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6년 봄, 누군가 이 시대를 돌아본다면 무엇을 기억할까. 아마도 인공지능이 생성한 콘텐츠에 '슬롭'이라는 이름을 붙인 순간을 떠올릴지 모른다. 쓰레기를 뜻하는 이 단어가 올해의 단어로 선정된 것은 단순한 언어유희가 아니었다. 그것은 우리가 만들어낸 효율의 신화가 스스로를 잡아먹기 시작했다는 신호였다.
삼정KPMG의 보고서는 AI 기반 투자가 글로벌 핀테크 시장을 견인하고 있다고 전했다. 규제의 명확성이 확보되면서 자본이 물밀듯 쏟아진다는 분석이었다. 하지만 정작 그 AI가 만들어내는 콘텐츠에 사람들이 피로감을 느낀다는 역설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투자는 늘어나는데 신뢰는 줄어드는 이 간극에서 우리는 무엇을 보고 있는가.
19세기 영국의 러다이트 운동을 떠올려본다. 방직기계를 파괴했던 노동자들을 우리는 오랫동안 진보의 적으로 여겼다. 기술혐오자, 변화를 거부하는 자들이라고. 하지만 에릭 홉스봄이 『혁명의 시대』에서 지적했듯이, 그들이 부순 것은 기계가 아니라 자신들의 삶을 파괴하는 시스템이었다. 손으로 실을 잣던 사람들은 단지 일자리를 잃은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자신의 기술이, 자부심이, 존재의 의미가 하루아침에 무가치해지는 경험을 했다.
AI가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는 시대. 창작자들은 자신의 작업이 '슬롭'과 구별되지 않을까 두려워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인간다움을 증명하기 위해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 상황이 됐다. 효율을 추구하다가 비효율의 늪에 빠진 격이다. 홉스봄이 200년 전 노동자들의 절망을 기록했다면, 우리는 지금 무엇을 기록하고 있는가.
파미셀이라는 기업이 AI 소재기업에서 CDMO로 변신했다는 소식이 들린다. 영업이익이 2년 만에 3배 이상 늘었다고 한다. 성공 사례로 읽힌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또 다른 이야기가 있을 것이다. AI 기술을 개발하던 인력들은 어디로 갔을까. 새로운 분야로 전환하면서 어떤 기술들이 사라졌을까. 기업의 피벗은 생존전략이지만, 그 과정에서 휘발되는 것들을 우리는 잘 보지 못한다.
한국의 제조업 고용은 꾸준히 감소하고 있다. 통계청 자료를 보면 명확하다. 2018년 447만명이던 제조업 취업자는 2024년 420만명으로 줄었다. 6년 만에 27만명이 사라졌다. 같은 기간 IT 분야 취업자는 늘어났지만 그 증가폭은 제조업 감소분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다. 사라진 일자리와 새로 생긴 일자리 사이의 간극. 그 틈에서 추락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통계에 잡히지 않는다.
홉스봄은 산업혁명기 노동자들의 저항을 '절망적 투쟁'이라고 표현했다. 그들은 이길 수 없는 싸움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투쟁이 없었다면 노동권이라는 개념 자체가 탄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오늘날 AI에 밀려나는 사람들의 불안과 저항을 우리는 어떻게 읽어야 할까. 그저 기술 발전의 불가피한 대가로 치부할 것인가.
고용노동부가 인적자원개발 우수기관을 선정한다는 뉴스가 스쳐 지나간다. 재교육, 전환교육, 평생교육. 아름다운 말들이다. 하지만 50대 제조업 노동자가 코딩을 배운다고 20대 개발자와 경쟁할 수 있을까. 교육이 만능열쇠인 것처럼 포장되는 시대, 정작 필요한 질문은 다른 곳에 있는지도 모른다.
러다이트들이 기계를 부순 것은 1811년이었다. 그로부터 20년 후 영국은 공장법을 제정했다. 아동노동을 금지하고 노동시간을 제한했다. 파괴와 저항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변화다. 지금 우리가 'AI 슬롭'이라고 부르며 조롱하는 것들이 어쩌면 21세기판 기계파괴 운동은 아닐까. 다만 망치 대신 언어로, 물리적 파괴 대신 의미의 거부로 나타날 뿐.
2025년 봄, 우리는 아직 이 변화의 한가운데 있다. 무엇이 살아남고 무엇이 사라질지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하나는 분명하다. 기술이 인간을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스스로를 대체 가능한 존재로 만들어가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그것을 거부하는 목소리들이, 비록 작고 흩어져 있을지라도, 여전히 존재한다는 사실 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