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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으로 세상을 보다 12월 2째주] 숫자로 세는 삶

경제총조사가 시작되는 날, 통계학자는 무엇을 보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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엥겔 계수
엥겔 계수
매튜 더글러스
엥겔 계수매튜 더글러스 · 2019

1889년 독일 베를린. 통계학자 에른스트 엥겔은 노동자 가정의 가계부를 들여다보며 한 가지 법칙을 발견했다. 소득이 낮을수록 식비가 차지하는 비중이 높아진다는 단순한 사실이었다. 그는 200여 가구의 장부를 일일이 손으로 옮겨 적었다. 종이 위의 숫자들이 삶의 무게를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2025년 12월, 마산회원구에서 경제총조사가 시작됐다. 조사원들이 사업체 문을 두드리고 질문지를 펼친다. 종업원 수는 몇 명인지, 매출액은 얼마인지, 언제부터 영업을 시작했는지. 10,000여 개 사업체가 대상이다. 내년 5월까지 이어질 긴 여정의 출발점이다.

『엥겔 계수』(2019)에서 저자 매튜 더글러스는 통계가 어떻게 삶을 포착하는지 추적한다. 19세기 말 엥겔이 만든 지표는 21세기에도 여전히 쓰인다. 하지만 더글러스가 주목한 것은 숫자가 아니라 그 뒤의 사람이었다. 통계조사원이 문을 두드릴 때마다 누군가의 하루가 멈춘다는 것. 응답자가 펜을 들고 망설이는 순간들이 있다는 것.

경제총조사는 5년마다 돌아온다. 전국의 모든 사업체가 자신의 1년을 숫자로 요약해야 하는 시간이다. 정부는 이 데이터로 정책을 만든다고 한다. GDP를 계산하고 산업구조를 파악한다고 한다. 하지만 골목 치킨집 사장은 오늘도 닭을 튀기고, 미용실 원장은 가위를 든다. 그들에게 통계는 무엇일까.

더글러스는 베를린 노동자 가정을 다시 찾아갔다. 130년 전 엥겔이 조사했던 그 동네였다. 지금은 젠트리피케이션으로 카페와 갤러리가 들어섰다. 하지만 뒷골목엔 여전히 오래된 아파트가 있었고, 그곳 주민들은 여전히 월급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소득 대비 주거비 비중이 식비를 넘어선 지 오래다.

통계청 자료를 보면 한국의 자영업자 수는 2023년 기준 약 560만 명이다. 전체 취업자의 20%가 넘는다. OECD 평균의 두 배다. 이들은 모두 이번 조사에 응답해야 한다. 종이나 온라인으로. 바쁜 시간을 쪼개서. 때로는 정확한 숫자를 기억하지 못한 채로.

책에서 가장 인상적인 대목은 엥겔의 일기였다. 그는 조사를 거부하는 가정이 많아 고민했다고 적었다. 사람들은 자신의 살림살이를 남에게 보이고 싶어 하지 않았다. 국가가 세금을 더 걷으려는 것 아니냐는 의심도 있었다. 21세기 마산회원구의 사업주들도 비슷한 마음일지 모른다.

조사원 교육 매뉴얼을 보면 응답 거부 시 대처법이 자세히 나온다. 친절하게 설명하고, 비밀보장을 강조하고, 국가 발전에 기여한다고 설득하라. 하지만 정작 중요한 질문은 빠져있다. 이 숫자들이 정말로 당신의 삶을 바꿀 수 있을까.

더글러스는 묻는다. 통계는 객관적 진실인가, 아니면 권력의 도구인가. 엥겔 계수가 낮아졌다고 삶이 나아진 것일까. GDP가 올랐다고 행복해진 것일까. 그는 답 대신 또 다른 질문을 던진다. 만약 우리가 다른 것을 측정한다면 어떨까. 하루에 웃는 시간, 가족과 함께한 저녁 식사 횟수, 일하면서 느낀 보람의 순간들.

12월의 마산회원구. 조사원들이 태블릿을 들고 거리로 나선다. 2025년의 경제 지도를 그리는 첫걸음이다. 그들이 두드리는 문 너머엔 10,000개의 다른 이야기가 있다. 어떤 이는 올해 처음 가게를 열었고, 어떤 이는 폐업을 고민한다. 숫자로는 담을 수 없는 한 해의 무게가 거기 있다.

전국 자영업자 수 추이
출처: 통계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