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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으로 세상을 보다 3월 1째주] 의료의 경계

유럽이 중국 의료기기를 막아서는 순간, 우리는 무엇을 보호하려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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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상의학의 탄생
임상의학의 탄생
미셸 푸코
임상의학의 탄생미셸 푸코 · 1963

진단키트 하나가 국경을 넘는다. 같은 진단키트가 국경에서 멈춰 선다. HLB파나진이 유럽 체외진단의료기기 규정(IVDR) 인증을 서두르는 이유는 간단하다. 2024년 4월부터 EU가 중국산 의료기기를 공공입찰에서 사실상 배제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122억원에서 131억원으로 소폭 증가한 매출 뒤에는 이런 지정학적 계산이 숨어있다.

의료기기는 원래 국경을 모른다고 믿었다. 환자의 혈액 한 방울에서 질병을 찾아내는 기술에 무슨 국적이 있겠는가. 그러나 EU의 국제조달규정(IPI)은 다른 이야기를 쓰고 있다. 보호무역이 아니라 품질 관리라고 말하지만, 결과적으로 특정 국가의 제품이 환자에게 닿지 못하게 된다.

병원 검사실에서 일하는 임상병리사는 매일 수백 개의 검체를 다룬다. 그가 사용하는 진단키트가 한국산인지 중국산인지 따지며 일하지는 않는다. 오직 정확도와 신뢰성만이 기준일 뿐이다. 그런데 이제 그 키트가 어느 공장에서 만들어졌는지가 환자의 진단 결과만큼이나 중요해졌다.

미셸 푸코는 『임상의학의 탄생』에서 18세기 말 의학이 어떻게 권력의 도구가 되었는지를 추적한다. 의사의 시선이 환자의 몸을 투과하면서 동시에 사회적 통제의 그물망이 짜여졌다는 것이다. 21세기의 의료기기 규제는 푸코가 말한 임상의학의 정치학을 다른 방식으로 보여준다. 이번에는 진단 도구 자체가 정치적 선별의 대상이 된다.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이 있다. HLB파나진이 IVDR 인증을 받으려 애쓰는 동안, 정작 유럽의 많은 중소 의료기기 업체들도 같은 인증 때문에 고전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규제의 칼날은 중국만을 향하지 않는다. 자국 기업들도 높아진 문턱 앞에서 주저앉기도 한다.

의료의 본질은 무엇일까? 아픈 사람을 낫게 하는 것? 질병을 예방하는 것? 아니면 특정 국가의 산업을 보호하는 것? IVDR 인증을 준비하는 한국 기업들은 이 질문들 사이에서 줄타기를 한다. 기술력을 입증해야 하고, 품질을 보장해야 하며, 동시에 지정학적 균열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찾아야 한다.

푸코는 권력이 금지와 억압으로만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오히려 생산하고, 유도하고, 가능하게 만드는 방식으로 작동한다고. EU의 의료기기 규제도 마찬가지다. 중국 제품을 막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특정한 표준과 규범을 만들어내는 것이 핵심이다. 그 과정에서 한국 기업은 어느 편에 설 것인지 선택해야 한다.

진단키트 하나에도 역사가 있다. 코로나19 팬데믹 시기, 한국의 진단키트는 세계를 돌며 생명을 구했다. 국경도, 이념도 가리지 않았다. 그때 우리는 의료기술의 보편성을 믿었다. 하지만 불과 몇 년 만에 의료기기는 무역전쟁의 무기가 되었다.

실험실 벤치 위에 놓인 진단키트를 본다. 플라스틱 케이스 안에 담긴 시약은 여전히 투명하다. 그것이 한국산이든 중국산이든 유럽산이든, 환자의 혈액과 만났을 때 일어나는 화학반응은 동일할 것이다. 그러나 그 키트가 병원에 도착하기까지의 여정은 이제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되었다.

의료가 정치를 만났을 때, 우리는 무엇을 지키려 하는가. 환자의 건강? 자국의 산업? 아니면 무언가 다른 것? HLB파나진의 IVDR 인증 도전은 단순한 기업 전략이 아니다. 의료의 미래가 어떤 경계선 위에서 그려질 것인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징후다.

글로벌 체외진단의료기기 시장 규모
출처: Mordor Intelligenc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