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6월 4일, 고용노동부는 올해 최저임금 심의 일정을 발표했다. 매년 반복되는 의례다. 노사가 마주 앉아 숫자를 놓고 씨름한다. 그런데 이 테이블에 앉을 자격조차 없는 사람들이 있다.
최저임금 대상에서 제외된 노동자들. 가사노동자, 수습 중인 노동자, 정신장애나 신체장애로 근로능력이 현저히 낮은 사람. 이들에게 지급되는 임금은 최저임금의 60퍼센트에 불과하다. 2025년 기준으로 시간당 5,970원. 하루 8시간을 일해도 4만7,760원이다.
제도는 늘 경계를 만든다. 안과 밖을 가른다. 보호받는 자와 그렇지 못한 자를 구분한다. 그 경계선 위에서 누군가는 떨어진다. 아니, 애초에 선 밖에 있었는지도 모른다.
바버라 에런라이크는 『노동의 배신』에서 최저임금으로 살아가는 실험을 했다. 2001년 미국에서였다. 웨이트리스로, 청소부로, 월마트 직원으로 일했다. 그녀가 발견한 건 단순한 진실이었다. 최저임금으로는 살 수 없다는 것. 그런데 우리는 최저임금조차 받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장애인 고용부담금 제도가 있다. 기업이 장애인을 고용하지 않으면 내는 돈이다. 그런데 이 부담금이 최저임금의 60퍼센트를 기준으로 산정된다. 기업 입장에서는 간단한 계산이다. 장애인을 고용하는 것보다 부담금을 내는 게 낫다. 제도가 만든 역설이다.
2024년 기준 중증장애인 고용률은 0.89퍼센트. 법정 의무고용률 3.1퍼센트의 3분의 1도 안 된다. 숫자 뒤에는 사람이 있다. 일하고 싶어도 기회를 얻지 못하는 사람들. 일해도 정당한 대가를 받지 못하는 사람들.
참여연대가 2025년 국민연금 개혁안을 논의하며 최저임금위원회를 언급한 건 우연이 아닐지도 모른다. 합의를 원칙으로 하되 여의치 않으면 다수결로 결정한다. 그런데 그 테이블에 앉지 못한 사람들의 목소리는 어떻게 반영될까. 다수결에서 소수는 늘 묻힌다.
보호받지 못하는 노동. 인정받지 못하는 노동. 우리 사회는 여전히 어떤 노동을 '진짜' 노동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가사노동이 그렇고, 장애인의 노동이 그렇다. 최저임금이라는 안전망조차 이들에게는 구멍 뚫린 그물이다.
에런라이크는 책 끝에서 말한다. 가난은 게으름의 결과가 아니라 구조의 문제라고. 20년이 지난 지금, 한국에서 우리는 무엇을 보고 있는가. 최저임금 인상률을 놓고 싸우는 동안, 그 아래 존재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보이지 않는다.
제도는 완벽하지 않다. 그래서 계속 질문해야 한다. 누가 배제되는가. 왜 배제되는가. 그 배제가 정당한가. 최저임금이라는 말 속에서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37만원. 2023년 기준 장애인의 월평균 임금이다. 같은 해 비장애인 임금의 13.5%에 불과하다. 이 숫자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단순히 적다고만 할 수 있을까. 아니면 이것이 우리가 만들어낸 체계의 필연적 결과일까.
장애인 고용 의무가 있는 기업들이 고용 대신 부담금을 선택하는 이유는 명확하다. 더 싸기 때문이다. 최저임금의 60% 수준인 부담금을 내는 것이 실제 고용보다 경제적이라는 계산. 여기서 우리는 무엇을 보아야 하는가. 제도가 만든 역설인가, 아니면 제도 자체가 품고 있던 의도인가.
최저임금 적용 제외. 이 네 글자가 만들어내는 현실은 생각보다 무겁다. 보호작업장에서 일하는 장애인들에게 최저임금은 남의 이야기다. 그들의 노동은 '생산성'이라는 잣대로 측정되고, 그 측정값은 늘 미달이다. 하지만 누가 그 생산성을 정의하는가. 무엇을 기준으로 하는가.
마이클 샌델은 『공정하다는 착각』에서 능력주의 사회가 만들어내는 배제의 메커니즘을 파헤친다. 그는 묻는다. 과연 우리가 가진 재능과 능력이 온전히 우리의 것인가. 태어날 때부터 주어진 조건들, 성장 과정에서 만난 기회들, 이 모든 것이 뒤섞여 만들어진 '능력'을 개인의 공과로만 돌릴 수 있는가.
샌델의 질문은 장애인 고용 현장에서 더욱 날카로워진다. 비장애인 중심으로 설계된 작업 환경에서 측정되는 '생산성'이 과연 공정한 잣대인가. 휠체어가 들어갈 수 없는 작업장, 수어 통역이 없는 회의실, 점자 자료가 준비되지 않은 교육. 이런 조건에서 측정된 생산성으로 임금을 결정하는 것이 정당한가.
능력주의는 성공한 사람들에게 오만을, 실패한 사람들에게 굴욕을 남긴다고 샌델은 지적한다. 하지만 장애인 노동 현장에서는 이 구도조차 성립하지 않는다. 애초에 경쟁의 출발선에 서지 못한 이들에게 능력주의의 논리는 어떻게 작동하는가. 그것은 배제를 정당화하는 도구가 될 뿐이다.
한국장애인고용공단의 통계를 보면, 장애인 고용률은 지난 10년간 2.5%에서 3.1%로 0.6%포인트 상승했다. 미미한 증가다. 더 주목할 점은 고용부담금 납부 기업이 여전히 절반을 넘는다는 사실이다. 제도는 있되 작동하지 않는다. 아니, 어쩌면 이렇게 작동하도록 설계된 것인지도 모른다.
37만원이라는 숫자로 돌아가보자. 이것은 단순한 임금 격차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 사회가 노동의 가치를 어떻게 매기는지, 누구의 노동을 인정하고 누구의 노동을 지워버리는지를 보여주는 지표다. 샌델이 말하는 '공정하다는 착각'이 가장 잔인하게 드러나는 지점이 바로 여기다.
최저임금조차 보장받지 못하는 노동이 존재한다는 것. 그것이 제도적으로 용인된다는 것. 이것이 2025년 대한민국의 현실이다. 우리는 이 현실 앞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제도를 바꾸는 것만으로 충분할까. 아니면 노동과 가치에 대한 우리의 인식 자체를 돌아봐야 할까.
『노동의 배신』이 최저임금의 그림자을 바라보는 시선은 표면적 현상 너머의 구조를 향한다. 바버라 에런라이크은 개별 사건의 원인을 개인에게 돌리는 대신, 그 사건을 가능하게 만든 사회적 조건을 추적한다. 이런 관점은 반복되는 문제의 근본 원인을 이해하는 데 필수적이다.
최저임금의 그림자 문제의 핵심은 제도와 현실 사이의 괴리에 있다. 법과 정책은 존재하지만 현장에서 작동하지 않거나, 작동하더라도 의도와 다른 결과를 낳는 경우가 빈번하다. 바버라 에런라이크이 주목하는 것도 바로 이 간극이다. 설계된 세계와 살아가는 세계 사이의 거리.
37만원. 이 숫자는 질문한다. 당신이 생각하는 공정은 무엇인가. 당신이 믿는 능력주의는 누구를 위한 것인가. 그리고 우리는 언제까지 이 질문을 외면할 것인가.
이 기사는 최저임금 적용 제외 대상 노동자들의 열악한 처우를 다룹니다. 이들이 최저임금의 60%에 불과한 시급을 받고 있어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기사는 장애인 고용부담금 제도가 역설적으로 장애인 고용을 억제하고 있음을 지적합니다. 이는 현재 진행 중인 사회적 과제로 볼 수 있습니다.
이 기사는 최저임금 심의 과정에서 대표성이 결여된 노동자들의 처지를 다룹니다. 이는 최저임금 결정의 형평성 문제를 제기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