 도시에서조차 안정적인 주거가 특권이 되어가는 현실을 예리하게 포착했다. 저자는 묻는다. 도시가 발전할수록 왜 더 많은 사람이 불안정한 주거 환경으로 내몰리는가.

한국의 전세 제도는 독특하다. 세계 어디에도 없는 방식이다. 집주인에게 목돈을 맡기고 이자 대신 거주권을 얻는 구조. 그런데 이 독특함이 오히려 함정이 되었다. 갭투자, 전세 레버리지, 그리고 사기. 시장의 논리가 삶의 기반을 위협하는 무기로 변했다.

데이비스는 주거 불안정이 단순히 경제적 문제가 아님을 강조한다. 그것은 존엄의 문제이고, 시민권의 문제다. 안전한 집에 살 권리를 박탈당한 사람은 도시의 완전한 구성원이 될 수 없다. 투표권이 있어도, 직장이 있어도 말이다.

한국도시연구소의 조사에 따르면 2023년 기준 전국 주택 중 아파트가 아닌 주택에 거주하는 가구는 약 38%에 달한다. 10가구 중 4가구가 법의 보호 밖에 있었던 셈이다. 이들 대부분은 청년이거나 저소득층이다. 가장 보호가 필요한 이들이 가장 먼저 배제되는 아이러니.

전세사기는 개인의 일탈이 아니다. 구조의 문제다. 집을 투자 상품으로만 보는 시각, 임차인보다 임대인을 우선하는 제도, 그리고 주거권을 시장에 맡겨버린 정책. 이 모든 것이 만들어낸 필연적 결과다. 특별법 개정은 시작일 뿐이다.

퇴근길 지하철은 더 붐빈다. 사람들은 저마다 집으로 향한다. 전세인지 월세인지, 아파트인지 빌라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모두가 안전하게 쉴 곳을 원할 뿐이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왜 이 단순한 바람을 이토록 어렵게 만들었을까.

데이비스의 책은 이미 20년 전에 경고했다. 주거 불평등은 도시의 미래를 갉아먹는다고. 한국의 전세사기 사태는 그 경고가 현실이 된 모습이다. 이제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법 개정으로 끝날 일이 아니다. 집이란 무엇인지, 주거권이란 무엇인지 근본부터 다시 물어야 한다.

전국 비아파트 거주 가구 비율
출처: 한국도시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