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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으로 세상을 보다 2월 1째주] 돌봄의 시장화

친환경 육아 가전이 말하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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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량의 창조
역량의 창조
마르타 누스바움
역량의 창조마르타 누스바움 · 2015

마르타 누스바움은 『역량의 창조』에서 한 가지 불편한 질문을 던진다. 인간이 가장 연약하고 의존적일 때, 그 돌봄은 누구의 몫인가. 갓 태어난 아이, 병든 노인, 장애를 가진 이들. 이들을 돌보는 일은 오랫동안 가족, 그중에서도 여성의 당연한 의무로 여겨졌다. 누스바움은 이 '당연함' 뒤에 숨은 부정의를 파헤친다.

친환경 가전 브랜드 '이롭'이 30대 주부들 사이에서 급성장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육아와 밀접한 제품들로 시장을 공략했다는 분석이다. 언뜻 평범한 기업 성공 사례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 현상은 우리 사회가 돌봄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보여주는 거울이기도 하다.

돌봄의 책임이 개인에게, 특히 여성에게 전가될 때 무엇이 일어나는가. 시장은 재빠르게 그 틈을 파고든다. 더 나은 육아 도구, 더 편리한 가전제품, 더 안전한 먹거리. 돌봄의 부담을 덜어준다는 약속과 함께. 하지만 이는 근본적인 해결책일까, 아니면 또 다른 형태의 책임 전가일까.

누스바움이 주목하는 것은 돌봄이라는 행위 자체가 지닌 가치다. 그것은 단순히 생산성으로 환산될 수 없는, 인간 삶의 본질적 요소다. 하지만 자본주의 사회는 이를 끊임없이 시장 논리로 재편하려 한다. 돌봄 노동의 가치는 평가절하되고, 그 부담은 개인이 알아서 해결해야 할 문제가 된다.

육아 가전의 인기는 어쩌면 우리 사회가 돌봄을 공적 영역에서 다루는 데 실패했다는 증거일지도 모른다. 보육 시설은 부족하고, 육아휴직은 여전히 눈치 보이며, 돌봄 노동자의 처우는 열악하다. 이런 상황에서 개인은 시장에서 해법을 찾을 수밖에 없다.

물론 기술이 돌봄의 부담을 덜어주는 것 자체는 긍정적이다. 문제는 그것이 돌봄의 사회적 책임을 묻는 목소리를 잠재울 때다. 좋은 제품을 살 여유가 있는 이들과 그렇지 못한 이들 사이의 격차는 어떻게 메울 것인가. 돌봄의 불평등은 또 다른 불평등을 낳는다.

누스바움은 역량 접근법을 통해 대안을 제시한다. 모든 인간이 존엄한 삶을 살 수 있는 기본 역량을 보장하는 것. 여기에는 돌봄을 받을 권리와 함께, 돌봄을 제공하면서도 자신의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권리가 포함된다. 이는 개인의 선택이 아닌 사회의 의무다.

친환경이라는 수식어가 붙은 육아 가전의 유행은 또 다른 메시지를 담고 있다. 미래 세대를 위한 책임이라는. 하지만 진정한 미래 세대를 위한 투자는 깨끗한 제품을 사는 것만이 아니다. 돌봄이 모두의 책임이 되는 사회 구조를 만드는 것이다.

결국 누스바움이 『역량의 창조』에서 던지는 질문으로 돌아온다. 우리는 어떤 사회를 원하는가. 돌봄이 개인의 부담이 되어 시장에서 해결책을 찾아야 하는 사회인가, 아니면 돌봄이 공동체 전체의 책임이 되는 사회인가. 육아 가전 매출 그래프 뒤에는 이런 근본적 질문이 숨어 있다.

한국 여성 육아휴직 사용률
출처: 고용노동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