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30년쯤 누군가 이 시기를 돌아본다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탄소중립을 외치던 세계가 다시 석탄을 꺼내든 2026년 초. 중동에서 날아온 에너지 충격파가 한국의 정책 테이블을 뒤흔들었다. 석탄은 비상용 완충재라고 정부는 말한다. 위기 국면에서 시간을 벌어주는 장치라고.
프랑스 역사가 티모시 미첼은 『탄소 민주주의』에서 에너지가 곧 정치라고 썼다. 석탄에서 석유로, 그 전환이 20세기 민주주의 형태를 결정했다는 분석이다. 석탄 시대 노동자들은 파업으로 국가를 멈출 수 있었다. 철도와 항구를 막으면 경제가 마비됐다. 석유는 달랐다. 파이프라인은 소수가 통제한다. 노동의 힘은 약해졌고 중동 왕정과의 거래가 민주주의를 대신했다.
한국이 다시 석탄을 떠올리는 건 석유 체제의 균열 때문이다. 중동 불안이 반복될 때마다 에너지 자립을 말한다. 하지만 석탄도 수입한다. 호주와 인도네시아에서 온다. 자립이 아니라 의존처를 다변화하는 것뿐이다. 그런데도 왜 석탄인가.
미첼의 책은 에너지원이 단순한 연료가 아님을 보여준다. 그것은 권력 구조다. 사회 조직 방식이다. 석탄 시대로 돌아간다는 건 무엇을 의미하는가. 탄광 도시의 부활? 새로운 노동 계급의 탄생? 아니면 과거와는 다른 형태의 통제 시스템?
2021년부터 2025년까지 한국의 석탄 화력발전 비중은 꾸준히 줄었다. 35.6%에서 27.2%로. 그런데 2026년 다시 증가 논의가 시작됐다. 태양광과 풍력의 간헐성 문제도 한몫했다. 바람이 불지 않는 날, 구름이 낀 주에 전력망은 흔들린다.
에너지 전환은 직선이 아니었다. 지그재그로 움직인다. 앞으로 세 걸음, 뒤로 두 걸음. 때론 뒤로 네 걸음. 석탄이 다시 등장한 건 후퇴일까 현실일까. 미첼이 살아있다면 뭐라고 했을까.
탄소 민주주의 개념은 여전히 유효하다. 다만 이제는 탄소를 넘어선 민주주의를 상상해야 할 때다. 재생에너지 시대의 권력은 어떤 모습일까. 분산된 태양광 패널이 만드는 정치 구조는. 각 가정이 생산자가 되는 체제에서 국가의 역할은.
석탄을 다시 꺼내든 2026년 1월. 이것은 잠시 숨을 고르는 시간일 수도, 새로운 경로를 찾는 과정일 수도 있다. 중요한 건 이 선택이 단순한 에너지 정책이 아니라는 점이다.
미첼의 통찰처럼, 우리가 선택하는 에너지는 우리가 만들 사회의 모습을 결정한다. 석탄 보일러에 불을 지피는 손이 그리는 미래. 그것은 어떤 민주주의인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