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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으로 세상을 보다 10월 3째주] 가려진 노동

TSMC를 위해 원전을 돌리는 대만, 그리고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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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것들의 경제학
보이지 않는 것들의 경제학
E.F. 슈마허
보이지 않는 것들의 경제학E.F. 슈마허 · 1973

대만 경제부 장관 궈즈후이가 마침내 결정을 내렸다. 10개월 전 멈췄던 마안산 원전 2호기를 다시 가동하기로. 그의 손에는 TSMC가 제출한 전력 사용 보고서가 들려 있었다. 255억5000만킬로와트시. 대만 전체 전력의 9퍼센트를 한 기업이 쓴다는 숫자 앞에서, 탈원전이라는 약속은 무력했다.

원전이 다시 돌아가기 시작한 날, 타이베이 근교의 반도체 공장에서는 수천 명의 엔지니어들이 여전히 3교대로 일하고 있었다. 그들 중 대부분은 이 결정이 자신들의 노동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AI 칩을 만들기 위해 필요한 전력이 어디서 오는지, 그 전력을 만들기 위해 또 다른 누군가가 어떤 위험을 감수하는지는 보이지 않았다.

1973년 출간된 『보이지 않는 것들의 경제학』에서 E.F. 슈마허는 이미 이런 질문을 던졌다. 현대 산업이 만들어내는 '보이지 않는 비용'에 대해서. 그는 석탄 1톤을 캐는 데 드는 진짜 비용은 시장 가격이 아니라고 했다. 광부의 규폐증, 오염된 하천, 사라진 마을. 이것들이 진짜 비용인데 우리는 왜 계산하지 않는가.

슈마허의 물음은 5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하다. 아니, 오히려 더 복잡해졌다. AI 반도체 하나를 만들기 위해 동원되는 노동의 사슬은 이제 지구 전체를 감싸고 있다. 대만의 원전 노동자부터 칠레의 리튬 광산 노동자까지. 우리는 그들을 보지 못한다. 아니, 보지 않기로 선택한다.

한국도 다르지 않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AI 시대의 승부수를 던지고 있다는 뉴스가 연일 보도된다. 투자 규모는 천문학적이고, 기술 경쟁은 치열하다. 하지만 평택과 이천의 반도체 공장에서 일하는 2만여 명의 노동자들이 어떤 환경에서 일하는지는 거의 다뤄지지 않는다. 그들이 다루는 화학물질이 무엇인지, 건강 검진 결과는 어떤지, 이직률은 왜 높은지.

슈마허는 '중간 기술'이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거대하고 복잡한 기술 대신, 인간의 얼굴을 한 기술. 그런데 우리는 정반대로 가고 있다. 기술은 점점 거대해지고, 그것을 떠받치는 노동은 점점 더 보이지 않게 된다. AI가 만능인 것처럼 보이는 시대, 정작 AI를 만드는 사람들의 노동은 투명인간이 되어간다.

통계는 이런 역설을 잘 보여준다. 한국 반도체 산업의 직접 고용 인원은 꾸준히 증가하고 있지만, 비정규직과 협력업체 노동자를 포함한 간접 고용은 그보다 훨씬 빠르게 늘어나고 있다. 보이는 노동자 한 명 뒤에 보이지 않는 노동자 셋이 있는 셈이다.

대만이 원전을 다시 가동하기로 결정한 것은 단순한 에너지 정책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가 무엇을 보고 무엇을 보지 않기로 선택하는지에 대한 문제다. TSMC의 주가 상승 그래프 뒤에 가려진 원전 노동자의 불안, AI 칩의 혁신 뒤에 숨겨진 광산 노동자의 고통. 이것들을 보지 않고서 우리는 정말로 발전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궈즈후이 장관이 원전 재가동 발표를 마치고 돌아서는 순간, 기자들의 질문이 쏟아졌다. 하지만 원전에서 일할 노동자들의 안전에 대해 묻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모두가 전력 수급과 경제 성장만을 이야기했다. 슈마허가 50년 전에 경고했던 그 맹목이, 여전히 우리를 지배하고 있었다.

한국 반도체 산업 고용 형태별 인원 추이
출처: 한국반도체산업협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