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5년 10월, 검찰청이 사라진다. 70여 년간 수사와 기소를 함께 담당했던 기관이 공소청과 중대범죄수사청으로 나뉜다. 개혁이라 부르는 이들과 개악이라 부르는 이들이 팽팽히 맞선다.
권력의 집중은 늘 효율을 명분으로 삼는다. 하나의 기관이 모든 것을 처리하면 빠르고 편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1974년 닉슨이 백악관을 떠날 때, 미국인들이 깨달은 것은 달랐다. 권력이 한곳에 모이면 그 권력은 반드시 자기 보호를 위해 움직인다는 것이었다.
권력분립의 역사는 곧 인간 불신의 역사다. 몽테스키외가 삼권분립을 설계한 것도, 매디슨이 연방주의자 논집에서 야심은 야심으로 견제해야 한다고 쓴 것도 모두 같은 전제에서 출발했다. 인간은 믿을 수 없다. 특히 권력을 쥔 인간은.
한국 검찰의 역사를 들여다보면 그 불신이 왜 필요한지 알 수 있다. 1948년 정부 수립 이후 검찰은 늘 정치권력의 칼이었다. 때로는 독재를 떠받치는 기둥이 되었고, 때로는 정적을 제거하는 도구가 되었다. 민주화 이후에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검찰 스스로 변화를 거부해온 시간이 길다. 1999년 검경 수사권 조정 논의가 시작된 이래 26년. 그동안 검찰은 자신들의 전문성과 독립성을 강조하며 개혁을 막아왔다. 하지만 전문성이 곧 독점의 정당성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지금 논란이 되는 것은 개혁의 방향이 아니라 속도와 방법이다. 급진적 변화가 가져올 혼란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크다. 하지만 점진적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얼마나 많은 개혁이 좌초했던가. 때로는 단호한 결단이 필요하다.
권력기관의 개혁은 단순히 조직을 나누는 일이 아니다. 오랜 관행과 문화, 그리고 그 안에서 형성된 이해관계를 해체하는 일이다. 저항이 거셀 수밖에 없다. 그 저항 자체가 개혁이 필요한 이유를 증명한다.
결국 문제는 신뢰다. 국민이 검찰을 신뢰하지 않는다. 검찰이 정치를 신뢰하지 않는다. 정치가 검찰을 신뢰하지 않는다. 이 불신의 고리를 끊는 방법은 권력을 나누는 것뿐이다. 완벽한 제도는 없다. 다만 덜 위험한 제도가 있을 뿐이다.
2025년 10월, 검찰청이 사라진다. 새로운 제도가 더 나은 정의를 보장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하나의 거대한 권력이 둘로 나뉜다. 그것만으로도 민주주의는 조금 더 안전해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