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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으로 세상을 보다 11월 4째주] 시간선택제의 그늘

3500명이 남긴 숫자가 말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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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의 배신
노동의 배신
바버라 에런라이크
노동의 배신바버라 에런라이크 · 2001

2024년 11월, 전국시간선택제노조가 근무시간 강제 변경 폐지를 환영한다는 성명을 냈다. 2019년부터 5년간 이어진 투쟁의 결과였다. 그동안 1만6000명이 떠났고 3500명이 남았다.

시간선택제. 처음엔 일과 삶의 균형을 약속하는 제도로 등장했다. 육아나 학업을 병행할 수 있는 유연한 근무 형태.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근무시간이 일방적으로 바뀌고, 정규직 전환의 길은 막혔다. 선택이 아닌 강제가 됐다.

바버라 에런라이크의 『노동의 배신』은 2001년 미국 저임금 노동 현장을 파고든다. 웨이트리스, 청소부, 월마트 직원으로 일하며 기록한 생존기. 시급 노동자들이 두세 개 일자리를 전전해도 빈곤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구조를 해부했다.

그가 발견한 건 단순한 저임금의 문제가 아니었다. 예측 불가능한 스케줄, 보장되지 않는 근무시간, 언제든 잘릴 수 있는 불안. 노동자를 '시간 단위로 쪼개 쓰는' 시스템이 만들어낸 새로운 계급이었다. 유연성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불안정성.

한국의 시간선택제 노동자들이 겪은 현실도 다르지 않았다. 주 15~30시간 근무라지만 실제론 회사 필요에 따라 들쭉날쭉했다. 생활 설계가 불가능했고, 다른 일자리를 구하기도 어려웠다. 시간을 선택한다는 것이 곧 삶의 통제권을 잃는다는 뜻이 됐다.

고용노동부 통계를 보면 시간제 근로자 수는 꾸준히 늘고 있다. 2018년 267만명에서 2023년 371만명으로. 전체 임금근로자의 16.9%에 달한다. 정부는 일자리 창출 성과로 내세우지만, 그 이면엔 쪼개지고 불안정해진 노동의 현실이 있다.

에런라이크는 묻는다. 열심히 일하는데 왜 가난한가. 그 답은 개인의 무능이 아니라 시스템에 있었다. 노동을 최대한 싸게, 유연하게 활용하려는 자본의 논리. 그 논리가 만들어낸 '워킹푸어'라는 모순적 존재.

5년간의 투쟁 끝에 시간선택제 노동자들이 얻어낸 건 근무시간 강제 변경 폐지였다. 작은 승리처럼 보이지만 본질은 바뀌지 않았다. 여전히 그들은 시간제 노동자고, 정규직 전환의 길은 요원하다.

남은 3500명과 떠난 1만6000명. 이 숫자가 던지는 질문이 있다. 노동의 유연화가 누구를 위한 것인가. 시간을 쪼개 파는 삶이 지속 가능한가.

일하는 사람이 가난해지는 사회. 그것이 우리가 만든 '유연한' 미래인가.

시간제 근로자 수 추이
출처: 고용노동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