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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으로 세상을 보다 9월 2째주] 의료 현장의 빈자리

누군가의 부재가 만드는 침묵의 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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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죽을 것인가
어떻게 죽을 것인가
아툴 가완디
어떻게 죽을 것인가아툴 가완디 · 2014

1만4439명. 2024년 한국에서 스스로 생을 마감한 사람들의 숫자다. 하루로 나누면 약 40명. 이들 중 상당수가 마지막 순간까지 의료 체계와 접점을 가졌을 것이다. 정신과 상담을 받았거나, 응급실을 찾았거나, 어떤 형태로든 도움의 손길을 찾았을 터. 그런데 2024년부터 시작된 의료 공백은 이 숫자에 어떤 그림자를 드리웠을까.

지씨지놈이 1년 만에 적자를 털어냈다는 소식이 들린다. 의료 파업으로 주춤했던 매출이 회복되었다고 한다. 기업의 실적표는 숫자로 말한다. 하지만 병원 복도에 남겨진 환자들의 시간은 어떤 숫자로도 환산되지 않는다. 의료 서비스가 상품이 되는 순간, 우리는 무엇을 잃는가.

아툴 가완디의 『어떻게 죽을 것인가』는 현대 의료가 놓치고 있는 질문을 던진다. 의사이자 작가인 그는 첨단 의료 기술이 발달할수록 정작 인간적인 돌봄은 사라진다고 지적한다. 병을 고치는 일과 사람을 돌보는 일 사이의 간극. 그 틈새로 빠져나가는 것들이 있다.

전공의 복귀율이 20~30퍼센트에 그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숫자로 보면 의료 인력의 70~80퍼센트가 현장을 떠났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것은 단순한 인력 부족의 문제가 아니다. 한 사람의 의사가 병원을 떠날 때, 그와 함께 사라지는 것들이 있다. 환자와 쌓아온 신뢰, 동료들과의 협업 체계, 축적된 임상 경험. 이런 것들은 새로운 인력을 투입한다고 해서 즉시 회복되지 않는다.

가완디는 의료진과 환자 사이의 대화가 얼마나 중요한지 강조한다. 병의 진행 상황을 설명하고, 남은 시간을 어떻게 보낼지 함께 고민하는 과정. 그것이 진정한 의료라고 말한다. 그런데 의사가 부족한 병원에서, 한 명당 봐야 할 환자가 늘어난 진료실에서, 이런 대화가 가능할까.

비급여 진료 가격이 공개된다는 소식도 들린다. 투명성은 높아지겠지만, 가격을 비교하며 병원을 선택하는 일이 일상이 될 것이다. 의료가 시장의 논리에 맡겨질 때, 우리는 환자인가 소비자인가. 돈을 낼 수 있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 사이의 간극은 어떻게 될까.

2025년 의대 증원을 재검토한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숫자를 늘리면 문제가 해결될 것처럼 말한다. 하지만 의사 한 명을 키우는 데는 10년이 걸린다. 그 10년 동안 현장은 어떻게 버틸 것인가. 더 중요한 것은, 단순히 의사 수를 늘리는 것이 과연 답인가 하는 질문이다.

가완디는 말한다. 의학의 궁극적 목표는 단순히 생명을 연장하는 것이 아니라, 의미 있는 삶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라고. 그런데 우리의 의료 시스템은 이 목표를 향해 가고 있는가. 아니면 점점 멀어지고 있는가.

지금 한국의 병원 곳곳에서는 빈자리가 늘어나고 있다. 떠난 의사들의 자리, 돌봄을 받지 못한 환자들의 자리, 그리고 우리가 잊어버린 질문들의 자리. 이 빈자리들이 우리에게 묻고 있다. 의료란 무엇인가. 돌봄이란 무엇인가.

처음의 숫자로 돌아가 보자. 하루 40명. 이들 중 몇 명이 제때 도움을 받지 못했을까. 의료 시스템의 공백이 만든 또 다른 공백들. 우리는 이 빈자리들을 어떻게 채울 것인가. 아니, 채울 수 있기는 한 것인가.

전국 의료기관 전공의 복귀율
출처: 보건복지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