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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으로 세상을 보다 11월 2째주] 고령화

노년의 풍경이 바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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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년
노년
시몬 드 보부아르
노년시몬 드 보부아르 · 1970

아침 지하철. 노약자석에 앉은 백발의 노인이 스마트폰으로 유튜브를 본다. 이어폰 없이. 주변 승객들의 눈초리가 따갑지만 아랑곳하지 않는다. 젊은 직장인이 자리를 양보하려 일어서자 손사래를 친다. 괜찮다며. 아직 그 정도는 아니라며.

올해 국민연금 수급자가 800만 명을 넘어선다고 한다. 제도 도입 38년 만이다. 숫자가 말하는 것은 단순하다. 우리 사회가 늙어가고 있다는 사실. 하지만 그 800만 명은 어떤 노년을 살고 있을까. 연금 수령액이 얼마인지보다 더 궁금한 것은, 그들이 하루를 어떻게 채우고 있는지일지도 모른다.

보부아르는 1970년에 『노년』을 썼다. 700페이지가 넘는 방대한 저작이다. 철학자답게 노년을 생물학적 현상으로만 보지 않았다. 역사 속에서, 문학 속에서, 그리고 무엇보다 사회 속에서 노년이 어떻게 규정되어 왔는지 추적한다. 그가 던진 질문은 지금도 날카롭다. 왜 우리는 노년을 타자화하는가?

흥미로운 건 보부아르 자신도 이 책을 쓸 때 60대 초반이었다는 점이다. 스스로를 노인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아니,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노년은 언제나 '나'가 아닌 '그들'의 문제였다. 하지만 글을 쓰면서 깨달았다. 노년을 거부하는 것 자체가 이미 노년의 증거라는 것을.

한국도 비슷한 모순에 빠져 있다. 고령화를 국가적 위기로 규정하면서도, 정작 노년의 삶 자체는 외면한다. 노인을 부양 대상으로만 바라본다. 생산성이 떨어진 존재로, 의료비를 축내는 존재로. 그런데 정말 그럴까. 오늘날 70대는 과거의 50대보다 건강하다. 기대수명이 늘어난 만큼 활동 가능한 시간도 늘었다.

문제는 사회가 그들에게 어떤 역할도 부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은퇴와 동시에 사회적 죽음을 선고받는다. 보부아르의 표현을 빌리면, 쓸모없는 쓰레기가 되는 것이다. 잔인한 표현이지만 정확하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산하지 않는 존재는 곧 잉여다.

그래서일까. 최근 노년층의 우울증이 급증하고 있다. 경제적 빈곤보다 더 무서운 것은 존재의 빈곤이다. 할 일이 없다는 것, 필요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 그 공허함을 어떻게 견딜 것인가. 유튜브라도 보지 않으면 하루가 너무 길다.

보부아르는 노년의 문제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의 문제임을 강조했다. 늙는다는 것은 생물학적 사실이지만, 노인이 된다는 것은 사회적 구성이다. 우리가 노년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노년의 의미가 달라진다. 지금 우리는 노년을 너무 좁게 정의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침 지하철의 그 노인도 한때는 누군가의 상사였고, 동료였고, 선배였을 것이다. 지금도 여전히 배우고 싶은 것이 있고, 나누고 싶은 경험이 있을 것이다. 단지 그럴 기회가 없을 뿐. 800만 명의 연금 수급자는 800만 개의 가능성이기도 하다.

고령화를 위기로만 볼 것인가, 기회로도 볼 것인가. 답은 우리가 노년을 어떻게 상상하느냐에 달려 있다. 보부아르가 50년 전에 던진 질문이 여전히 유효한 이유다. 우리는 모두 늙는다. 그때 우리는 어떤 노년을 맞이하게 될까. 지하철에서 유튜브를 보는 것 말고도 할 일이 있는 사회를 만들 수는 없을까.

65세 이상 우울증 진료 인원
출처: 건강보험심사평가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