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 후 집중 읽기 모드로 전환됩니다

[책으로 세상을 보다 3월 1째주] 배제의 기술

유럽이 중국 의료기기를 막아선 날, 기술은 어떻게 국경이 되는가

기사 듣기
정의란 무엇인가
정의란 무엇인가
마이클 샌델
정의란 무엇인가마이클 샌델 · 2010

HLB파나진의 품질관리팀장은 마지막 인증서류를 검토하며 잠시 숨을 고른다. 유럽체외진단의료기기규정(IVDR) 인증. 이 복잡한 알파벳 조합이 회사의 운명을 가를 수도 있다는 생각에 어깨가 무거워진다. 하지만 동시에 안도감도 밀려온다. 중국 경쟁사들은 이미 게임에서 밀려났으니까.

2024년 4월, 유럽연합이 국제조달규정(IPI)을 시행하면서 공공 의료기기 입찰 시장의 판도가 뒤바뀌었다. 중국 기업들이 사실상 배제된 것이다. 표면적으로는 '상호주의'라는 이름을 달고 있지만, 누구나 안다. 이것이 기술 냉전의 또 다른 전선이라는 것을.

기술표준이 무역장벽이 되는 시대. 우리는 이런 풍경을 낯설어하지만, 역사는 늘 그랬다. 19세기 영국이 인도산 면직물에 높은 관세를 매긴 것도, 20세기 미국이 일본 반도체를 견제한 것도 결국은 같은 이야기의 변주였다.

마이클 샌델은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묻는다. 시장의 규칙은 누가 정하는가? 그 규칙이 정의로운지는 누가 판단하는가? IVDR 인증을 받기 위해 수십억원을 투자해야 하는 한국 기업과, 아예 기회조차 얻지 못한 중국 기업. 이들 사이에서 유럽은 무엇을 선택한 것인가.

한국 의료기기 기업들의 유럽 수출액은 2020년 8억2천만달러에서 2024년 12억4천만달러로 증가했다. 51%의 성장률이다. 같은 기간 중국 기업들의 성장률은 마이너스로 돌아섰다. 숫자는 명확하지만, 그 이면의 이야기는 복잡하다.

기술표준은 중립적이지 않다. 그것은 누군가의 이익을 반영하고, 다른 누군가를 배제한다. IVDR이 요구하는 임상 데이터와 품질 관리 시스템은 분명 환자 안전을 위한 것이지만, 동시에 특정 국가의 산업을 보호하는 도구이기도 하다.

한 중국 의료기기 업체 관계자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도 품질은 자신 있다. 다만 그들이 원하는 방식으로 증명하기엔 시간과 비용이 너무 많이 든다." 기술의 언어가 다르면 대화는 불가능해진다. 번역조차 허용되지 않는 세계에서, 침묵만이 남는다.

샌델은 시장의 도덕적 한계를 논하면서 이런 질문을 던진다. 모든 것이 거래 가능한가? 의료기기 시장에서 벌어지는 이 배제의 게임은 거꾸로 묻게 한다. 모든 것이 거래 불가능해질 수 있는가?

글로벌 공급망이 재편되는 지금, 우리는 연결과 단절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고 있다. HLB파나진이 올해 안에 IVDR 전 품목 인증을 완료한다는 계획은 단순한 사업 전략이 아니다. 생존 전략이다.

그 품질관리팀장은 서류를 정리하며 창밖을 바라본다. 멀리 인천항이 보인다. 저 바다 건너 유럽으로 갈 제품들이 곧 생산라인에서 만들어질 것이다. 기술표준이라는 새로운 국경을 넘어서. 누군가는 환호하고 누군가는 좌절하는, 21세기 무역전쟁의 조용한 승자로서.

한국 의료기기 對유럽 수출액
출처: 한국의료기기산업협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