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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으로 세상을 보다 7월 2째주] 기후와 숫자 사이

대우건설의 기후정보공시 준비와 『측정의 역설』이 던지는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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측정의 역설
측정의 역설
제리 뮬러
측정의 역설제리 뮬러 · 2019

한국에서 기후정보공시 의무화를 앞둔 기업은 약 120개다. 2026년부터 자산 2조원 이상 상장사들이 첫 대상이 된다. 대우건설도 그중 하나다. 탄소배출량을 측정하고, 기후 리스크를 계산하고, 대응 전략을 수치화해야 한다.

숫자는 중립적이지 않다. 제리 뮬러의 『측정의 역설』(2019)은 계량화된 세계가 얼마나 많은 것을 놓치는지 추적한다. 성과지표가 목적을 대체하고, 측정 가능한 것만이 중요해지는 순간을 포착한다. 기후정보공시도 비슷한 궤적을 그릴까.

대우건설은 이미 움직이고 있다. 전담 조직을 만들고 컨설팅을 받는다. 스코프 1, 2, 3로 나뉜 배출량 산정 체계를 구축한다. 건설업계 특성상 공급망 전체를 아우르는 스코프 3가 관건이다. 콘크리트 한 포대, 철근 한 다발까지 추적해야 한다.

하지만 뮬러가 지적하듯, 측정은 종종 왜곡을 낳는다. 병원이 사망률을 낮추려 중환자를 거부하듯, 기업들도 숫자를 맞추려 본질을 외면할 수 있다. 탄소배출량을 줄이는 대신 계산 방식을 바꾸거나, 실질적 감축보다 상쇄 크레딧 구매에 매달릴지도 모른다.

2022년 기준 한국 상장사의 ESG 보고서 발간율은 28.3%였다. 2020년 15.2%에서 두 배 가까이 늘었다. 보고서는 늘었지만 실제 탄소배출량은 어떨까. 같은 기간 산업부문 온실가스 배출량은 2억 6천만톤에서 2억 5천만톤으로 겨우 3.8% 줄었을 뿐이다.

기후위기는 측정의 문제가 아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꾸 숫자로 환원하려 한다. 몇 도가 올랐는지, 몇 년 뒤에 어떻게 될지, 얼마를 투자해야 하는지. 뮬러의 표현을 빌리면 메트릭 픽세이션(metric fixation), 즉 지표 집착에 빠진 것이다.

대우건설의 준비 과정을 보면서 묻게 된다. 우리는 무엇을 측정하고 있는가. 기후위기 대응인가, 아니면 공시 의무 이행인가. 전 세계가 같은 틀로 배출량을 계산하면 문제가 해결될까. 표준화된 숫자 뒤에서 각 지역과 산업의 맥락은 사라지지 않을까.

물론 측정 자체를 부정할 순 없다. 뮬러도 인정한다. 문제는 측정이 전부가 될 때다. 숫자가 목적을 대체할 때다. 기후정보공시가 기업의 실질적 변화를 이끌 도구가 될지, 아니면 또 하나의 형식적 절차로 끝날지는 아직 알 수 없다.

120개 기업, 2026년, 스코프 1·2·3. 숫자들이 늘어선다. 그 사이에서 우리가 정말 물어야 할 질문은 무엇일까. 뮬러는 말한다. 측정하지 말라는 게 아니라, 측정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기후위기 앞에서도 마찬가지다.

숫자는 시작점이지 도착점이 아니다. 대우건설이, 그리고 곧 뒤따를 119개 기업이 이를 기억하기를 바란다. 기후정보공시라는 새로운 제도 앞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건 더 정교한 측정이 아니라 더 근본적인 질문일지도 모른다.

한국 상장사 ESG 보고서 발간율
출처: 한국거래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