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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으로 세상을 보다 3월 3째주] 최저임금

우리가 지키려는 것은 숫자인가, 사람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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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얼리스트를 위한 유토피아 플랜
리얼리스트를 위한 유토피아 플랜
루트허르 브레흐만
리얼리스트를 위한 유토피아 플랜루트허르 브레흐만 · 2017

"빈곤은 성격 결함이 아니라 현금 부족이다." 루트허르 브레흐만은 『리얼리스트를 위한 유토피아 플랜』에서 이렇게 잘라 말한다. 영국 재무장관이 최저임금을 10% 인상하던 날, 런던 외곽의 파운드랜드 물류센터에서는 직원들이 짐을 싸고 있었다. 30년간 '영국의 다이소'로 불렸던 이 회사가 매각을 결정했다.

최저임금 인상과 기업 매각. 인과관계가 명확해 보인다. 영국 소매업계는 인건비 부담으로 도미노처럼 무너지고 있다고 아우성이다. 그런데 브레흐만의 책은 다른 질문을 던진다. 애초에 왜 그토록 많은 사람이 최저임금에 매달려야 하는가.

파운드랜드 직원 대부분은 시간제 노동자다. 주 16시간만 일해도 되는 '제로아워 계약'을 맺은 이들도 적지 않다. 회사는 필요할 때만 부르고, 노동자는 불릴 때만 돈을 번다. 이런 구조에서 시급 1파운드 인상은 생존의 문제다. 기업에게는 부담이지만 노동자에게는 숨통이다.

브레흐만은 1960년대 미국의 기본소득 실험을 상세히 추적한다. 가난한 가족들에게 조건 없이 현금을 지급했을 때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 술과 도박에 탕진했는가. 아니었다. 아이들의 학업 성취도가 올라갔고, 병원 방문이 줄었으며, 가정폭력이 감소했다. 돈이 문제를 해결한 게 아니다. 돈이 없어서 생긴 문제들이 사라진 것이다.

영국 정부는 최저임금 인상으로 저소득층의 삶이 나아질 것이라 했다. 기업들은 인건비 폭탄으로 일자리가 사라질 것이라 맞섰다. 양쪽 다 틀리지 않았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을 놓쳤다. 왜 한 사회의 노동자 절반이 최저임금 근처에서 맴도는가.

한국의 상황은 어떤가. 2025년 최저임금은 시간당 10,030원이다. 월 209시간 일하면 209만원을 받는다. 이 돈으로 서울에서 방을 구하고, 밥을 먹고, 아이를 키울 수 있는가. 최저임금 인상률을 놓고 싸우는 동안, 정작 최저임금으로는 살 수 없는 현실은 외면된다.

브레흐만의 책이 던지는 도발적 제안들—주 15시간 노동, 보편적 기본소득, 국경 개방—은 허황되게 들릴지 모른다. 하지만 그가 진짜 묻는 것은 이것이다. 우리는 왜 불가능하다고 먼저 말하는가. 누구를 위한 불가능인가.

파운드랜드가 문을 닫으면 수천 명이 일자리를 잃는다. 최저임금을 동결하면 그들은 계속 일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게 답인가. 살기 위해 일하는 것과 일하기 위해 사는 것의 경계가 무너진 곳에서, 최저임금은 무엇을 지키고 있는가.

"가난한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시간이 아니라 더 많은 돈이다." 브레흐만의 문장이 차갑게 울린다. 영국 소매업계의 몰락을 보며 한국은 무엇을 배울 것인가. 최저임금을 억누르는 것이 답인가, 아니면 최저임금에 매달리지 않아도 되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 답인가. 우리가 정말로 지켜야 할 것은 무엇인가.

한국 최저임금 미만율
출처: 통계청 경제활동인구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