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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으로 세상을 보다 6월 2째주] 재정적자와 침묵

31조원의 숫자 뒤에 가려진 선택의 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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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자본
21세기 자본
토마 피케티
21세기 자본토마 피케티 · 2013

한 기자가 재정적자 31.2조원이라는 숫자를 들여다본다. 정부는 추경을 탓하고, 야당은 감세를 지적한다. 그는 2024년 상장사 영업이익 196조원과 2025년 4월 법인세 수입 35.8조원을 대조해본다. 숫자들 사이에서 무언가 말하지 않는 것이 있다. 침묵도 하나의 선택이라는 것을 그는 안다.

프랑스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는 『21세기 자본』에서 불평등의 역사를 추적했다. 그가 주목한 것은 숫자가 아니라 숫자를 만드는 제도였다. 세율이라는 작은 퍼센트 포인트가 어떻게 한 사회의 풍경을 바꾸는지, 그 과정을 300년에 걸쳐 보여주었다. 재정이란 결국 우선순위의 다른 이름이라는 것.

31.2조원. 이 적자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추경 때문이라고 보면 지출이 문제가 된다. 감세 때문이라고 보면 수입이 문제가 된다. 하지만 피케티라면 아마 다르게 물었을 것이다. 이 적자가 누구에게 어떤 의미인가. 법인세를 적게 낸 기업에게는 투자 여력인가, 아니면 주주 배당인가.

한국의 법인세 실효세율은 지속적으로 하락해왔다. 2018년 17.2퍼센트에서 2024년 15.1퍼센트로 떨어졌다. 같은 기간 상위 1퍼센트 소득 집중도는 12.1퍼센트에서 14.7퍼센트로 올랐다. 우연의 일치일까. 세율이라는 숫자가 만드는 사회적 지형도가 있다.

재정적자를 놓고 벌어지는 공방은 사실 오래된 질문을 피하고 있다. 국가는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 세금은 단순한 국가 수입이 아니다. 그것은 한 사회가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는지 보여주는 지표다. 감세를 선택한다는 것은 재분배보다 시장을 믿겠다는 선언이다.

피케티가 발견한 것 중 흥미로운 사실이 있다. 불평등이 극대화되는 시점은 항상 세율이 가장 낮을 때였다. 1920년대 미국, 2000년대 유럽. 그리고 지금의 한국. 역사는 반복되지만 우리는 그것을 다른 이름으로 부를 뿐이다. 경쟁력, 효율성, 성장.

196조원의 영업이익과 35.8조원의 법인세. 이 비율을 어떻게 봐야 할까. 기업 입장에서는 여전히 부담이 클 수 있다. 하지만 그 부담을 줄여준 만큼 누군가는 더 내야 한다. 재정은 제로섬 게임이다. 한쪽이 적게 내면 다른 쪽이 많이 내거나, 아니면 미래가 낸다.

양극화가 성장을 가로막는다는 진단이 나온 지 오래다. 그런데 왜 양극화를 심화시키는 정책이 계속될까. 아마도 성장이라는 단어가 모두에게 같은 의미가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누군가에게 성장은 주가 상승이고, 누군가에게는 일자리다. 같은 단어, 다른 현실.

정부는 재정건전성을 강조한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건전성을 어떻게 달성할 것인가. 지출을 줄여서? 수입을 늘려서? 이 선택이 바로 정치다. 피케티는 말했다. 불평등은 자연현상이 아니라 정치적 선택의 결과라고. 31.2조원도 마찬가지다.

기자는 숫자들을 정리하고 기사를 마무리한다. 재정적자의 원인을 둘러싼 논쟁은 계속될 것이다. 하지만 그가 진짜 쓰고 싶었던 것은 아마 이런 질문이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어떤 사회를 만들고 싶은가. 그리고 그 대가를 누가 치를 것인가. 침묵 속에서 선택은 이미 이루어지고 있다.

한국 법인세 실효세율 추이
출처: 기획재정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