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버드대 정치학과의 스티븐 레비츠키와 대니얼 지블랫은 20년 넘게 세계 각국의 민주주의 부침을 연구해 온 학자들이다. 2018년 출간한 『How Democracies Die』는 트럼프 1기 출범 1년 시점에 쓰였지만, 단순한 미국 분석서가 아니다. 저자들은 바이마르 독일, 페론의 아르헨티나, 후지모리의 페루, 차베스의 베네수엘라, 에르도안의 튀르키예, 오르반의 헝가리, 두테르테의 필리핀 등 20세기 중반 이후 민주주의 후퇴 사례 수십 개를 비교 분석한다.
책의 가장 중요한 논지는 두 가지다. 첫째, 21세기 민주주의는 군사 쿠데타가 아닌 '선출된 지도자에 의한 내부 침식'으로 후퇴한다. 쿠데타는 눈에 띄고 국제사회의 제재를 부르지만, '선출된 지도자의 권한 남용'은 그 법적 정당성 때문에 견제가 어렵다. 둘째, 이런 침식에는 공통 단계가 있다. 심판 기관 장악(법원·선관위·감사기관), 상대 진영의 탈(脫)정당화(반대자는 '적'이 된다), 미디어 통제, 그리고 게임의 규칙 재작성이다.
저자들이 민주주의의 '붕괴 경보기'로 제시한 4가지 행동 지표는 이렇다. 첫째, 민주적 게임의 규칙에 대한 거부 혹은 약한 약속. 둘째, 정치적 반대자의 정당성에 대한 부정. 셋째, 폭력에 대한 관용 혹은 격려. 넷째, 언론·시민사회·야당의 자유를 제한하려는 의지. 저자들은 "어느 한 지표가 명확히 충족되면 경계, 여러 지표가 충족되면 비상"이라고 경고한다.
한국의 2025~2026년 헌정 위기를 이 4가지 지표로 분석하면 어떨까. 2025년 12월 3일의 비상계엄 선포는 '민주적 게임의 규칙에 대한 거부'(지표 1)의 명시적 표현이었다. 계엄 해제를 위해 국회로 달려가는 시민들을 막아서려 한 군·경 동원은 '폭력에 대한 관용'(지표 3)에 해당한다. 계엄 선포 당시 "국회는 반국가 세력의 소굴"이라는 대통령 담화는 '정치적 반대자의 정당성 부정'(지표 2)에 정확히 부합한다. 4가지 지표 중 3개가 단일 사건에서 동시에 충족됐다.
그러나 레비츠키와 지블랫이 책에서 강조하는 것은, 이런 지표의 충족 여부보다 '그 이후 민주주의가 어떻게 반응하는가'다. 그들은 "민주주의의 진짜 방어선은 헌법 조문이 아니라 '견제의 관행'과 '당파를 넘는 책임 윤리'다"라고 말한다. 법원이 권력에 복무하지 않고, 의회가 당파를 넘어 헌법 수호에 나서며, 시민사회가 분열되지 않은 채 연대한다면, 침식은 되돌려질 수 있다.
2026년 한국이 이 점에서 어떤 성적표를 받았는지는 복합적이다. 긍정적 지표로는, 국회가 비상계엄 선포 2시간 만에 해제 요구안을 통과시켰다는 사실이다. 한국 헌법 77조에 따른 국회의 비상계엄 견제 권한이 실제로 작동한 첫 사례다. 또한 2026년 초 제정된 내란특검법은 입법부의 사후 견제 장치로 작동 중이다. 부정적 지표로는, 계엄 선포와 해제 과정에서 드러난 '정치적 양극화'가 오히려 강화됐다는 점이다. 여야는 서로를 '반민주 세력'으로 규정하며, 중도적 공론장은 오히려 위축됐다.
레비츠키와 지블랫의 두 번째 중요한 개념은 '정치적 자제(forbearance)'다. 이는 '법적으로 허용되지만 사용하지 않는 권한'의 관행을 가리킨다. 예를 들어 미국 대통령은 연방대법관을 이론상 원하는 만큼 임명할 수 있지만, 관행적으로 공석 발생 시에만 임명한다. 이런 '자제'가 민주주의의 비공식 규범이며, 이 규범이 무너지면 헌법 조문이 있어도 민주주의는 위험해진다. 한국의 비상계엄 선포는 헌법 조문상 대통령의 권한이지만, 1987년 민주화 이후 '자제의 관행'이 누적돼 왔다. 2025년 12월 3일은 그 자제가 깨진 순간이다.
2026년 4월 헌법재판소의 내란특검법 헌법소원 정식 심판 회부는 '견제의 관행'이 다시 작동하는지에 대한 시험대다. 헌재가 어떤 결정을 내리든, 그 결정에 대한 여야·시민사회의 반응이 '정치적 자제'의 복원을 가늠하는 척도가 된다. 결정 자체보다 '결정 수용의 관행'이 더 중요하다는 저자들의 지적은, 2026년 한국에서 유난히 묵직하게 읽힌다.
이 책의 마지막 장은 '민주주의를 구하기 위한 처방'을 담고 있다. 저자들은 네 가지를 제안한다. 첫째, 정치인들은 당파적 승리보다 민주적 규범을 우선시해야 한다. 둘째, 시민사회는 광범위한 연대(정파를 가로지르는)에 기초해야 한다. 셋째, 경제적 불평등 해소 없이는 민주적 규범 복원이 어렵다. 넷째, 민주주의의 방어는 '국가 대 국가'의 문제가 아니라 '시민 대 시민'의 문제다.
저자들은 책 말미에서 이렇게 쓴다. "민주주의의 가장 큰 위협은 외부의 적이 아니라, 민주주의 안에서 정당하게 선출된 지도자가 그 권력을 남용하려는 순간이다. 이 순간을 인지하고 저항할 수 있는 시민적 감각이, 민주주의의 마지막 방어선이다." 2026년 한국이 갖고 있는 것은 헌법과 법률 조문의 방어선만은 아니다. 2025년 12월 3일 밤 계엄 해제를 위해 국회 앞에 모인 수만 명의 시민이 보여준 것이, 그 '시민적 감각'이었다.
이번 주 추천 독서: Steven Levitsky & Daniel Ziblatt, 『How Democracies Die』(Crown, 2018, 320p) / 한국어판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어크로스, 2018). 후속작 『The Tyranny of the Minority』(Crown, 2023)도 함께 읽을 가치가 있다. 병행 독서로 야스차 뭉크 『위험한 민주주의』(와이즈베리, 2018), 최장집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후마니타스, 2005 증보판)를 추천한다.
군사 쿠데타가 아닌 '선출된 지도자의 점진적 침식'이 2020년대 민주주의 후퇴의 보편 패턴이며, 2025년 비상계엄 사건은 한국판 사례에 해당한다.
2025년 12월 3일 사건은 저자들의 '게임 규칙 거부·반대자 정당성 부정·폭력 관용' 3개 지표를 단일 순간에 동시에 충족했다.
헌재의 내란특검법 심판은 형식적 결정이 아니라, 결정에 대한 여야·시민사회의 수용 관행이 '자제 규범' 복원의 척도다.
