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한국의 공공기관이 발급한 종이 증명서는 약 3억 2천만 건. 한 사람당 연간 6.2장을 떼어간 셈이다. 이제 정부는 2025년부터 디지털 자격증명 시대로의 전면 전환을 예고한다.
디지털 전환이라는 말이 익숙해진 지 오래지만, 신분증이나 자격증명이 스마트폰 속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단순히 편의성의 문제일까. 종이가 디지털로 바뀌는 것은 형태의 변화처럼 보이지만, 실은 존재 증명의 방식 자체가 달라지는 일이다.
에스토니아는 이미 2002년부터 디지털 신분증을 도입했다. 인구 130만 명의 작은 나라가 세계 최초로 전자투표를 실시하고, 99%의 공공서비스를 온라인으로 처리한다. 하지만 2017년, 이 완벽해 보이던 시스템에 보안 결함이 발견되었다. 76만 명의 신분증을 일시에 정지시켜야 했다.
무엇이 문제였을까. 기술적 결함은 고칠 수 있다. 진짜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 한 사람의 모든 정보가 하나의 키로 연결되었을 때, 그 키를 잃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종이 주민등록증을 잃어버리면 재발급받으면 된다. 하지만 디지털 신원이 해킹당하거나 시스템에서 지워진다면? 당신이 당신임을 어떻게 증명할 것인가. 블록체인이든 생체인증이든, 기술은 이 질문에 답을 주지 못한다.
야나 블롬퀴스트는 신원 증명의 역사가 곧 권력의 역사임을 보여준다. 중세의 통행증, 근대의 여권, 현대의 주민등록번호. 국가가 개인을 식별하고 관리하는 방식은 시대마다 달랐지만, 그 목적은 변하지 않았다. 통제와 보호 사이의 줄타기.
디지털 자격증명의 시대, 우리는 더 자유로워질까 더 투명해질까. 모든 행적이 기록되고 추적 가능한 세상에서 익명성은 사치가 된다. 하지만 투명성이 곧 신뢰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2025년 5월, 한국도 이 길에 들어선다. 편리함 뒤에 숨은 대가를 우리는 알고 있을까. 종이 한 장이 사라지는 것은 시작일 뿐이다. 그 자리를 채우는 것이 무엇인지, 지금 물어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