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년. 충남 부여군에서 보건지소 5곳이 문을 닫기까지 걸린 시간이다. 은산, 외산, 홍산, 임천, 석성면. 이름만 들어도 농촌의 정취가 느껴지는 곳들이다. 의사를 구하지 못해서였다. 공중보건의사가 10년 새 4분의 1로 줄었다는 통계가 말해주지 못하는 것은, 그 숫자 뒤에 숨은 21년의 무게다.
마을에서 의사가 사라진다는 것. 단순히 의료 서비스 하나가 없어지는 일일까. 아니면 그 마을이 품고 있던 어떤 가능성 자체가 닫히는 일일까. 병원이 없는 마을에서 늙어간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지, 우리는 충분히 상상해본 적이 있는가.
비슷한 시기, 국가기후위기대응위원회는 2025년 이상기후 보고서를 발간했다. 전지구 평균기온이 1.55도 상승했다는 숫자가 1면을 장식했다. 물 위기를 넘어 물 파산의 시대라는 경고도 나왔다. 파산이라니. 경제 용어가 기후를 설명하는 언어가 되었다.
미국의 환경사학자 제이슨 W. 무어는 『생명의 그물 속 자본주의』에서 자연과 사회를 분리해서 보는 시각 자체를 의심한다. 자본주의는 자연을 '밖'에 두고 착취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을 통해서 작동한다는 것이다. 그의 표현을 빌리면, 자본주의는 '생태 속의 경제'가 아니라 '생태를 통한 경제'다.
무어의 시선으로 보면, 보건지소가 사라지는 일과 물이 파산하는 일은 같은 현상의 다른 얼굴이다. 자본이 이윤을 찾아 도시로 집중될 때, 농촌은 의사를 잃고 자연은 물을 잃는다. 둘 다 '재생산의 위기'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재생산이라는 말이 낯설게 들린다면, 이렇게 물어보자. 내일도 오늘처럼 살 수 있을까? 농촌에서는 아플 때 병원에 갈 수 있을까? 도시에서는 수돗물을 틀면 물이 나올까? 당연하게 여겼던 일상이 더는 당연하지 않을 때, 우리는 비로소 재생산이 무엇인지 깨닫는다.
흥미로운 것은 위기의 속도다. 보건지소가 21년에 걸쳐 서서히 사라진 반면, 기후 지표는 최근 몇 년 사이 급격히 악화됐다. 하지만 정작 우리가 체감하는 것은 무엇인가. 폭염과 폭우는 뉴스에서 숫자로 전해지고, 동네 병원이 없어지는 일은 피부로 다가온다.
무어는 이런 불균등한 체감 역시 자본주의의 특징이라고 본다. 위기는 항상 주변부에서 먼저 시작되고, 중심부는 그것을 숫자로만 인식한다. 충남 석성면 주민이 겪는 의료 공백과 서울 시민이 읽는 기후 통계 사이의 간극. 그것이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의 모습이다.
다시 처음의 숫자로 돌아가보자. 21년. 한 세대가 자라나는 시간이다. 그 시간 동안 우리는 무엇을 잃었고, 무엇을 얻었는가. 어쩌면 진짜 파산은 물이나 의료 서비스가 아니라, 그것들이 당연히 있을 거라고 믿었던 우리의 상상력인지도 모른다.
21년 뒤를 상상해본다. 그때 우리는 무엇을 당연하게 여기고 있을까. 아니, 그때도 '당연함'이라는 것이 남아있을까. 보건지소가 사라진 마을과 물이 파산한 지구에서, 우리는 어떤 삶을 재생산하고 있을 것인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