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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으로 세상을 보다 9월 3째주] 택배 노동자의 죽음

속도의 강요가 만드는 죽음의 굴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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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의 배신
노동의 배신
바버라 에런라이크
노동의 배신바버라 에런라이크 · 2001

아침 6시, 물류센터에는 불이 켜진다. 저녁 11시, 택배 기사의 차량이 마지막 배송지를 떠난다. 그 사이 17시간, 누군가의 하루가 상자와 함께 흘러간다. 우리가 '빠른 배송'이라 부르는 편리함 뒤에는 이런 시간들이 숨어있다.

쿠팡 물류센터에서 또 다시 노동자가 쓰러졌다. 택배 노동자 과로사 대책위가 만들어졌고, '무분별한 속도 강요에 공적 규제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왔다. 2024년 9월, '쿠팡 사망'으로 검색하면 나오는 이미지들. 반복되는 죽음의 기록이다.

바버라 에런라이크는 『노동의 배신』에서 저임금 노동자로 직접 일하며 미국 서비스업의 실상을 기록했다. 월마트에서, 청소회사에서, 식당에서 일했다. 시급을 받으며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불가능한 일인지 몸으로 증명했다. 그런데 한국의 택배 노동자들은 시급조차 보장받지 못한다. 건당 수수료로 살아간다. 배송 건수가 곧 생존이다.

에런라이크가 경험한 것은 '시간의 착취'였다. 쉴 시간이 없었다. 화장실 갈 시간도 아꼈다. 한국의 택배 노동자들이 겪는 것은 '속도의 착취'다. 더 빨리, 더 많이. 새벽배송, 당일배송, 즉시배송. 배송의 속도는 점점 빨라지는데 노동자의 몸은 그대로다.

물류센터에서 일하는 것과 전쟁터에서 싸우는 것, 무엇이 다를까. 전투에는 적어도 교전규칙이 있다. 제네바 협약이 있다. 그러나 물류 전쟁에는 규칙이 없다. 속도만이 유일한 법칙이다. 노동자들은 이 전쟁에서 총알받이가 되고 있다.

2001년 미국에서 『노동의 배신』이 출간됐을 때, 많은 이들이 충격을 받았다. 부유한 나라의 가난한 노동자들. 풀타임으로 일해도 집세를 낼 수 없는 현실. 그로부터 23년이 지났다. 한국의 택배 노동자들은 여전히, 아니 더욱 가혹한 조건에서 일하고 있다.

속도는 돈이 된다. 1초가 단축되면 이익이 늘어난다. 그래서 기업은 속도를 강요한다. 노동자의 동선을 1미터라도 줄이려 한다. 쉬는 시간을 1분이라도 단축하려 한다. 그 1초와 1미터와 1분이 모여 누군가의 목숨이 된다는 것을 외면한 채.

에런라이크는 책의 마지막에서 묻는다. 이렇게 일해도 살 수 없다면, 대체 왜 일하는가. 한국의 택배 노동자들도 같은 질문을 던질 것이다. 이렇게 일하다 죽는다면, 대체 무엇을 위한 노동인가.

우리는 매일 택배를 받는다. 문 앞에 놓인 상자를 집어든다. 그 상자가 누군가의 17시간을 담고 있다는 것을, 누군가의 숨가쁜 하루를 담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는다. 편리함에 익숙해진 우리는 그 편리함의 대가를 묻지 않는다.

속도의 시대다. 모든 것이 빨라진다. 그런데 정작 중요한 것은 느려진다. 노동자의 죽음에 대한 대책, 제도의 개선, 인식의 변화. 이런 것들은 여전히 느리다. 택배는 새벽에 도착하지만, 정의는 언제 도착할까.

택배 물동량 추이
출처: 한국통합물류협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